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종합 > 특집기사 > 담화 #9. 향토색의 진경, 화폭에 시(詩)로 기록되다

담화 #9. 향토색의 진경, 화폭에 시(詩)로 기록되다

서야(西野) 이승훈(60)은 한국화가다.

그가 가장 최근 개인전(사계전, 2019년 2월 25일)에서 선보인 수묵담채화가 명증한다.

이 전시작들을 통해 드러낸 이승훈만의 화풍이라면, 극사실적 실경 산수 또는 전원 풍경이 아닐까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작가의 심상에 맡겨진 한국화의 원근법이 아니라 서양화의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기에.

그런 화풍은 작품 ‘위도에서’ 또는 ‘용멀해안’ 안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림이라기 보다 사진에 가까운 음영(陰影)의 세묘가 손에 잡힐 듯한 입체감을 구현하고 있다.

먹색이 강하고 그런 만큼 화려한 색이 가볍지 않은, 그래서 실제의 풍경이 무연한 듯 조화를 이루며 생동한다.

작품 ‘가을 계곡의 청음’을 비롯해 그가 발견한 여러 진경들이 그러하다.

또 하나 그의 수묵담채화가 남다른 것은 우연히 포착하면서도 그것을 필연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진경이 그의 눈에 닿고 가슴을 통과하여 손끝(붓)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이야기가 되는 까닭이다.

그것은 자연이 존재하는 뜻과 사람이 존재하는 뜻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작가의 생각이 투영됨이다.

그리하여 그의 사람이 없는 진경 산수가 인간세상과 동떨어져 있지 아니하게 되는 이유다.

진경의 본질은 ‘고독’이지만 보는 사람의 고독에 관류하면서 의미 있는 삶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이 시(詩)를 지니게 되는 성취는 그가 사물에서 시(詩)를 발견하고 시심(詩心)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의 결과물이다.

그러한 힘은 그가 몇 권의 시집을 낼 정도로 시를 사유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는 또 전북교육청이 발행하는 한 잡지에 여러해 동안 명화(名畵)들을 자기 관점으로 소개하면서 독자들의 감성을 일깨우는 글을 연재해 오고 있다.

그 일부를 엮어 ‘감성 그 시간속으로’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그 평론의 구성 가운데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맨 앞에 자신의 시를 배치한 것이다.

그의 시심은 ‘폴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를 다음과 같이 품었다.

저절로 이끼가 푸르른 것은/ 산사나무 꽃 하얀 이슬 받아/ 그 순백의 체온을 맞추고/ 깊은 계곡에 힘차게 흐르는 것/ 새벽마다 안개 피어나는 것은/ 내 숨겨진 죄 벗기고자/ 산새도 호흡을 몰아 소리치고/ 북소리 운판소리 다 전하고도 모자란 것/ 미진(微震)에도 쏘인 마음 조리다가/ 화들짝 놀란 봄 꽃들이 풀풀 날아서/ 무념 없는 듯 내려앉은 곳에/ 내 업보 옹이가 되었는지/ 낙화에도 둔탁한 소리가 난다

내친김에 이승훈의 제2 시집에 수록된 시 ‘달개비꽃 하늘’을 본다.

가을 하늘도 돌아가는/후미진 돌담아래/온종일 무엇이 서러워/서러운 빛으로 앉아/땡볕에 그을리고 있는가. /가슴도 타는 듯/저 간델라 불빛 퍼지는/강가에서 무엇이 그리워/이슬을 한밤중에도 주워 담는가./들판 너머 한 포기/ 아무리 장대높이 뛰어도/오늘도 가장 낮은 곳에서/고단했던 기억들 삭히는가./들과 강을 건넌다 했더니/달개비꽃으로 물든 하늘/곱게 문지방을 넘어오면/그리움 늘 꿈 속에 젖는가.

이승훈의 이러한 문학적 감수성은 정형화되어 있는 한국화의 틀 안에서 한계를 느낀다.

그가 9년 전(2010년 10월 24일)에 열었던 개인전이 그 단서를 여실히 보여준다.

풍경을 비롯한 문인화나 초충도, 화훼 등 다양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특히 백제기행 시리즈가 백미다.

화면을 여럿으로 분할해 크고 작은 각각의 다른 풍경이나 이미지들을 배치했지만 의미가 서로 통한다.

화면과 화면 사이를 진하고 굵은 먹색이 가로막았지만 수묵담채의 질료는 화면의 경계를 묘하게 지우고 있다.

강한 칼라와 먹색이 조화를 이루면서 통일성을 획득한 것도 그 묘처일 것이다.

또 백제기행 가운데는 민화에 가까운 작품도 있다.

나쁜 귀신을 쫓고 경사를 맞이하려는 염원에 먼저 닿게 된다.

종교와 생활습속의 상관성을 익살스럽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 의미 전달의 용이성을 획득한다.

전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권위적이지 않고 민중 속에서 함께 부대끼려 하는 그의 소박한 품성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백제의 미의식과 정감, 그 근원이 되는 불교라는 주제는 무겁지만 원초적 형상과 강렬한 원색, 정형적 틀을 깨뜨리는 구도로 편한 감상의 길을 연 것이다.

