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함과 자유로움의 소산
여송 김계천(73세)은 여러 서체에 능통하였지만, 그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서체는 단연 행초서가 아닐까 한다.
개인 작업실이었다면 실제 완성된 작품의 먹선을 마주할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후학들을 지도하는 서실에서 만난 그가 건넨 그 자신의 고희전(古稀展) 도록(圖錄) 안에서 마주친 감상이다.
그의 행초서는 무릇 행초서가 도달해야 할 극치를 보여준다.
물 흐르듯 거침이 없다.
획은 깊고 선면은 윤택하며 획이 모인 화면은 양양하다.
둥글거나 각진 획의 연속성은 순리를 따르며 조화를 이루지만, 간혹 꺾이며 파격을 준 지점에서는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의 역동이 드러난다.
문자의 얼개를 뚜렷하게 보존하고 있지만 문자와 문자를 잇는 획에 의해 한 덩어리가 된 문자들은 편안하게 혹은 위태롭게 서로 기대며 독자적인 조형을 이룬다.
그런 우연 같은 문자의 배치는 촘촘하게 혹은 헐겁게 여백을 가리며 세상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태평한 이의 소행 같아 보인다.
굵고 가는 획들의 조화는 완급 속에서 부르거나 답하며 혹은 뛰어들거나 받아들이며 혹은 서로를 비춘다.
이렇게 작품에서 드러나는 필획의 변화는 작가에게 내장된 엄격함 또는 자유로움의 발현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엄격함과 자유로움의 조율이 곧 서예가 김계천의 서예 행위라 해야 할 것이다.
송나라 장재는 ‘내부의 충만한 것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했으니, 그의 행초서는 그가 구축한 철학과 사유 거기에서 구현된 미학의 결정일 터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서는 그만의 개성은 어떠하다고 말할 자취란 앞서 언급한 감상 말고는 찾을 수 없다.
다만, 분명 같은 행초서인데도 그 필획은 화면 안에 구사하는 문장의 뜻을 치열하게 좇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그 필획과 구성은 문장이 지닌 뜻을 표현하는 장치일 뿐만 아니라 문장의 뜻 자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행초서는 같은 필획 같아 보이지만 기실 문장에 조응한 그의 정회에 따라 모두 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초서를 말할 때 그가 구현한 서예술을 조형적으로 묘사하지 않고도, 그가 화면 안에 담은 문장의 뜻으로써 그의 행초서가 이룬 서예술의 경지, 혹은 그 느낌을 설명할 수 있다.
결국 작가가 선택한 문장은 그 이미지를 필획으로 옮길 수 있다는 작가의 확신에 따른 것이기에 그러하다.
또는 문장이 작가가 이룬 필획의 서사를 표현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김계천의 작품 가운데 ‘들 가게에 핀 복숭아 꽃은 단장한 미인 같고 길가에 버들은 안개 어린 푸른 실가지더라 길 떠나는 손을 위해 나오지 않았더라면 이 멋진 봄 경치를 알지도 못했으리’라는 조맹부의 시(詩) ‘동성(東城)’이 있는데, 그 정취가 작가의 행초서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단장한 미인 같은 복숭아 꽃, 안개 어린 푸른 실가지, 생동하는 봄 경치를 상면한 감동이 마치 작가의 행초서 필획 혹은 결구, 장법, 운필 등의 결정체를 상면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선문(選文)은 먼저 있었던 문장을 선택했다기보다 자신의 서예술에 부합하는 문장을 선택했다고 보아야 할 듯 하다.
서예가 김계천의 행초서는 도연명의 시를 통해서도 설명된다.
몸과 행적에 얽매이지 않으며, 우선은 변화 따라 옮겨 가지만 끝내는 본류로 돌아가며,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의 행초서는 또한 조선의 여류시인 금원(錦園)의 시 ‘단양선암’처럼 봄물 따라 절로 트인 도원길이며, 누구를 만나도 새삼스레 방향을 묻지 않으며, 종일토록 오가며 꽃향기에 취하며, 마음대로 노니는 푸른 산 비단이다.
혹은 ‘적벽부’의 노래 한 소절처럼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맑은 물 속에 빠진 달그림자를 치며 달빛 부서지는 물결을 거슬러 오르며, 왕유의 ‘산거추명(山居秋暝)’처럼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밝은 달, 돌 위로 흐르는 맑은 물이다.
또는 김규진의 ‘신흥점(神興店)’처럼 세찬 물줄기 꿈속에서도 깜짝 깜짝 나무 숲 저 끝에 범종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그렇다.
김계천의 행초서는 기세와 율동미, 거기에서 파생되는 음조로 관람자를 사로잡거니와 다른 한 축에서는 뜻을 장수로 삼고 기를 졸개로 삼는다.
