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이광진(70세).
한국공예문화협회 회원전에 전시된 그의 작품은 특히 문양으로 눈길을 끈다.
그것은 의도되었다.
이광진은 주로 물레를 돌려 달항아리를 빚어 왔다.
그런데 눈앞의 도자기는 흙을 일정한 두께로 평평하게 밀어 판을 만든 다음 그것을 이어 붙여 만든 납작한 직사각형 그릇(작품 ‘오방색판상기’)이다.

작가는 회화를 구사할 넓은 면을 확보한 것이다.
이 같은 판상 성형 작업은 까다롭다.
판의 두께가 조금만 달라도 작업과정에서 함몰되거나 뒤틀리기 쉽다.
또 이음새가 불완전할 경우에는 굽는 과정에서 터지거나 변형되기 쉽다.
작가는 도자기의 넓은 벽(기벽)을 얻기 위해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한 것이다.
그 기벽에 이광진은 자기만의 문양을 구현했다.
오방색이 기형적으로 뒤섞여 있는 회화다.
문양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형태와 실루엣으로 일렁인다.

이를테면 새가 무지개 속에서 튀어나오는 듯 하다고 느낄 때 부정형의 백색 공간은 일순 하늘이 되고 거기에 찍혀 있는 수많은 검은 점들은 새의 군무가 된다.
그 점들은 드넓은 창공에 투사되며 장엄하게 관람자를 압도한다.
떠 있는 구름이 보는 이의 정회(바람)에 따라 다른 형태가 된다는 점에 착안해 보면, 회화를 이루는 문양은 일정한 형태로 머물러 있지 아니한다.
형태와 색이 층을 이루며 서로 비추거나 가리는, 혹은 서로 얽히거나 풀려나며 약동하는 것이다.
화면은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문양’ 혹은 ‘구름’을 포착한 셈이다.
단적으로 그의 문양은 몽환적인 문양이다.
본래 기벽의 바탕색인 흙빛이 대부분은 가장 깊은 곳에 있으면서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존재하며, 오방색과 문양을 수용한 혼돈의 상태다.      
혼돈은 존재의 본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관람자에게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아득함을 안겨준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효과를 낸 것일까.
그릇의 기벽에 색을 입히는 기법이 궁금해졌다.
“종이를 원하는 형태로 찢어 유약을 묻힌 다음 기벽에 붙이는 방식을 씁니다. 처음에는 백토 물에 종이를 적셔 바르고, 다 마르면 백토 종이를 떼어내고 다시 색토를 적셔서 원하는 모양으로 붙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다음에는 자토를, 마지막에는 철분백토를 종이에 적셔 붙입니다. 이렇게 하면 다섯 가지 유약의 색이 겹쳐지게 되는 겁니다”
그는 도자기 문외한의 눈을 한 번 들여다 본 뒤 부연하여 설명한다.
“백토에서는 흰 빛깔이, 색토에서는 푸른 빛깔이, 자토에서는 황토 빛깔이, 철분백토에서는 쇠의 녹물 빛깔이 발색됩니다”
도자기의 흙, 즉 태토 위에 유약을 겹쳐 바르는 기법이라는 설명이다.
작품에서 새의 군무로 여겨지는 점들은 ‘철분백토’안료일 것이다.
그는 도자기를 유약에 담그는 방식이 아닌, 찢은 종이에 유약을 적셔 붙이는, 서양회화의 콜라주기법에 의해 회화의 입체감을 획득한 것이다.
