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금호미술관에 전시되었던 화가 김수자(69세)의 작품 ‘11 일기-존재2’를 본다.

후드티셔츠가 화면 중심에서 이글거린다.

강한 붉은 빛은 아니지만 오른팔과 머리 부분은 전열기기의 코일이 막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의 연브라운색으로 발열하는 중이다.

몸통과 왼팔은 회색을 띠고 있는데, 전면에서 가장 강조된 왼팔의 굵은 외곽선은 서늘한 푸른빛을 띤다.

그러나 이 옷의 모든 외곽선은 열기로 이글거리고 있다.

뒤쪽 혹은 화면 가득 전방위적으로 뒤섞인 참깨알 같은 검은 입자들이 옷의 파동과 조응하며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 약동하는 생명력은 화면에 촘촘하게 들어차 있는 검은 입자들의 틈에서 기원하여 후드티셔츠를 이루는 수많은 선에 스며들고 있다.

관점을 옷으로 옮기면 후드티셔츠에서 기원한 에너지가 저마다 다른 방향을 향하는 빽빽한 점들의 사이사이(틈)로 흐르고 있다.

그 틈은 화면의 바탕, 백색 공간이다.

후드티셔츠와 점들은 결국 백(白)의 내부에 있으며, 그 내부에서 에너지의 길은 하나다.

그러한 에너지의 순환이 텅 비어있거나 혹은 가득찬 백의 공간에서 생명의 파동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존재’는 ‘관계’다.

나와 외부의 관계, 나와 외부가 합일을 이룬 그래서 다르지만 다르지 않은 관계다.

후드티셔츠는 화면에서 오른쪽으로 기운 채 너울너울 생명의 원천인 공간을 유영하는 듯 한데, 이는 우주의 수용성과 인간이 거기에 의탁 할 수밖에 없는 관계의 근원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나아가 입자들로 가득찬 후드티셔츠의 얼굴 부분은 공교롭게도 하트모양으로 너울거리며 ‘관계’의 본질을 귀띔한다.

작가는 셔츠의 배꼽 부분에 자신의 이니셜(KJS)을 표기해 자신이 그 존재와 같음을 확인한다.

그러면서 후드티셔츠의 오른팔을 펼치고 왼팔을 접어 균형을 잡았다.

그것은 외부의 중력에 순응하는, 또는 중력에 맞서며 자기 내부의 중력을 이겨내려는 의지의 표명이다.

작가는 후드티셔츠에 혼을 불어넣는 대신, 육신을 생략한 생명현상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간명하고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 것이다.

화가 김수자의 작품 ‘06 일기-부재’를 본다.

봉제를 하던 중에 뒤집어 놓은 듯한 롱코트가 미완의 너절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미완이어서 일까.

롱코트의 색은 특정하기 어렵다.

열기가 빠져나가고 있는 색이랄까.

롱코트의 주변은 빨강 파랑 노랑 등 여러 색의 선들이 증발하듯 아른거리며 퍼져나가고 있다.

미완은 의미의 부재이며, 의미를 확보하지 못한 미련이다.

롱코트의 배경에는 여백이 없다.

짙푸른 색의 굵고 작은 격자무늬들이 마치 철망처럼 롱코트와 세계를 가로막고 있다.

일부 격자무늬 안에는 알록달록한 형상들이 담겨있다.

어떤 칸에는 백색이 빛나며 불투명한 형상이, 어떤 칸에는 칠흑 상태의 희미한 형상이, 어떤 칸에는 다만 칠흑이 담겨있다.

그것은 일상이 기록된 활동사진의 필름 같다.

이 작품에서 ‘부재’는 ‘비어있는 상태’이며, 비기 전의 기억들이다.

작가는 이렇게 ‘부재’는 단절된 상태이지만, 동시에 기억으로 ‘존재’한다는 역설을 드러내 보인다.

‘부재’는 공허하지만, 꽉 찬 기억으로 존재를 비춘다.

롱코트라는 대상이 주변의 여러 관계들과 기억을 공유했다면 비어있더라도 존재하는 것이다.

김수자의 작품이 ‘부재’든 ‘존재’든 선명하고 강렬한 선들로 구성되는 것도 그 존재에 대한 물음에 숨을 죽이고 대답을 구하고 있는 탓이리라.

