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윤약국 약사

밤의 길이가 짧아졌기 때문인지 요즘 낮잠의 유혹에 자주 빠진다. 나는 끼니를 한 끼 굶을 수는 있지만 하루 밤을 샐 자신은 없다. 차 안이든 책상 밑이든 앉을 수만 있는 곳이면 잠을 잔다.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수면 시간을 줄여서 필요한 시간을 확보한다고 한다. 나는 일단 잠부터 자고 본다.

나에게 잠시간을 줄이는 대가는 너무 크다.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고 어느 것도 신바람으로 일 할 수가 없다. 어디 그뿐이랴. 금방 한 일도 기억을 못할 뿐 아니라 우울증까지 겹친다. 
나의 잠 예찬 때문인지 우리 식구들은 모두 잠을 잘 잔다. 특히 남편은 잠에 얽힌 얘기가 많다.  우리는 주말부부로 많이 지냈다. 남편은 통근이 가능한 지역이면 무리해서라도 집에서 다니고 싶어 했었다.

오래 전 일이다. 남편이 대전 지역에 근무할 때다.  집에서 출퇴근했다. 아침엔 새벽 5시 완행열차를 탔고 퇴근 때는 아무 차나 시간에 맞춰 다녔다. 새벽에 자명종 소리를 듣지 못해 열차를 놓치고 택시로 출근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남편은 퇴근 때 몇 시 차를 탄다고 꼭 전화를 했었다. 도착할 시간을 계산하며 전화 받은 순간부터 남편을 기다렸다. 이런 생활이 몇 달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안절부절 하다 TV를 켰다.  교통사고 속보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여보, 나 정읍이야” “그냥 택시 타고 와”

남편은 깜박 잠이 들어 익산역에서 못 내리고 정읍까지 갔단다. 비오는 날은 택시가 위험하다며 올라가는 기차가 있으니 그걸 타겠다고 했다.

기차시간표를 내놓고 도착할 시간을 계산하며 기다렸다. 목이 1cm는 길어졌을 것이다. 남편은 오지 않았다. 

“아니 또 못 내렸단 말이야”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한번은 그렇다 해도 두 번은 용납되지 않았다. 나는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이제나저제나 전화라도 올까 기다렸지만 밤을 꼴깍 넘겼다. 새벽녘에 나는 살짝 잠이 들었었나 보다. 

“ 나 어떡해, 서울역이야”

남편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 있었다. 남편은 아침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택시로 출근해야 하는데 돈도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열차 안에서의 잠에 대한 악몽도 잊혀 질 무렵, 남편이 비상근무를 하고 온 날이었다. 보통 때는 약국 문을 닫고 남편이랑 같이 퇴근을 하는데 그날은 남편이 너무 피곤해  먼저 들어가 쉬었다.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내려와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해 보았다. 전화소리도 남편을 깨우지는 못했다. 다시 올라가 현관문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이름 부르기를 십여 분. 통로 사람들이 다 모였다. 옆집으로 들어가 베란다 벽을 쳐 보기도 했다. 다시 전화를 넣어 보았다.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중년의 돌연사가 많다는데.  순간 다리의 힘이 쭉 빠졌다. 실성한 여자처럼 주저앉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댁에 연락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시댁 번호를 둘렀던 것 같은데 남편이 받았다.

죽지는 않았구나, 안도의 눈물이 흘렀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남편은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간이 철렁했다고 했다. 

나는 잠을 못 참고 남편은 한번 잠이 들면 업어 가도 모른다. 태워 먹은 냄비가 열 손가락은 넘을 성 싶다. 이제는 서로 잠 때문에 생긴 일은 책망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가뜩이나 짧은 인생, 잠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잠자는 시간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아깝다고도 한다. 나는 잠자고 났을 때의 개운하고 상쾌한 맛을 즐긴다.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숙면 후의 상큼한 기분이 좋다. 잠은 근심을 잊게 하고, 아픔을 치유해 주고, 에너지를 충전시켜 준다. 잠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정신이상자가 될 것이다. 잠은 모든 욕심에서 해탈된 상태가 아닌가. 눈같이 포근하고 안개같이 아늑한 잠, 잠은 힘든 인생길에 신이 보내준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잠깐 눈만 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좀 졸았나 보다. 눈까플이 가볍고 기분도 좋다. 오후 근무 잘 할 것 같은 예감이 팍팍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