각기 다른 색깔의 유약들이 작가가 찢은 종이의 모양으로 겹쳐지며 문양의 음영과 원근을 드러내면서 천변만화의 추상화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겹쳐 발라진 유약은 작품의 표면에 그 두께만큼의 질감을 만든다.
이런 유약층의 표면 질감은 번들거리고 차가운 유약의 한계를 넘어 차분하고 따뜻한 천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품 ‘오방색판상기’의 전면이 색동옷을 입은 여인들의 하늘거리는 춤으로 투영되기도 하는 이유다.
이런 새로운 질감의 창출 또는 탈속적인 문양의 율동은 그가 구현한 문양기법이 보여주는 효과 가운데 백미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도예가 이광진은 본래 옛 방식대로 물레를 돌려 그릇을 만드는 방식을 고수해 왔다.
이번에 출품한 ‘오색판상기’는 그가 즐겨 만드는 도자기는 아니다.
그는 “공예의 본질은 쓰임이며, 거기에 미(美)를 보탠 것이다”고 말한다.
공예의 결과물은 그릇의 용도가 먼저라는 인식의 발로다.
그렇다고 해서 판상기가 영 그릇의 용도에 부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보편적인, 또는 전통적인 틀 안에서의 그릇 용도를 보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것은 토기가 식음료를 담기 위한 용도로 창조되었다는 근원에 바탕한다.
인류는 그 쓰임새를 전제로 토기의 보다 더 아름다운 형태와 빛깔을 추구해왔고, 용도가 분명한 그릇의 표면에 회화적인 장식을 더해 미적 성취를 이루어 온 궤적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신념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릇으로서의 효용성을 떠난 도자기는 도자기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동안 주로 선대의 제작 방식에 따른 ‘달항아리’에 문양을 입혀 온 이유다.
하지만 전통적인 그릇의 영역 안에서 인류가 이룬 성취 이상을 꿈꾼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역이었다.
그가 제한적인 조건에 순응하면서도 항아리 몸통 이곳저곳을 불쑥불쑥 튀어나오게 하는 비정형 성형을 시도한 것은 그 창의적 고뇌와 열정의 분출이었다.
그것은 물레작업 과정에서 몸통 부분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밀어내 부분적으로 봉긋하게 돌출시키는 방식이다.
이 비정형의 토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전통토기의 완전한 대칭에서 경험할 수 없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또한 그것은 관람자에게 정형이 지닌 정결하고 엄숙한 태도를 깨는 해방감을 안겨준다.
도예가 이광진은 그 파격의 산물 표면에 자기만의 문양을 입히는 도자회화의 일가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만의 가능성 탐색을 멈추지 않는다.  