예술행위는 곧 구도(求道)행위

그는 대개 캔버스에 형태를 드로잉하고 색을 먹인 뒤 선을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도드라지게 하는 기법의 작업을 수행한다.

선으로 입체감과 구체성을 구현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그가 구축한 유일무이한 방식이다.

그의 독보적 방향성은 치열한 실험정신에서 비롯했다.

“나는 ‘바느질과 페인팅이 어우러져 과연 그림이 될 수 있는가’하는 화두에 전부를 던졌다”는 그의 말을 통해 그 뜨거운 열정의 출발점을 가늠한다.

그는 당장 바느질을 통해 “연필로 박박 그은 것 같은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림의 선들이 획득한 탄력은 바느질 땀을 회화적으로 끌어내려는 작가의 노력에서 기인했다.

강직함과 유연함이 화면 안에서 극명하게 대비 될수 있는 것은 치밀한 바늘의 드나듦, 땀과 땀 사이를 조이는 강도에 따른 것이다.

그는 이 같은 바느질 땀의 회화화에 대해 “그것은 마치 길 없는 길 같은 것이며, 부조화 속의 조화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나의 작업은 바느질과 페인팅이 혼합된 것으로 캔버스를 수틀과 동일시하고 있다. 캔버스 천의 직조모양은 수틀이 팽팽히 매어져 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고 설명한다.

그가 바느질하는 모습을 본다.

바느질의 한 땀은 보이는 이편에서 보이지 않는 저편으로 바늘을 보냈다가 이편으로 다시 데려오는 것으로 완성된다.

“존재는 보이는 것이다”는 작가의 말을 생각하며 보면 실을 매단 작가의 바늘은 ‘존재’의 경계를 뚫고 ‘부재’의 세계를 파고든다.

작품 ‘11 일기-존재2’의 크기는 259cm(가로)x194cm(세로), 대작이다.

작가의 손과 눈이 ‘부재’의 저편을 더듬고 가늠하고 이내 바늘은 ‘부재’의 경계를 뚫고 보이는 세계로 귀환한다.

바늘을 뒤따르는 실은 저편에 길 아닌 길을 내고 이편에서 ‘존재’의 길이 된다.

바느질 한 땀 한 땀은 그렇게 존재와 부재, 차안과 피안을 넘나들며 존재와 부재를 하나로 묶고 차안과 피안을 하나로 묶어낸다.

이건용의 감상평처럼 작가는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moirai)가 운명의 실을 뽑고, 잡아당기고, 가위로 끊듯이 캔버스 천 위에 수직과 수평의 무수한 실의 겹침에 따라 평면 위의 형태를 운명 지어져 나간다.

작가는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다가 깨달았다.

셔츠 한 장 속에 존재와 부재 사이의 미묘한 경계가 있고, 없으면서 있는 것이 있고, 관념적인 형상으로 얽매지 못하는 것이 있다.

다시, 그게 뭔가, 바로 일상의 공허함과 가벼움이다.

미술평론가 고충환은 “작가는 캔버스화면에 이런저런 회화적 과정을 부가한 연후에, 그 위에 바느질로 옷을 재현하고 중첩시킨 것이다. 일상의 공허함과 가벼움이란 엄밀하게는 작가가 옷에 투사한 것이며 옷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며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옷이라는 非가시적인 것(존재)을 통해 비가시적인 무엇(부재)을 암시한다”고 평했다.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도 들려

바느질은 고되다.

작가의 말마따나 “보통 며칠씩 걸리는 중노동”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마티에르(그림의 표면에 나타나는 재질감)효과를 내기 위해 시작한 바느질이지만 그 이상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고행을 작업의 중심에 놓고 한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도(道)를 구하는 행위다”고 말한다.

또는 “예술행위는 곧 도다”고 단언한다.

예술은 기술이 아니기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가 견지하는 긴장은 곧 “생활 전반에서의 성실, 기도하는 마음, 정성스러움”이다.

그는 정말 좋은 작품은 빈틈없는 정신수양의 결과물이라고 확신한다.

작품들이 그것을 깨닫게 해줬다.

선(禪)의 경지에서 창조적 교감이 가능했다.

그래서 수없이 바늘을 넣었다 뺐다 하는 단순한 작업이 식상할 법도 하지만, 어떤 땀은 팽팽함으로 어떤 땀은 느슨함으로 어떤 땀은 유연함으로 어떤 땀은 졸아듦으로 감각의 척수를 자극했다.

