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윤약국 약사

하루 일과가 끝나갈 쯤 이었다. 젊은 아줌마가 들어와 처방전으로 치과 약을 조제했다.

약을 받아 나가다 다시 들어오더니 잠시 머뭇머뭇하다 쇼핑백을 내민다.

“혹시 머위 드실 줄 아시면 드리려구요.”

“요즘 참살이 음식이라고 뜨는데.”

“선물 받았는데 요리도 할 줄 모르고 안 먹어봐서요.” 

 나이가 많아 잘할 거라 생각한 걸까, 시골 출신일거라 생각한 걸까, 5월의 내 얼굴에 그리움이 쓰여 있었을까. 초면의 손님에게 이런 좋은 선물을 받다니 감사할 일이다.

나는 머위나물을 좋아한다. 제철 음식을 자연산으로 맛볼 수 있다는 것은 복이다. 특별한 요리법도 없다. 살짝 데쳐서 된장에 무치기만 하면 된다. 머위는 특유한 향과 맛으로 봄철 입맛 잡는 데는 최고다. 뿐만 아니라 각종 영양소가 풍부해 겨우내 지친 우리 몸에 말할 나위 없이 좋은 건강식품이다.

머위는 친정 텃밭에 많았다. 자연이 배경이 되는 친정 동네. 지금은 피붙이가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래도 그 곳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폐가가 되었지만 지난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우리 집이 있고 어머니의 체취가 남아 있는 텃밭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텃밭은 울 밖에 있다. 대문을 나서면 길 건너 바로다. 한 마지기나 될까. 어머니는 2백평을 2천평처럼 이모저모로 잘 가꾸셨다. 우리 집이 동네 한 가운데 있다 보니 텃밭도 동네 가운데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가끔씩 텃밭에 갔었다. 어머니의 희로애락이 묻힌 그 밭에서 어머니의 눈높이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흙냄새 때문인지 시간을 거꾸로 돌린 때문인지 여유가 생기고 넉넉해지고 부자가 된 기분이 되기도 했다. “건강하고 부지런하니 아들 딸 공부시키고 밥은 먹고 살더라”어머니의 말씀이 들리기도 했다.

텃밭은 어머니의 푸념을 다 받아 주었던 곳이다. 어머니는 꽤 심각한 얼굴로, 때론 웃는 얼굴로, 가끔은 무표정하게 그곳에 서거나 앉아 있곤 하였다. 텃밭은 어머니의 가용 돈을 만들어주는 삶의 여유였다. 또 화를 삭이기 위해 호미 날 끝에 분풀이를 파 엎던 어머니의 수도장이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새로운 농사법이나 아이디어를 얻는 실습장이었던 텃밭은 자연의 지혜를 탐구하는 도서관 노릇도 톡톡히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외유내강 형이었다. 식구들에게 언제나 온화했다. 아버지가 거나하게 술이 취해 들어오셨을 때도, 할머니가 5년 넘게 병석에 누워계셨을 때도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할머니는 40여 년 전 여든을 훨씬 넘긴 나이로 근동에선 제일 어른이었다.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 뒷수발 때도 항시 그대로였다. 어머니의 이런 내공은 바로 텃밭에서 나왔을 거라 생각한다.

흙을 파 엎고 땅을 고르면서 마음도 같이 골랐을 것이다. 풀을 뽑아 밭이 깨끗해지면 마음도 머릿속도 같이 맑아지고 차분해져, 엉망이었던 기분도 가라앉았을 것이다. 구겨진 자존심이나 속상함 등은 땀방울과 같이 땅속에 묻지 않았을까. 그런 덕분인지 어머니는 할머니를 잘 모셨다고 효부상도 받았고, 자식들을 반듯하게 키웠다고 장한 어머니상도 받았다.

어머니 돌아가신지 20여년이 지났다. 텃밭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잡초만 무성하고 동네 사람들의 쓰레기장이 되었다.

밭에서 어머니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머위뿐이다. 머위는 밭 둑 탱자나무 울타리 쪽에 있다. 상치 쑥갓 감자 고구마 등등은 매년 씨를 뿌리고 가꿔야 하지만 머위는 그 뿌리에서 봄마다 새싹이 난다. 세월이 흘러도 내가 어머니의 딸인 것처럼.

나도 어머니처럼 텃밭을 가꾼다. 매일 경서를 쓴다. 10여 년 전부터 성경을 읽으면서 썼다. 무종교인인 내가 성경을 쓰고 있으니 절에 다니는 친구가 금강경과 법화경을 보시했다. 성경을 쓰고 난후 불경을 썼다. 지금은 원불교 전서를 쓰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가 근본적인 방법으로 텃밭을 가꿨듯이 나또한 한자 한자 손으로 쓰고 있다.

어머니는 봄을 타 봄마다 고생을 했다. 그 때 입맛을 찾아 준 것이 머위나물이다. 오늘 이 머위로 어머니 입맛에 딱 맞는 나물을 만들어 밥상을 차려드릴 수 있다면..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낯선 이의 머위 선물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어 기쁘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