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지청소년사회교육원 익산키퍼트리 이강래 이사장
‘10월의 마지막 밤’이던가! 언젠가는 기다리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올해는 마지막 밤도 갑자기 사라져버린 느낌이랄까. 정신없이 왔다가 언제 갔는지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11월, 모처럼 선선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는 이 가을도 그렇게 눈 깜박할 사이에 훌쩍 날아가 버릴 것인가?
한여름 같던 올 9월은 흐르는 땀을 연신 닦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가을이 벼 이삭처럼 몽글게 익어가는 10월에는 청정 하늘, 에어컨보다 더 서늘한 솔바람, 그리고 빌딩 숲 빈틈으로 붉디붉은 단풍이 꽤 살맛 나는 계절을 풍성하게 열어주었다.
이제 가을 벚꽃나무 단풍은 찬연하지만, 떨고 있는 진홍의 떨기가 아름답기보다는 차라리 서글프다. 봄날의 화려한 연분홍 추억 시들고 핏빛 마지막 잎새마저 떨구어야 할 참수의 정적… 소멸을 은유하는 수의(壽衣)처럼 애절한 빛깔의 벚 단풍은 죽음을 앞둔 여인이 그 처절한 아픔을 곱게 감추고 꾸미는 최후의 외도 아닌가? "단풍나무, 붉게 물들고 있었지요/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운 날들 이어지더니/ 가을이 오고 말았지요... 내 낯빛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김현주 '단풍나무')
혹자는 ‘벚꽃은 세 번 핀다’고도 하였다. 봉오리 속에서 두렷한 빛으로 한번, 정작 활짝 피어 두 번, 상실이 두려운 듯 잎의 진홍으로 세 번 말이다.
가을 단풍은 포장했던 내 지난날의 삶을 애써 꾸짖는 듯 절로 얼굴 붉히며 사찰 막새의 풍경처럼 고백을 쏟아냈다. 더 붉어 위태로운 단풍 빛은 참회의 절절함이다. 참회가 절절할수록 단풍의 적갈색 추녀 새는 짙은 바람이 되어 날아간다. 이토록 내가 처절한 뉘우침을 토해낸 적이 있었던가? 이처럼 간절함의 벼랑에서 내 여정의 짧은 새벽을 연다. 이내 닫는다.
가을의 숲과 산은 온통 붉게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온갖 색깔이 다 함께 살아간다. 주황색 노란색 추자색 연두색 밤색 적갈색... 심지어 사시사철 푸르기만 한 소나무 전나무 동백나무 대나무도 울긋불긋한 단풍들 곁에 싱싱한 초록빛으로 함께 단풍 들어 있다. 숲과 산에 시뻘건 빛깔만 가득하다면 적갈색도 단조롭기 짝이 없겠지. 그들은 떠나가면서도 머물러 있는 생명체를 아니 우주를 보듬고 있다니, 소름 끼치도록 섬뜩한 지혜를 느낀다.
온갖 빛깔이 함께 어울려 섞여 있으면서도 러시안 포크송에 코러보드처럼 단풍은 기이하기 그지없는 울림을 주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가을 숲은 선동을 아예 모르는 것 같아 더욱 이채롭다. 가을은 하나의 빛깔만을 강요하며 선동하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나뭇잎은 자유로이 제 빛깔을 뽐내고 있지만, 또 다른 빛깔의 나뭇잎들과 어울려 숲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최후의 왈츠인가! 나는 그만 무력해진다.
산 접동새 울음소리만 들리는 숲은 적막하다, 온갖 잡새들이 한데 어울려 지저귀는 합창이라야 숲은 더 아름답고 충만해진다. 자유로움와 공화로움의 야릇한 어울림… 자유 안의 공화, 공화 속의 자유가 단풍철의 살인이다. 가을 숲은 배제(排除)나 비방이 없는 자유사회, 독선도 선동도 없는 공화의 공동체요 겸허의 허허로운 몸짓이지 않는가....
이러한 가을 숲에 새우는 소리를 들었다. 1년에 한두번 이즈음 날려 오는 소리이다. 스님은 알아 차리고 동자더러 새벽 일찍 가 볼 곳이 있으니....
어스름 새벽 언덕을 올라 큰스님 가리키는 곳을 내려보니 날개도 펴지 않은 채 죽어있지 않는가?! 생명이 질 때 못 참고 내는 실연의 아픔을 어제 스님은 알아차린 것이다. 단풍처럼 스스로 떨어진 새소리는 울음이 아닌 목탁소리라 하였다. 노스님의 일갈이 귀에 쟁쟁하다.
다시 돌아와 선동의 끝은 반(反)자연적인 획일주의 사회다. 자연은 획일화를 모른다. 획일은 직구일 뿐이다. 획일화는 자연스레 아우르는 질서가 아니라 인위적 억압의 구조,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한 잎 밖에 남지않는 붉다 못해 검게 바랜 낙엽은 뭐라고 생각할까 궁금증이 인다.
사람에게는 사물의 인식이나 가치판단의 기준을 획일화하려는 본성적 경향이 있나 보다. 개인이 아닌 대중의 경우는 더욱 그렇지. 선동에 취약한 대중심리는 체질적으로 다양성을 거부하기 마련이고 획일화된 표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훨씬 편할 뿐 아니라 위험부담도 적기 때문이다.
대중의 집단의사는 여과(濾過)되지 않은 감성이나 눈앞의 편의성 또는 원초적 이해관계에 따라 획일적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유와 개성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오히려 유행의 노예가 된 듯 획일적인 모습을 좇아가는 이즈음의 세태는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태어난 시점에 따라 사람을 재단하려 든다면 이 노릇을 어찌한다는 것인지? 무슨 세대가 무언가!
개성과 다원화의 시대인 21세기가 선동과 유행에 따라 대중의 감성적 획일주의로 회귀하는 듯한 현상은 아이러니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획일주의가 '대중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획일화'라 해도 이 가을의 순리에, 자연에, 바람에, 아니 단풍의 절절함에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11월이 오면, 벼(禾)에 불(火)을 지르려는 가을(秋)이 깊어 간다. 11월은 요녀처럼 나뭇잎에 불을 붙여 단풍숲을 만들고, 이냥 내 마음에도 불을 붙여 참회의 용광로를 시뻘겋게 달군다. 그리고는 저기 보인다. 큰스님의 목탁소리도 만질 듯이 보인다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사는 것 아니었다… 부끄러운 날들 이어지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해질수록… 내 마음 속 참회의 용광로는 벌겋게 타오르고 있다. 그러고만 응시하면 뭐하냐? 차라리 새가 되어 떨어지던지, 낙엽이라도 되어 따라가시든지 또다시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로 되돌아 선다. 창문을 지긋이 닫고 만다.
건 듯 바람 불면 초를 꺼낸다. 그냥 따뜻하니까 낙엽이나 긁어 태우며 장송곡이나 암송하시지요. 멀쩡한 남의 삭신 초는 왜 태워서 죽입니까? 촛불도 뜨거워요 이제 끄세요. 단풍처럼 나를 태웁시다요. 나를 태워야 볼 수 없는 세계가 보이지 않을까요. 11월의 노을에 비껴서서 대롱대롱 흔들거리는 핏빛 단풍의 절절함은 잔을 피하고 싶어도 끝내 받아들이는 꼬마 예수의 형상을 빼닮았다.
내 자유를 아끼면서 남의 자유를 업신여기지 않았던가? 정치적 선동과 무리본능에 휩쓸려 단풍의 어울림을 가로막지는 않았던가? 단풍 숲 앞에 부끄러이 고개를 떨군다. 다시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