그의 작품 전면이 탈속적 아취로 그윽한 이유일 것이다.
그의 작품 앞에서라면 관람자는 조급하고 거친 마음을 버리고 화평하고 기상이 평탄한 마음을 들이게 될 것이다.
적벽부(赤壁賦)
동성(東城)
마철저(磨鐵杵)
산거추명(山居秋暝)
신흥점(神興店)
근위가지보(勤爲無價之寶)
비로소 사해(四海)에 이르다.
이용진 월간 서예문인화 편집장은 ‘여송 김계천의 고희전’도록의 서문에서 “서예는 필연적으로 수양의 정도와 흥취, 심미 관념과 예술 견해에 따라서 여러 형태의 성격을 형성한다. 여송 선생의 서예는 우미(優美)한 가운데 엄근(嚴謹)한 절주(節奏)가 솟구친다. 가벼운 듯 하면서도 무겁고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거세다”고 감흥을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김계천의 서예를 평론한다.
자유로면서도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는다.
고도의 절제미를 내함하였다.
예서나 판본체는 장중한 필획을 보여주고, 행초서에서는 대소, 강약, 비수의 변화로 율동감을 준다.
서예는 문이라고 하는 직접적 내용으로 정회를 호소하는 자가 있지만, 분간포백을 통하여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획을 구사하고 여백을 살려내는 고차원적 심미 개념이 중심을 이룬다.
소강절은 ‘만물의 이치로 만물을 보면 본성을 볼 수 있지만, 주관적 눈으로 만물을 보면 사사로운 정만 반영된다(이물관물 성야, 이아관물 정야, 以物觀物 性也, 以我觀物 情也)’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서예가는 서사를 꿰뚫는 지식을 지녀야 하고, 부단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인격을 도야해야 하는 것이다.
여송 선생은 서예학과 경서학을 전공하였다.
에도시대 선승인 다쿠안 소호는 ‘검선일여(劍禪一如)’라고 했다.
검과 선은 하나로, 검으로서 선을 깨치는 것이다.
검이 지닌 격동성을 선의 고요함으로 다스리는 것이기도 하다.
검 속에는 고요함의 경지가 있고, 선의 고요함 속에는 격동하는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있다는 뜻이다.
여송 선생의 필획 역시 격동하는 치열함과 깊고 넓은 고요함이 내재되어 있다.
맹자는 “근원이 깊은 물은 끝없이 용솟음 친다. 그러기에 밤낮을 흘러서 그치지 아니한다. 웅덩이를 만나면 가득 채운 뒤 다시 흘러 사해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여송 선생은 평생을 채우고 넘치는 길을 걸어서 이제 비로소 사해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한 번 그은 획은 고칠 수 없어요
“획에는 가필 할 수 없습니다. 하얀 화선지 위에 글씨를 쓴다는 것은 정신이 하나에 이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구상을 한 뒤에 글씨를 쓰는데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서예 작업이란 몰두가 요구되기에 잡념이 사라지고 그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붓글씨를 쓰는 즐거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는 여송 김계천의 얼굴은 해맑다.
근엄함이 깃든 인상이지만 벽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입주변에서 번지는 온화함 때문일 것이다.
자기를 이긴 이가 관계의 경계를 허물었을 때 드러나는 얼굴이다.
그는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과 작품에 대해 호평을 받았을 때의 기쁨도 붓을 들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덧붙인다.
근자에 와서는 그가 배출한 문하생들이 무려 500명에 이른다는 점에서도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낀다.
그의 스승 여산 권갑석 선생이 그가 서예학원을 연다고 할 때 반대했으나,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학원을 열었는데 지나고 보니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관계를 쌓고, 소통하고 교류하는 삶에 자족한다.
“이러한 삶 자체가 낭만적이며 즐겁고 행복하다”고 피력한다.
그가 기거하는 왕궁면의 집 당호도 ‘현자를 좋아하는 집(호현제, 好賢齊)’이다.
그는 또 “왕궁탑을 연계하는 서예 전시관을 건립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힌다.
“서예가 인생의 전부다”라고 말하는 그는 전국 동호인들과의 교류와 연구실에서의 서예 지도, 개인 작업 등으로 한가할 틈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늙을 시간도 없다”고 한다.
“무엇보다 돈은 없어지지만 서예 작품은 영원히 남는 것 아니냐”는 그의 얼굴에 서로 마주보던 중 가장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글 공인배 · 사진 송승욱 기자
여송 김계천의 약력
원광대학교 대학원 서예문화학과 전공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경서학과 전공
현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초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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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익산문화원 출강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심사
전북서예전람회 심사, 운영위원장
충북서예전람회 심사위원장
대구서예전람회 심사
전남서예전람회 심사
한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 및 운영위원장
전국 신춘휘호대 전 심사위원장 및 운영위원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