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신중앙시장 앞에서 바라본 전신전화국

신중앙시장 앞에서 바라본 구경찰서 방향

"큰 산을 깎아서 건물을 짓기로 했어. 그러니까 지반도 단단해서 건물을 뚝딱 지을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산을 깎았더니 그 밑이 뻘이었던 거야. 그 위에 건물을 지으려니 예상했던 비용보다 두 배는 더 들어갔지. 한 길 사람 속도 모르지만, 한 길 땅속도 몰랐던 시절이 있었어"

뻘 위에 산이 있었을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우리는 김영규 회장이 말하는 그 이상한 산에 지어진 건물 앞에 도착했다.

건물 주 출입구 처마 앞면에 표기된 '(주)신중앙시장'이 주는 느낌도 낯설다.

그 위 2층과 3층 벽면에 한방병원과 요양병원 간판이 걸려있으니 '시장'이라는 의미가 와닿지 않는 것이다.

이상해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김 회장이 "익산 최초의 신식 시장이었어" 한다. "군 장성 출신이 매입해서 이렇게 바꿔놓았다지만, 처음에는 2층에 극장식 스탠드바도 있었다니까. 유명했지" 그런데 지금은 시장기능이 남아있는 것 같지도 않고, 스탠드바의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다.

"뭐 짐작하겠지만 여기도 다 논바닥이었어. 남쪽, 서쪽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논둑길을 걸어서 농고를 오갔지. 그런데 시내 중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큰 도로가 이렇게 놓인 거야"

어림잡아 약 250여보 동쪽에 있는 옛 농고(전북대 익산캠퍼스)를 떠올리는데, 김 회장이 세상을 바꾼 도로를 가리킨다.

인북로다. 이 길은 북쪽에서 동서를 가로지른 무왕로와 서쪽에서 동서를 가로지은 평동로를 서로 연결한다.

이 길은 또 신동시장을 비롯해 북부시장, 익산시청, 상공회의소, 전신전화국, 창인 성당, 구 경찰서, 이리중앙초, 남부시장을 거느린다.

한 길 땅속을 일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

인북로는 말하자면 융성의 길이다. 그런 길이 새로 놓이고 논바닥은 전부 주택가와 상가로 변신했다. 신중앙시장도 그런 새바람을 타고 지어진 것이리라.

스탠드바가 북적거렸던 것도, 개발에 따라 일어나는 수많은 거래들의 잉여의 코드에 맞았기 때문이리라.

"저 건너편에 있는 건물이 구 남중동 사무소였어. 건물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네" 김 회장이 가리키는 곳에 2층 건물이 있다. 1층에는 대한상일체육사, 2층에는 양의문 교회 간판이 각각 걸려있다.

김 회장은 내친김에 한 블록쯤 떨어진 남쪽 건너편을 가리킨다.

"저쪽 창인 성당 건너편 말이야. 지금 높은 빌딩 짓는다고 터 닦이 하고 있는 곳. 거기에 김동수 선생이 세운 익산 최초의 영·수학원이 있었지. '대일학원'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김 회장은 '이리 농림 길'을 걸을 때도 그 말을 했고, 동척길을 걸을 때도 그 말을 했었다.

오래 산 사람들의 공통된 가치관일까. 김 회장은 지역의 가장 큰 동력은 교육이라는 투철한 신념을 가졌다.

한 지역에서 오래 산 사람으로서 망설이지 않고 자기 지역의 유서 깊은 교육기관과 선구적 교육자를 자랑하는 이유다.

우리의 이번 노정은 황새골 일원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조각산이었기에 조각산을 대로변 쪽에서 깎아내고 지은 신중앙시장을 출발지점으로 삼은 것이다.

신중앙시장 앞에서 조각산으로 오르는 골목(삼익피아노 옆)

우리는 신중앙시장의 북측에 연접한 삼익피아노 건물 옆으로 난 인북로 곁 골목으로 들어갔다.

동쪽으로 뚫린 길은 계속 가면 끝에서 '선화로 14길'에 닿게 되는데, 30여보쯤에서 오른쪽(남쪽)으로 가지를 친다.

