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태 건 시인

# 삼한의 심장, 익산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낭림으로 뻗어 태백과 덕유로 솟았다가 다시 금남정맥의 줄기로 이어져 장안산, 마이산 운장산을 거쳐 그 힘찬 용틀임을 멈춘 미륵산. 멀리 서해를 건너온 대륙의 바람이 금만평야를 파도친다. 미륵산은 이 초록바다에 솟은 곶 같다. 저 푸른 벼이삭들이 수없이 흔들리는 동안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이 땅에서 웅혼한 꿈을 꾸었다. 허물어진 미륵사탑을 만지면 역사의 온기가 만져질 듯하다. 문화는 그 지역에 살아온 사람들의 무의식이 반영되는 것. 익산의 문화를 한마디로 말하면 마한이 뿌린 씨앗을 백제가 꽃으로 피워냈다.

익산은 삼한의 중심이었다. 삼한은 한반도에 자리한 부족 국가인 마한, 진한, 변한을 통칭하는 이름. 그중 마한의 세력이 삼한 중에서 가장 컸다. 마한의 54개 부족 중에서 익산의 금마에 자리를 잡은 건마국(乾馬國)이 으뜸이었으니, 익산은 삼한의 하나가 아닌 하나의 전체였다. <익산군지>에 따르면 “익산은 원래 마한국으로 기자조선왕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해로로 남쪽 한지에 이르러 나라를 열어 마한으로 국호를 삼았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이를 아울러 금마저(金馬渚)라 이름하였다.”라고 전한다. 고조선의 문화가 정착하면서 금마저(익산)은 고대 한반도의 중심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 물의 도시,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이다

금마저(金馬渚)는 이름에 '물의 나라'라는 뜻이 있다. 기준 왕이 바닷길을 건너 금마에 정착하게 된 것도 익산에 강을 이용한 수로교통이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익산 주변을 감싸고 흐르는 금강과 만경강은 대규모 평야지대에 젖줄이 되었다. 노동집약적인 경작 문화가 익산에 대규모로 시작되면서 건마국은 마한을 대표하는 부족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예부터 문화적 여유는 곧 물질적 풍요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마한의 문화에도 풍요로운 금마저에 살던 익산인의 문화적 자신감을 반영되었다.

신화는 상징의 이야기다. 단군신화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한 부족과 곰을 토템으로 한 부족의 대결로 해석되듯, 기독교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도 농경 부족인 카인과 유목부족인 아벨의 이야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조선의 형성기에 곰토템 부족이 주류사회가 된 것처럼 초기 기독교의 정통성을 양을 키우던 유목부족이 획득한 것이다. 백제 30대 무왕이 금마 출신이라는 것은 물의 도시 ‘금마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은유로 봐야 할 것이다. 용 신화는 이후 미륵신앙으로 변화하는데, 무왕신화 자체가 농경문화와 해양문화의 정체성을 가진 익산의 특성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문헌에 나타난 마한의 풍속

마한의 문화는 천신에 대한 제천행사에서 유래했다. 고대인에게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자연의 변화는 곧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었기 따라서 하늘의 뜻을 묻는 제천행사는 마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이자 부족의 단합대회였다. 제천행사에서는 지역의 특성이 반영된 음악과 노래와 춤을 추었고, 이 과정을 통해 부족 특유의 문화적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제천행사를 통해 부족들은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정서적 유대감을 고취한 것이다.

제천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소도’에서 이뤄졌다. 소도는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표시한 신성한 곳이다. 현대인이 투표를 하듯 마한인들은 공동체 내의 중요 사항을 소도에서 점을 쳐서 결정했다. 점을 치는 추상적 행위가 당시 통용됐다는 것은 문화적 의식이 발달했음을 의미한다. 새는 신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자로 여겼는데 ‘새 모양 토기’는 주술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는 하늘(신)과 땅(인간) 사이를 왕래하는 전령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마한인들은 놀 때 화끈했다. 한번 놀기 시작하면 며칠을 놀았는데 과음과 떼창, 집단무에 대한 기록이 중국의 사서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마한인은) 해마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 지낸다.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기를 밤낮으로 계속한다. 춤은 수십 인이 함께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가 치켜 섰다가 하면서 손발로는 장단을 맞춘다.”라고 기록한다. 밤새워 노는 것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들은 힘든 농사일을 견뎌낸 강인한 정신과 육체의 소유자였다.

# 마한 풍속 흔적은 지금도 민속에 남았다

1) 소도는 성스러운 곳이다

마한인들은 세상 모든 것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 ‘하늘을 주관하는 천신’이 으뜸이었다. 지역별로 ‘천군’이라는 사제를 두어 소도(蘇塗)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소도는 인간의 법이 통하지 않은 곳. 아무리 큰 죄가 있어도 묻지 않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소도에 대해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라고 기록한다. 익산의 민속에서 성포 별신굿과 기세배놀이에서 소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성당면의 성포 별신굿은 조운선의 무사항해와 풍어를 비는 마을굿이다. 굿을 주관하는 당주가 정해지면 마을에서는 신성하게 여기는 은행나무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흙을 뿌려서 부정을 금한 후에 술을 빚어 제사를 지냈다. 금마면과 왕궁면 일대에 전승되는 기세배놀이는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맞이 굿이다. 기세배놀이가 시작되면 각 마을을 대표하는 장정들이 기를 들고 나오는데, 마을기의 꼭대기에는 방울과 꿩의 깃털을 꽂았다.

2) 지게목발놀이는 집단무의 흔적이다

마한인은 굳세고 용맹했으며 놀 때는 화끈했다. 특히 삼기면의 지게목발놀이는 줄지어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집단무의 전형으로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K-pop의 떼창과 떼춤의 원조였다. 『후한서』에는 “(마한인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며, 슬을 타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나라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할 때는 여러 용맹하고 건장한 젊은이들이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밧줄로 꿰고 또한 1장 남짓의 나무를 매달고는 온종일 떠들썩하게 소리 지르고 일하며 이를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니, 이로써 작업을 권하며 또한 이를 씩씩한 것으로 여긴다.”라고 하였다. 나라의 큰 일에 동원된 장정들이 지게를 지고 노래를 부르며 힘든 줄 모른다 하였으니, 지금의 BTS가 마한 청년들의 지게목발놀이의 전통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필자 소개>

박태건 시인은 원광대 대안문화연구소에서 지역문화 연구를 시작했다. 익산민예총 회장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전북작가회의 부회장이다. 익산의 문화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익산, 종교화합의 성지를 가다』. 『익산, 도시와 사람』, 『강을 거닐다』, 『유적 따라 이야기 따라』, 『전북문화지도』, 『익산구술사』를 펴냈다.

※ 이 원고는 익산문화관광재단 ‘다이나믹 익산 아티스트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