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익산 최대 장터 남부시장
고소한 냄새의 주인공인 기름집
참새가 방앗간을 거저 찾아올 리 없지만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전통시장은 꼭 물건을 내다 팔거나 저녁 반찬거리를 위해 장을 보지 않더라도 그냥 존재만으로도 설레는 장소임이 틀림없다. 일단 복작거리는 시장 통에 넘쳐나는 물건들은 풍요로운 느낌을 주기 충분하며 상인과 손님이 물건 값을 놓고 벌이는 흥정은 우리네 인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좌판에 깔린 물건들만 봐도 한 눈에 무슨 계절인지 짐작할 수 있으며 군침 돌게 만드는 각종 먹거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 빠질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 맛은 염려할 것이 없다. 오랫동안 시장에서 장사하기 위해서는 맛은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장은 꼭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고 ‘거저’라고 해도 찾고 싶은 곳이며 설렘만으로도 방문할만한 곳이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익산 최대의 장터였던 남부시장(구 구시장)이라면 ‘가고 싶은 시장’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제 위치에 있는 시장 물건들
남부시장은 북부시장과 더불어 익산의 대표 시장이지만 1975년에 상설시장으로 개설된 북부시장에 비해 남부시장은 그 역사가 훨씬 깊다. 인화동 지역이 갈대숲 속 작은 마을이었던 ‘솜리’에서 일제 강점기 철도가 놓이면서 ‘이리’로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장터가 바로 남부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부시장은 익산 근대문화의 중심지이자 도시의 근원에 해당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인북로에서 접어드는 남부시장 골목 어귀에 당도하니 입구부터 전통시장의 향기가 물씬 묻어났다. 분명 과거에 비해 길도 넓어졌고 건물들도 한결 현대화 됐을 테지만 활기 넘치는 에너지는 여전하다. 거리는 정돈된 느낌의 대형마트와 확연히 다른 느낌인데 시장 통을 자세히 바라보면 온통 정리된 것 같지 않으면서도 사실 모두 제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과 손길 속에서 그렇게 닳아가면서 가장 적절한 위치를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손에 온기를 불어 넣으며
지나는 행인들의 시선을 이끄는 겨울옷들
남부시장은 아직 본격적으로 장볼 시간이 아니었던 것인지 거리는 한산한 모습이다. 본격적인 추위가 찾아들면 아무래도 야외 좌판 중심인 시장을 찾기보다 대형마트를 선택하는 일이 많은 것도 한산한 거리를 설명하는 하나의 핑계가 될 터였다. 상점들도 나름의 보온 대책을 세워 놓고는 있지만 지붕조차 없는 남부시장 거리는 겨울이 가고 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호호’ 하며 입김을 손에 불어 넣거나 양 손을 비비는 것으로 온기를 찾으면서 시장 거리를 걷다보니 입구에서부터 풍겼던 고소한 냄새의 근원지가 나타났다. 기름을 짜고 곡식을 빻아 가루를 만들곤 하는 방앗간이 한창 영업 중이었다. 오래된 건물인지 낮은 지붕에 실내는 어두컴컴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왜 방앗간들은 위험한 기계가 잔뜩 있는데도 항상 어둑한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아마도 찐득한 수증기와 함께 각종 가루가 날리면서 전구에 달라붙는 환경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두워졌을 수도 있을 터였다.
뻥 튀기 한 입 먹고
뻥튀기 가게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사람이 버글거리는 장날이 아니지만 시장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삼삼오오 함께 장을 보러 다니는 아주머니들을 비롯해 행인들을 피해 바삐 운행하는 오토바이, 상점에서 주문한 물건을 내려놓는 트럭들이 거리에 생동감을 주고 있었다.
그 중 사람들이 상점 앞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뭔가 재밌는 사건이 있는 법,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역시나 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인 ‘뻥튀기’ 집이 가장 성황이었다.