작가의 낙천성이 이룬 성취다.

그의 백제기행 시리즈는 좋아하는 것 보다 즐기는 것을 의미 있게 자리매김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을 계곡의 청음

시집 '감성 그 시간 속으로'

제2 시집 '달개비꽃 하늘'

백제기행 1

백제기행 2

백제기행 3

백제기행

익살스럽게 다가서다

이 같은 실험적 작업으로 한국화의 표현 영역을 넓혀 오던 그는 다시 전통 실경산수를 탐닉하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밖으로 나다니는 것이 좋아서’라고 한다.

그는 우리의 산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매순간의 사랑을 기록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토속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계절마다 계곡을 많이 다니고, 가급적이면 전라북도를 돌아다니죠. 익산 명소도 한 번 해볼까도 생각하고 있어요. 가람 이병기 생가 같은. 실경 위주로요”

사실 ‘백제기행’ 시리즈 같은 반구상 작품들도 그의 그런 방향성의 산물이다.

그는 이 같은 사실적 접근으로 최근 전주 복사꽃 마을 진경을 포착했다.

“전시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가보고 싶다. 위치가 어디냐고 묻는다”며 그가 도록에서 예의 그 복사꽃 사진을 찾아 보인다.

흐드러진 복사꽃이 화면에 꽉 차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복사꽃밭 언덕은 물론이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도시며 그 보다 먼 산, 하늘까지 모두 한껏 봄에 취해 있다.

도록 몇 페이지를 넘겨 본다.

바위며 나무들이 강렬하다.

선명하고 굵고 짙은 먹선 때문이리라.

“선이 살아있어야 채색이 각자 놀지 않는다”고 그가 말한다.

“선이 살아있지 않으면 수채화인지 서양화인지 구분이 안 된다”고 부연 한다.

복사꽃으로 되돌아가서 보니, 강렬하게 살아있는 먹선이 있기에 눈부시게 화려한 복사꽃 채색이 안정감 있게 수용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채색이 진한 것도 그의 특색이다.

그는 “채색이 많아지면 젊은층이 호응하고 노년층은 한국화로서 치기가 있다고 한다”며 살짝 미간을 찌뿌린다.

작품 속 사물의 질감을 위해 아크릴이며 석회 같은 것들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원하는 색을 내기 위해 커피나 소금을 혼용하며, 입체감을 위해 오브제를 사용할 만큼 한국화의 지평은 넓어졌는데, 한국화를 바라보는 고정관념은 여전하다는 항변이다.

그는 또 “한국화에서는 선도 선이지만 여백이 강조 된다”고 한다.

겸재 정선이나 김홍도의 작품들이 그 두드러진 예라 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채색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산수화도 그렇거니와 생략하고 집중하는 문인화에도 관심을 돌리고 있다.

“문인화도 선재들 방식만 따르다 보면 발전이 없습니다. 제각기 사유방식으로 그리는 것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그의 말에 울림이 있다.

그는 적어도 자기만의 굴절된 잣대로 마음을 재지 않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리하여 타인을 터부시하는 조직이나 단체의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 갈 길을 꿋꿋이 가는 가객이다.

전주 복사꽃 마을

산수도

선명한 선은 화려한 채색을 품고

서야 이승훈은 “그림도 인간을 다루는 것”이라고 한다.

“빈센트 반고흐 역시도 그런 그림을 사랑했기에 전도사를 그만두고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그림을 끝까지 그리지 않았느냐”고 한다.

자신도 그와 같은 길을 가고 싶다는 말로 읽힌다.

그런 지표 때문일까.

그는 명화를 남긴 수많은 화가들과 그들 명화에 얽힌 사연들을 고찰하고 자신의 눈으로 재해석한 명화 이야기를 예의 미술문화칼럼집 ‘감성 그 시간속으로’에 실었다.

그는 여기에서 눈 깊은 시인의 신화를 유감없이 펼쳐놓고 있다.

농익은 화중유시(畵中有詩)의 맛에 취한다.

소동파의 말을 빌려 느낌을 대신한다.

“시인은 만물을 묘사하는 공로가 있다. ‘뽕 잎사귀 떨어지지 않으니 그 잎사귀가 윤택하네’라고 하였으니 다른 나무는 이 뽕나무를 당해낼 수 없다. 임포(林逋)의 매화 시에 이르기를 ‘성근 그림자는 얕은 맑은 물에 비치고 은은한 향기는 달뜨는 황혼에 피어오르네’라고 했으니 절대로 복숭아나 오얏꽃을 읊은 시는 아니다. 피일휴(皮日休)의 백련에 관한 시에 이르기를 ‘무정한 백련이 한이 서려있으니 어느 사람이 보리오. 달 지는 새벽 맑은 바람에 꽃잎 떨어지려 하는 때이네’라고 했으니 절대로 홍련에 대해 쓴 시는 아니다. 이것이 곧 만물을 묘사하는 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