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삼기면 들판은 태풍 ‘미탁’의 여파로 수런거렸다.
서예가 조수현(71세)의 작업실로 가는 ‘오룡리 구정길’ 가의 논에서는 노랗게 익은 벼가 왁자하게 비바람을 받으며 기울었다가 꼿꼿하게 서곤 했다.
동네 어귀에서 작업실에 이르기까지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가의 감나무를 비롯한 여러 활엽수들도 좌악좌악 끼얹듯 불규칙하게 덮치는 비바람에 야단법석이었다.
작업실의 주인은 현관문 앞으로 나와 비를 맞고 서서 마당을 가로지르는 손을 맞이했다.
담담한 표정으로 고요하게 서 있던 그는 몸을 한쪽으로 비키며 길을 열었다.
우리가 먼저 작업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먼 길을 찾아오느라 수고했다’며 뒤따라 들어온다.
그의 말은 친근했다.
수년쯤은 서로 부대낀 것처럼 간극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당 가운데서 그를 처음 보고 수더분한 초로의 마른 남자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그런데 웬일인가.
가까이서 바라본 그의 풍모에서는 산처럼 의연한 선비의 기상이 서늘하게 배어난다.
아니, 그의 얼굴에 ‘바른생활맨’이라고 씌어 있다고 해야 사실에 더 가까울까.
작업실은 묵은 한옥의 원형을 가급적 보존한 공간이다.
방과 방 혹은 방과 부엌, 방과 마루를 구분했던 문들을 제거한 정도다.
크게 손을 댄 곳이라면 마루 끝을 죽 유리 통창으로 막아 비바람을 막고 내부 공간을 넓힌 것인데, 마당과 대문을 바라보는 이 유리창은 무엇보다 시각적으로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지우고 있다.
우리는 그 마루쯤에 마주앉았다.
그는 자신을 드러냄에 매우 신중을 기하는 축인 듯 하다.
그가 입을 떼어 처음으로 한 말은 지(紙, 종이), 필(筆,붓) 묵(墨, 먹), 연(硯)이다.
이 문방사우가 서예의 도구들이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지필묵연은 서로 어떻게 융화하는가, 어떤 지필묵연이 가장 바람직한 융화의 결과를 도출해내는가 같은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서예가의 말을 알아들으려면 서예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기초는 되어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대꾸를 기다리지는 않았다.
그가 말하는 리듬에는 듣는 사람과의 사이에, 소통에 필요한 틈이 없다.
그는 이어서 중국의 붓글씨를 서법(書法)이라 하고, 일본의 붓글씨를 서도(書道), 한국의 붓글씨를 서예(書藝)라 한다고 말한다.
이 또한 거기까지다.
법은 무엇인지 도는 무엇인지 예는 무엇인지 부연설명하지 않았다.
겉핥기로 알고 있는 것이지만 법(法)이란 붓글씨의 전범(典範)이 되는 고전(비碑나 첩帖)을 말하며, 서법이란 고전이 가르치는 결구와 필법의 변화를 일컫는다.
그런 걸 일반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일반인들에게 막막하기란 도(道)로써의 붓글씨와 예(藝)로써의 붓글씨가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붓글씨인데 삼국은 왜 혹은 어쩌다 각기 다른 서예의 사조(思潮)를 분점하게 되었는지, 각국이 구축하고 추구하는 서예의 가치는 무엇인지, 그런 따위의 질문을 받을수록 일반인들의 머릿속은 캄캄해질 것이다.
역사적인 고찰과 민족성 같은 전문적이고도 관념적인 시야가 확보되어야 비로소 그 질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주례(周禮)에서 이르는 육예(六藝)를 말한다.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이는 각각 예학(예의범절), 악학(음악), 궁시(활쏘기), 마술(말타기 또는 마차몰기), 서예(붓글씨), 산학(경제)이라는 것이다.
서예가 거기에 속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 꺼낸 말인 듯 하다.
서예는 그렇게 우리사회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간의 중요한 덕목인데, 일반인들에게 그것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을 문득 생각하게 된다.
