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편집자주>

이번 일정의 시작, 안대교

안대동 입구 표지석

◇ 동지산과 마주보고 있는.. 천주교의 마을, 안대동

동지산과 마주 보고 있는 안대동은 김대건 신부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살던 곳이다. 프랑스선교사 조스 신부가 숨을 거둔 곳도 안대동이고, 천주교가 자리 잡은 곳이기에 성당 건물도 일찍부터 들어섰다. 구릉지 정상부에 자리한 안대성당이 이제는 낡고 버려졌지만, 아직도 성당 터에는 성스러운 기운이 맴돌았고, 성당과 같이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낙락장송들이 한껏 멋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성장한 안대동은 한국 최초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만주에서 충남 강경으로 내려 와 이곳에서 처음으로 유숙한 것으로 유명하며, 동지산과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안대동 초입 아궁이와 가마솥의 모습

마을 입구 표지석 근처에 위치한 안대동 마을회관

동지산을 마주보고 있는 안대동 마을길을 걸으며 기자는 저도 모르게 성지 순례자가 된다. 마을의 경치가 새로워지고,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깊게 들이마시면 머릿속을 가득 채운 복잡한 상념들이 사라진다. 동네 어르신들과 별 이야기는 아니어도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있고, 기자에게 미소를 건네며 인사를 전하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따뜻한 정을 느낄 수도 있다.

마을 초입에서 안대성당으로 올라가는 마을길

안대성당 입구

하지만 선거시기가 다가와서 그런지 몇 걸음 간격으로 휴대전화가 계속 울려 기자의 정신을 흩트린다. ‘왜 이렇게 자주 오는 거야’하는 생각과 함께 울리는 휴대전화 소리에 발걸음이 빨라지며 괜스레 짜증이 난다. 마음의 정화는 물론, 차분해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을에서 지대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안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대성당에서 안대동을 바라 본 모습

안대성당 내 높게 솟아오른 소나무들

성당으로 올라가는 본격적인 순례길 위에는 앞서 걸었던 성직자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것만 같다. 한쪽에는 주택들이 줄을 지어 위치해 있으면서도 반대쪽에는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고즈넉하면서도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가 상념을 잊게 만든다. 길의 정상부에 도착하자 허름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안대성당 내 사제관

안대성당은 비록 큰 규모는 아니지만, 다양한 건물들 안에서 시대를 읽을 수 있다. 미사를 드리는 예배당의 외형은 서양과 동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고, 사제관은 일본식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그리고 한 쪽에 자리하고 있는 구호물자창고는 또 다른 모습으로 시선을 끈다.

하지만 건물 안은 텅텅 비어 있었고, 모든 것이 방치돼 있었으며, 보수 보강을 위한 자제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함열읍에 위치한 함열성당이 생기면서 안대성당의 모든 것들이 다 빠져나갔기 때문. 더욱이 예배당은 한 때 섬유공장에 임대됐다가 제철공장에 임대돼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차라리 공장으로 사용된 예배당 말고 사제관과 구호물자창고처럼 그냥 방치돼 있는 모습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성당의 모습을 볼 때면 고개를 푹 떨 구는 이유다. 나바위성당과 함열성당이 건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처럼 안대성당은 역사적인 가치와 주민들의 소통 창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마을에 볼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다니기 시작하더니만, 계속해서 그것이 이어지고 넘쳐났다”라며 아직도 주민들은 안대성당을 이렇게 기억하곤 한다.

무너진 성당의 모습에 순례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대동을 거쳐 가겠지만, 옛 모습을 되찾아 새롭게 단장된 안대성당의 모습을 기대하는 순례자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겨 안대동을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삼양 마을 입구 표지석

성당을 빠져나와 구불거리는 마을길을 따라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규모가 워낙 작다보니 집들이 듬성듬성 위치해 있고, 마을길 또한 집이 위치한 곳에 맞춰서 이어진다. 어지럽게 느껴지면서도 자연스러운 것이 마을길의 매력이다. 금방까지도 집집마다 안대길이라는 표지판이 걸려있었는데, 금세 삼양길로 바뀌었다. 안대동과 인접한 삼양 마을 내부로 들어온 것이다.