오른쪽으로 100여보 가량 가면 조각산 중턱인데, 이 오솔길은 왼쪽(동쪽)으로 가지를 친다. 역시 '선화로 14길'로 빠지는 길이다.

조각산 정상부근 폐가 터의 오동나무

조각산 정상부근의 폐가

곧장 오르막길을 오르니 정상 부근은 폐허다. 무너진 집 마당가에 긴 세월을 지킨 건장한 오동나무가 부조화스럽게 서 있다. 앞서 걷던 김 회장이 멈춰 서서 돌아본다.

"나 학창시절 때 애들이 말이야. 상대방한테 뭔가 수가 틀리면 '나랑 한 판 붙자' 하면서 앞서 오던 곳이 바로 여기 조각산이었지"

"실제로 여기 와서 싸우는 놈들이 많았다니까" 공터도 없고 이렇게 나름 경사진 언덕에서 이른바 '맞짱'을 떴다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데, 김 회장이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김 회장에게 '단 둘이 이런 외진 곳에 와서 무슨 재미로 싸우나요'하고 묻게 된다.

"그렇지 둘이 이런 곳에 오면 싸우는 일이 거의 없지. 싸울 생각이 없어지는 거야. 서로 어깨를 툭치며 '잘해'하면 그만이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말리는 사람이 있으면 꼭 싸움이 나. 싸움은 그런 군중심리 때문에 일어나는 거야"

신중앙시장 건물

신중앙시장 건너편, 구 남중동사무소 자리

폐가의 대문과 담장 건너편, 신중앙시장 뒤켠에 핀 철쭉

단 둘이 산에 오르면 맞짱도 '흐지부지'

조각산 정상에 있는 흙벽 가옥

조각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정상은 넓지는 않지만 나름의 공터를 형성하고 있다.

돌아보니 우리가 오른 길은 북에서 남으로 오른 조각산에서는 가장 큰길이다.

초여름 한낮의 더위에 익었던 이마가 서늘한 바람에 식으면서 상쾌한 기분을 안겨준다.

씩씩거리며 올라왔던 청춘들이 이곳에 올라와서 기분전환을 하고 돌아갈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북로 곁골목, 30여보 들어가면 오른쪽은 조각산 쪽, 직진하면 '선화로 14길'

100여보 가량 올라가면 조각산 중턱

그러고 보니 인북로 쪽(서쪽)으로 빠지는 길은 우리가 올라왔던 길 하나뿐이다. 조각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모든 길이 '선화로 14'길로 들어간다는 점이 특이하다.

황새골은 동쪽 아래 구릉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조각산에서 내려가는 여러 갈래 길이 만나는 '선화로 14길'은 황새골의 서쪽 외곽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선화로 14길'에서 바라본 남쪽(이리신협 방향)

'선화로 14길'에서 바라본 북쪽(익산시청 종합민원과 방향)

조각산 정상 동쪽에서 바라본 폐가 터

이 길은 북쪽으로 선화로를 교차하고 막다른 곳에서 익산시청 종합민원실을 만나게 된다.

남쪽 끝에서는 옛 이리농림학교(현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와 익산대로를 연결하는 '인북로 22길'을 연결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도 남중지구대 주차장 뒤쯤에서 왼쪽으로 꺾여 '선화로 14길로 빠진다. 우리는 조각산 정상에서 동쪽(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방향)으로 뚫린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 산길은 반듯하지 않다. 산길은 60년 가까이 된 오래된 가옥들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선화로 14길'에 내려서면 남쪽의 '인북로 22길'(대전사거리 길)이 보인다. 북쪽으로는 완만하게 내려가던 경사길이 동서로 가로진 '인북로 28길'을 교차한 뒤 다시 완만한 경사길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각산 길가에 있는 1960년대의 집

황새골은 법정동이 아니어서 그 구획이 명확하지는 않다. 조각산과 전북대 익산캠퍼스 사이에 있는 큰 마을 정도로 상정된다.

우리는 황새골 서쪽 외곽을 돌아 그 중심을 관통해 남하해 보기로 한다.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