도제식으로 전승되어 온 서예는 그 폐쇄성이 숙명이라는 점, 전시장에서도 그들만의 언어를 구사하는 바람에 일반인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자기 수양에 머무는 서예인들의 한계가 오늘날 서예의 고립을 고착화시켰다.
일가를 이룬 서예가란 서예의 문외한과 서예에 관해 논할 수 없고, 질문에 답할 수도 없고 상대방의 질문 자체를 인정할 수도 없다.
그런 경향은 천착의 깊이가 깊을수록 더욱 강해진다.
서로 붓글씨에 감흥 하는 바탕의 결이 다르고 호흡이 다른 까닭이다.
그가 문외한을 향해 말을 하되 염려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해 부족으로 잘못 해석하거나, 편견이나 짧은 식견으로 왜곡할까봐 부심하는 것이다.
대가(大家)의 반열에 오른 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앞선 그의 말들은 그저 염려의 발로라 해야 맞을 것이다.
상대방이 서예의 문외한이라면 어차피 짧은 시간에 서예를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신중하게 살펴주기를 바라는 염려가 앞서서 던진 ‘들을 수 있는 자 만이 들을 수 있다’는, 단지 메시지에 불과한 말들이리라.
그런 긴장 가운데서도 서먹한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그가 풍기는 천진난만함 때문이었다.
눈빛이며 표정이 무얼 계산하지 않고, 거침없는 그의 말은 오직 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뜻에 집중하고 있었다.
서예란 어떻게 정신을 담아내느냐에 있다고 했으니, 그의 붓글씨가 어떠할 지는 보지 않아도 알만했다.
꾸밈없이 순수하여 그의 본성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겉모양이 화려한 꾸밈을 멀리하고, 필획과 형태의 본질을 탐구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하여 노자가 대변(大辯)은 약눌(若訥)이라 한 바와 같이 한 길의 정점에 다다른 그의 정신은 서툰 듯 드러나되 자연스러워 추호의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불통으로 소통하다

현담 조수현은 자신의 은사인 남정 최정균 선생을 도와 1989년 원광대학교에 한국 최초의 서예학과 개설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1992년 교수로 임명된 이래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원광대학교가 서예·문자예술학과를 토대로 동양대학원에 석사과정, 일반대학원에 석·박사과정이 개설되어 많은 전문 연구인을 배출한 배경에 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년퇴임 이듬해 학부가 폐지되었으니, 본의 아니게 원광대학교 서예사 전반의 산증인이 되었다.
그래서 학부 폐지의 충격은 그에게 남다른 것이다.
삶의 한 축이 증발한 셈이다.
그가 원불교도로서 구도자이기에 마음속에 악화가 구축되지는 않았지만, 후학들이 가슴에 걸리는 것만은 어찌하기 어렵다.
그는 “중국은 기초교양인 예절과 서예를 장려한다”면서 “심양 노신대학에는 서법학과가 있고, 학부 학생이 천여명에 달한다”고 이 나라의 척박한 서예 환경을 에둘러 안타까워한다.
한국 고대 금석학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온 그로서는 남다른 자존감의 붕괴를 감당해야 했으리라.
마주앉은 그가 공들여 말한 주제가 한국서예문화의 우월성이었기에 그렇게 가늠하는 것이다.
그는 선사시대 암각을 비롯해 광개토대왕비, 신라 비문, 백제의 와당문, 벽돌 문양, 한글의 기원 등에 대해 도취된 듯 이야기했다.
그는 내내 자신의 서예 세계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붓글씨가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한국 고대금석문을 찾아내고 탐구한 끝에 청출어람의 성취를 초월한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한국 서예의 진수를 발견했다.
현담 조수현의 서예가 중국 서법에서 시작되었지만 형태와 정신에서 중국적인 것을 지우고 한국적인 것으로 대체하는데 오랜 시간과 공력을 들여온 이유다.
그렇기에 그가 느낄 고독감과 고립감이 불현듯 느껴졌다.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쳐 온 그는 창신을 거듭해 왔거니와 한국 금석문의 광범한 수집과 정리, 한국적인 서법 도출, 그 안에 스미어 있는 토속적인 사상 등 그가 세운 금자탑이 여전히 중국이라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쪽배 같기에.