도자회화의 일가를 이루다

이광진 도예가를 전시장 한 켠에 마련된 긴 탁자에 마주하고 앉았다.
희미한 조명 아래 그의 백발은 그가 지나온 세월의 족적처럼 은은하게 빛난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희고 탄력이 있다.
눈빛이며 말투며 표정들은 여전히 청년이다.
그는 선명한 것을 좋아하는 듯 하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듣고 오류 없이 잘 정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자리에 앉자마자 공예의 종류들을 설명하고, 자신이 출품한 작품의 작업과정을 설명하고, 문양 기법을 설명하고, 전시된 작품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그를 통해 도예 과정을 보지는 못하고 들어야만 했다.
그의 말마따나 전통도자기의 양산에는 물레대장, 조각사, 불대장이 각각 일을 분담할 정도로 복잡하고 긴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그는 “불순물이 없는 흙을 준비하고, 반죽하고, 성형하고, 말리고,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입히고, 재벌구이를 하는 전 과정을 한번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반죽된 흙을 오래 놔두면 굳어서 쓸 수가 없게 되고, 성형과정에서도 중간에 멈췄다가 때를 놓치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된다.
제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쉬지 않고 계속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도 자칫 실수를 하게 되면 망친 걸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릇의 형태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도 그렇겠지만, 그는 “유약을 입히는 과정에서도 화장토가 두꺼워지면 주저앉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이렇듯 시작하기 전에 모든 것을 계획하지만 중간에 변수가 많다.
어떤 맥락에서 보면 도자기는 변형의 산물이다.
크기부터 그렇다.
그에 따르면 당초 성형한 토기가 재벌까지 거치고 나면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수축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크기가 통상 20%~30% 가량 줄어든다고 한다.
그가 2018년 원광공예가협회 회원전에 출품한 ‘백자토, 청자토’의 경우 450(가로)x400(세로)x320mm(높이)인데, 25%의 수축을 감안할 경우 처음 빚어진 토기의 크기는 506x500x400mm(높이)의 대작인 셈이다.
토기를 크게 빚는다는 것은 기능적인 면에서도 실력이 탄탄해야 하거니와 작업 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읽어야 하는 면에서 그만한 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
굽는 온도나 시간에 따라서도 작품이 터지거나 일그러질 가능성은 상존한다.
반면, 작업 과정의 변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참신한 창조물을 선물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가장 떨리는 때가 도자기를 구울 때다.
“보통 열 세 시간에서 열 네 시간 동안 불을 때야 하고 총 20시간은 기다렸다가 가마를 열 수 있는데, 오늘은 또 어떨까? 그 설레임은 우리 아니면 못 느낄 겁니다”
눈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도예가 이광진의 눈이 간절해진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랄까. 조금씩 열어보고, 그 틈으로 후레쉬를 비춰보기도 하고, 작업 과정에서 피로에 찌든 상태인데 대개 불은 밤에 때야 해요. 불을 때면서 잠을 잘 못자. 이런 불의 심판을 매번 꼭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가 가마 앞에서 바라는 것은 의도된 것이기도 하지만 뜻밖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불 때는 시간을 달리하거나 온도를 달리하거나 변화를 주지요. 우연성에 기대를 걸어보는 거예요. 의도한 것을 뛰어넘는 작품을 꿈꾸면서요”
흙이 불을 만난 조화의 결과는 40년 동안 도예의 길을 걸어 온 그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그는 필연과 우연이 만나 창조해낸 작품을 몇 점 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여는 주되 팔기 싫은 작품들이다.
“양산하는 상품과 우리들이 추구하는 작품은 다르지요. 나는 도자기를 잘 깹니다. 한 가마에서 20%~30% 정도만 나와도 나는 만족합니다"

의도하지만 변형의 산물

그는 “도자기 작업은 곧 내 인생이다”고 한다.
시작부터 완성될 때까지의 과정이 일상생활과 똑같다고 한다.
“희로애락이 있으면서도 흙을 만지는 순간만큼은 몰아지경에 빠지고 잡념이 없어진다. 어느 장르나 똑같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인생은 긴장의 연속이었고, 그 사이에 도예 말고는 다른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는 말로도 읽힌다.
그는 예인의 열정을 지역사회에도 쏟고 있다.
1999년에 익산한국공예대전을 유치한 이래 공정하고 투명하게 운영해 성공한 전국 공예대전으로 자리매김 시켰다.
출품작 수에서부터 대한민국미술대전보다 네 배가 많다.
압도적으로 많은 출품작 수는 익산한국공예대전의 높은 수준을 단적으로 방증한다.
도예가들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서울이 익산을 주시할 정도로 익산주최 한국공예대전이 성공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내 꿈은 익산에 공예미술관을 건립하는 것”이라고 포부를 밝힌다.
익산을 공예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전국 원로작가들의 작품 70점과 70여점의 신인 수상작품을 기증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작품을 계속 수집해 나갈 계획이다.
공예가 이광진은 그러면서 “나는 과분하게 대접을 받아 온 공예인”이라고 말한다.
“나는 대학원 석사논문만 있어도 교수로 임용되던 시절에 대학 강단에 섰는데, 요즘 후배들은 박사들이 즐비한 데도 설 자리가 없다. 죄책감이 든다”고 술회한다.
대학이 인문계열 학과를 계속 축소하고, 그 바람에 문화예술 관련 저변이 계속 좁아지고 있는 탓이다.
그는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체험 현장에서 지도해야 하는 현실’이 못내 안타깝다.

글 공인배 · 사진 송승욱 기자

 도예가 이광진의 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