그렇게 매 땀이 같지만 매 땀이 달랐다. 그것은 의도와 조우(遭遇)의 교차에서 비롯했다.

조우는 바로 도를 구하며 열려있는 그의 모든 감각기관에 깃드는 그것이었다.

한 땀에 집중된 정신과 마음만이 닿을 수 있는 그것이었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은 늘 새로웠다.

작가에게 새로움이란 신명이다.

느리게 느리게 또는 힘겹게 나아가지만 신명이 나기에 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선의 경지란 그런 신명, 일상의 허무와 무력감을 생동감으로 치환하는 신명이다.

그것은 엄숙한 태도, 바늘과 실은 속일 수 없다는 진솔한 태도 안에서 배가 되는 법이다.

가볍게 만나는 신명은 유희 이상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함라산에 안겨있는 김수자의 작업실은 층고가 높다.

키 큰 유리 창호는 안과 밖의 경계를 지우고 있다.

태풍의 여파로 내부의 습도는 높지만 훼손됨이 없이 고스란히 시야에 담기는 창밖 광활한 풍광 덕에 외려 개운해진다.

마을까지 비탈면을 내려가는 길 양쪽의 숲을 지나면 탁 트인 농경지대가 펼쳐지고 남쪽 끝에 미륵산이 동에서 남으로 굽이쳐 흐른다.

밖을 함께 내다보던 그는 “맑을 때는 모악산도 보인다”고 한다.

눈을 들어 모악산이 보일만한 쪽으로 옮겼는데 거기에는 엷은 안개 같은 것이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고 있다.

그 광대함에 압도된 탓인지 주변이 적막할 정도로 고요한 느낌이 든다.

그는 “여기서는 구름이 흘러가는 것도 들릴 지경이다”며 풍족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는 나이를 잊은 얼굴로 자신의 작업실 안에 놓여 있는 그림들을 설명한다.

표구되어 있는 그림은 걸려 있지 않고 벽에 기대어 서 있다.

크고 작은 그림 액자들은 화란식 벽돌쌓기처럼 그러나 헤성헤성 쌓여 있기도 한데, 컬러나 구도가 저마다 다른 그림들은 여러 점이 모여 있으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며 본래 한 작품인 것처럼 통일감을 주기도 한다.

작품들에 둘러싸인 캔버스는 미완의 대작이다.

“몇 달 동안 작업을 해왔고 완성까지는 오래 걸릴 작품이다”고 말하는 작가의 얼굴은 열정으로 상기되어 있다.

자신의 작품을 말한다는 것은 창작과는 또 다른 도전이리라.

듣는 이에 따라 작가의 말은 각각 다르게 해석될 것이기에 자신의 작품을 설명 할때도 창작에 요구되는 열정이 솟구치는 것이리라.

마주 앉은 그는 옷이 작품의 주요 소재인 점에 대해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바느질하고 있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옷이 가장 관심을 끌어서인 것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옷은 나를 보호하고 존재감을 드러내주니 나에게 ‘존재란 곧 쓰임’이다”고 말한다.

그래서 빈 옷은 내가 빠져나온 상태이고 그림자만 남아있어 ‘부재’의 상태이지만 결국 ‘존재’라고 말한다.

매듭 끝의 실을 잘라내지 않고 놔둔 것도 그 너울거림이 ‘존재’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말에 쐐기를 박고 싶은 듯 말한다.

“전시장에 약간의 바람만 불어도 실들이 살아 움직인다”고.

그는 다시 한 번 “그림자가 때로는 진짜보다 선명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창밖을 보며 작품을 구상한다.

“일상에서 해결 안 되는 문제도 창밖을 보노라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그는 천생 보이는 것(눈에 혹은 마음에)을 화폭에 옮기는 천생 화가다.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

<개인전>

1989 제1회 개인전(미술회관, 서울) 외 총 20회

<단체전>

1974~1977 물꼬회전 (예총화랑, 전주) 외 총 236회

<수상>

1981 제30회 국전 특선(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제4회 중앙미술대전 특선(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85 제4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86 제5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05 MANIF11 서울 국제 아트페어 특별상

2009 목적문화상 미술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