삼양 마을에서 안대동으로 가는 길 중간 황구의 모습

◇ 함열읍과 성당면의 경계.. 추억의 동네 삼양 마을

삼양 마을은 안대동과 붙어 있어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집집마다 걸려 있는 도로명주소 표지판을 보고 나서야 안대동을 벗어나 삼양 마을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본래 삼양 마을은 벌메라고 불렀다. 지형이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 위치해 있어 산양(山陽)이라 부르다 삼양으로 변했고, 벌메라는 뜻은 순수 우리말로 볕이 잘 드는 뫼(山)라는 뜻인데, 이 근방으로 나무를 벌목해 민둥산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삼양 마을 끝자락,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제실의 모습

마을길은 오밀조밀 구불거려 어지러우면서도 재미가 있다.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나면 넓은 터에 한옥의 멋을 자아내며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어느 집안의 제실이 길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면서도 제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덩그러니 자리한다. 때마침 제실 맞은편에 위치한 주택 안마당에서 쪽파를 들고 걸어 나오는 동네 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실인 거 같은데 엄청 크고 아름답네요. 누가 만들었는지 알고 계신가요?”

“누군지는 모르는데요. 원래 주인이 저기에 제실이랑 학당을 만들어서 아이들도 가르치고, 조상님들을 모신다고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들리는 말로는 집 안에서 돈을 안줘서 그런가 한 3년째 저렇게 남겨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주민과의 짧은 대화를 뒤로 어느 집안의 제실이 있는 길 앞에서 왠지 모를 엄숙함에 저절로 꼽발로 걷게 된다.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햇빛이 길 위를 비춰 붉게 빛이 났다. 마을길을 걸으며 신비로우면서도 새로운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에서 말한 “길은 길에 연하여 끝이 없다”가 떠올랐다. 기자는 마을길을 걸으며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저 집을 돌아나가면 뭐가 나올까’하는 호기심에 가득차게 된다.

함열농공LED협동화단지에서 바라본 삼양 마을의 모습

삼양 마을에서 성당면으로 이어지는 성당교 초입

얼마 못가 마을길은 도로변과 연결됐다. 안대동과 삼양마을은 용안면과 함열읍의 서쪽 경계지점이 됐고, 삼양마을의 초입에는 성당교가 위치해 함열읍과 성당면의 북쪽 경계지점이 됐다.

동네 주민들은 함열읍에서 성당면으로 이어지는 성당교를 성당다리 혹은 함열다리라고 불렀다. 또 근방에 삼산마을이 위치해 있어 삼산다리라고도 불렀고, 어릴 적 다리 밑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성당면 친구들과 함께 돌을 던지며 노는 투석전을 하기도 했다.

삼양 마을 초입 동네 구멍가게의 모습

다시 안대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성당교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몇 걸음 가지 못해 이색적인 모습에 옛 추억이 떠오른다. 이제는 시골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동네 구멍가게가 마을 초입에 위치하기 때문.

구멍가게는 기자의 목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고 좁은 미닫이문과 건물은 낡았지만, 지붕만큼은 새 단장을 했다. 구멍가게는 ‘순이네 가게’나 ‘삼양 슈퍼’라든지 마을 슈퍼와 같이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닌 그저 미닫이문에 ‘가계’라는 종이만 붙어 있다. 때마침 주인 할머니는 안에만 있기 답답하다며 가게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기자들에게 인사를 건네신다.

“여기는 슈퍼네요. 어르신? 점방이라고 하잖아요.”

“맞아 맞아. 점방. 옛날에는 점방이라고 불렀지.”

“바람이 많이 차가운데 왜 나와 계세요. 마실 안 나가시고.”

“경로당 가면 노인네들 다 모여 있는데, 나는 가게 보느라 여기 있지.”

“마을 분들이 물건 사러 많이들 오시나요?”

“뭐 동네 조그만 가게에 사람이 많이 오겠어. 요 옆에 읍내 나가서 마트 가지. 그냥 소일거리로 하는 거라 사람이 오든, 안 오든별로 관심이 없어.”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린 동네 구멍가게. 골목 어귀에 자리했던 추억의 점방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주전자 가득 막걸리를 받아오고, 학교가 끝나면 불량식품을 사먹던 추억으로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주인 할머니는 손님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듯 가게 앞에 앉아 옛 추억을 그리워하며,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내신다.

글 강정호 기자·사진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