그는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대해 ‘은허문자(갑골문)를 창안한 동이족의 후예가 한민족이라면 한자문화권에 있어서의 문화적 뿌리는 우리 조상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우리의 심신에는 이미 동양문화의 근본이 갊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족 고유의 모습은 조금씩 변할지라도 그 본질은 우리 문화의 바탕으로 남아 있음을 감지하여 본질의 추구와 새로움의 가치를 창조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본질이 되는 사상적 측면과 조형의 근간인 예술적 측면을 함께 연구하려 한다’고 밝힌다.

쓰인 글자는 맑은 향기 가득하네

현담 조수현은 자신이 집필한 ‘한국서예문화사’와 칠순 기념 서집인 ‘붓과 먹의 정신’, 그리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했거나 서우(書友)들이 함께한 전시회 도록, 그의 심혼의 칼이 구현한 격조 높은 전각 도록 등을 내밀었다.
무심코 ‘붓과 먹의 정신’을 펼쳐보던 나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과연 글씨는 쓴 사람의 정신이었다.
책을 넘기다가 그가 쓴 창암의 서예 일칙에 유독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글씨는 일찍이 자연의 음양에서 생긴 것이니, 형세는 기운이 붓에 실린 것이다. 오직 유연하면서 기괴한데서 생기나니, 준질(내달리고) 지삽(느린 듯 껄끄러운 붓질) 두 가지 오묘함을 얻음이 서법의 모든 것이다”
조수현은 자신의 서예관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금수강산이라 일컬어 왔다. 또한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순박하고 슬기로운 민족으로 위대한 긍지와 능력을 함양하고 있다. 이러한 맥박과 숨결은 현재도 우리 몸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런 환경이 나의 서예작업과 무관치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바탕 하에 역사적 관점과 사상적 측면을 고찰하여 마음으로 진리를 증득하고 몸으로는 자연을 체득하여 고유색이 배인 내 모습의 글씨가 스스로 움터 나와 소박하고 정감 있는 작품이 나오도록 정진하고자 한다”
취정 김수천 교수는 ‘현담예술의성취’라는 제하의 감상평에서 “오늘날 글씨를 꾸미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잘 쓴 글씨는 될지언정 좋은 글씨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서예가 아름다움의 추구가 아닌 예술이 되기 위해 잘 쓴 글씨와 좋은 글씨, 이 두 가지 개념을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좋은 글씨는 기교의 연마 이외에 갖추어야 할 교양이 충분히 쌓아졌을 때, 비로소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현담의 예술세계는 재평가할 수 있다. 선생이 글씨의 기교와 습기에 빠지지 않고 좀 더 생명감 넘치는 좋은 예술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밝혔듯이 인류애의 바탕 하에 예술이 요구하는 다양한 교양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찬미했다.
한시인인 궁산 오광익은 조수현의 ‘붓과 먹의 정신’ 발간 축시에서 ‘글씨를 쓰면 신성이 밝아지고/글씨를 쓰면 맑은 마음 길러지고/따라서 정서도 저절로 순박해/검은 빛깔 용은 꼬리 흔들어 춤추고/행동은 그 마음이 나타남과 같고/글은 그 생각을 새김과 같다/먹의 향기에 막힌 가슴 뚫리네/인재를 길러 이 세상에 바치고/쓰인 글자는 맑은 향기 그윽하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야기를 마친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큰 작품을 작업실 바닥에 펼쳤다.
최근 가장 일본적인 붓글씨를 쓰는 한 일본 작가가 그를 가장 한국적인 작가로 선별하며 2인전을 제안해 준비한 작품이라고 했다.
고조선 가림토정음 38자와 훈민정음 28자, 훈민정음 서문을 상하에 배치한 대작과 대필로 휘호한 작품 몇 점을 배접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접하게 되었다.
창암의 서론 일칙과 오광익의 축시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그림은 말없는 시이고, 소리 없는 음악이고, 몸짓 없는 선(禪)이다.
그의 말마따나 ‘성자가 진리를 깨친 안목에서 서술한 내용이 법이요 경이듯이 붓글씨도 그러하리라.’

글 공인배 · 사진 송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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