뻥튀기는 파랗게 이글거리는 가스 불 위에서 곡식을 넣은 기계를 고온·고압으로 달궈낸 후 압축 공기를 순간적으로 ‘뻥’하고 방출하면서 완성되는 간식을 말한다. 쌀, 옥수수, 떡 할 것 없이 ‘뻥’ 소리만 나면 어른과 아이 너나없이 좋아하는 간식이 된다. 요즘에는 몸에도 좋고 다이어트를 위해서도 각광받는 식품이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과자류에 밀려 소외됐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전통시장의 명물 역할을 하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옷 구경 실컷 하고
남부시장 한복거리의 입구
남부시장은 정기적으로 ‘우시장’이 열렸고 수산시장도 열렸을 정도로 없는 것이 없는 장터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창인동과 중앙동 일원에 상설시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조금은 쇠퇴의 기로에 섰으나 한복과 주단 특화거리로 여전히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복이 일상복의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번성했던 한복 거리도 어쩔 수 없이 쇠락했으며 현재는 명맥을 잇는 수준에 불과한 모습이다.
쇼윈도에 전시된 고운 자태의 한복
그래도 남부시장은 여전히 익산시민들의 마음에 한복의 고향처럼 인식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7~80년대 익산시에서 결혼한 부부들은 웬만하면 ‘구시장표’ 한복 한두 벌 쯤은 입은 기억이 있을 정도다. 현재는 한복가게가 도시 여러 곳에 분포돼 있지만 여전히 한복만큼은 남부시장 주단거리에 대한 신뢰가 크다. 한복 거리를 걸으며 쇼윈도에 전시된 곱디고운 한복들을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에서 나오는 기성복이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한 옷을 짓는다는 것은 오랜 시간 경험한 장인의 손끝에서 제대로 된 ‘옷’이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익산의 아우내장터
남부시장은 북쪽 구 경찰서 부근의 높은 언덕을 베고 남쪽으로 열린 야트막한 평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찾아보면 주현동 높은 지대에 가장 먼저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며 일제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기록을 찾아보면 1927년 경 쯤 남부시장은 평소 장날이면 1천 명, 대목 장날엔 1만여 명이 몰려들 정도로 대형 시장으로 발달했다.
현재의 인북로는 1970년대에 들어서야 생겼으니 당시에는 길도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전부였다. 인북로가 놓이기 전에는 시장에서 주현동성당을 지나 마동파출소, 전북대익산캠퍼스 방면을 통해 나아가는 길이 전부였다. 다른 길들은 거의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지만 근대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남부시장에서는 아직까지 좁은 골목과 같은 옛 길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문용기 열사의 동상
그렇게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한 익산시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중심에 등장한다. 일제의 폭압에 항거해 독립의 시발점이 됐던 3.1운동의 바람이 익산시 남부시장 걸에도 힘차게 불었기 때문이다.
오산면에 위치한 익산 최초의 교회인 남전교회가 주도한 익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하고 가장 번화했던 남부시장에서 장날인 4월 4일 열렸다. 남부시장 장터 네거리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시위가 벌어지자 일본군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문용기 열사를 포함한 6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십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39명이 검거됐다.
그 뜻을 기리는 뜻으로 만세운동 현장인 장터 한편에 순국열사비가 세워졌으며 최근에는 ‘3.1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조성돼 문용기 열사의 동상과 함께 순국 선열들을 기리는 공간으로 조성됐다. 지금도 매년 4월에는 4.4만세운동 기념식이 열리며 행사에는 만세운동 재현과 같은 이벤트도 열리며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고소한 깨통닭의 메카
천막 끝에 고드름이 맺힐 정도로 추워진 날씨
남부시장의 명물인 ‘깨통닭’ 골목
남부시장에서 배출한 유명한 것들 가운데 최근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깨통닭’이다. 단순히 닭을 튀기던 것에서 발전해 깨와 각종 향신료를 베이스로 한 고소하고 맛깔스런 치킨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이에 최근에는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주력 상품으로 치킨을 내걸고 ‘치맥파티’ 등을 열고 있다.
남부시장 거리에 들어서면 ‘깨통닭’의 유혹에 흔들리기 십상이다. 이렇게 추운 날 갓 튀겨내 뜨끈뜨끈한 깨통닭과 함께라면,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장터 천막 끝에 매달린 고드름과 생선가게 앞에서 생살을 드러낸 채 건조대에 매달린 아귀들을 지나치면서도 침을 꿀꺽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다.
좁은 골목길이 시장 안쪽으로 이어져 있다
정완창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