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발묵에 ‘서로의 관계’를 담다

한국화의 전통적 골필과 발묵이라는 토대 위에 현대적 감각을 접목시켜 한국화의 지평을 넓히는데 매진해 온 작가.

작품을 통해 주위와 소통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

한국화가 박미서에 대한 주위의 평이다.

지난달 16일 영등동 인갤러리에서 그를 만났다. ‘물들다’라는 주제로 15번째 개인전을 연 그는 2시간 가까이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작품에 대해서는 한없이 엄격했다. 상대를 충분히 배려하면서도 선택에 있어서는 과단성이 있는 모습이 묘한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바람이분다

◇ 선이 가진 마력

그가 말하는 한국화의 특징은 골필선묘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붓놀림이 기본이라는 얘기다. 선과 발묵으로 기운생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한국화라는 것이다.

대상이 지니고 있는 느낌을 선을 통해 작품으로 생생하게 담아내는 것이 그의 작품세계다.

그는 통상의 여타 작가들에 비해 10여년 늦게 한국화를 시작했다. 학창시절 미술성적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그림실력이 내로라할 만큼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기 손을 그리는 숙제가 있었어요. 그려놓고 나니까 데생은 잘 된 것 같은데, 내 손이 아닌 것 같은 거야.”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었기에 막막했다. 미술책에 나오는 아기 손이나 할아버지 손을 그리는 것은 되는데, 정작 자기 손을 그리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 정말 많이 고민했지요. 한참 후에야 ‘선’의 맛이 살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17살짜리 여자아이가 가지고 있는 손의 ‘선’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탓이었다. 새벽녘까지 거듭 그리고 나서야 잠이 들었고, 다음날 미술시간에 최고점을 받았다.

돌이켜 보면, 그는 그때 이미 선의 마력에 빠진 듯하다.

◇ 관계성

그의 15번째 전시 주제는 ‘관계성’이다. ‘물들어감’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빛깔이 스미거나 옮아서 묻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실경인지 머릿속 상상인지는 중요치 않다. 어떤 소재를 선택하고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는 이에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요하지 않는다. 의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조차도 관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야매를 본다.

소재는 매화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움이다. 곧게 뻗은 가지에 고개를 숙인 듯한 꽃망울은 밤하늘의 별이다. 홀로 있는 것이기에 외롭지 않을 것이지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이는 함께 하지 못한 이를 보고 싶어 애가 탄다.

박미서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데 주목한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어떤 사람을 만나 무엇을 하고 느끼는가, 어떻게 소통하는가 하는 지점이다. 작품을 통해 주위와 소통하고,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서 행복을 찾는 그다.

“몇 해나 지났을까, 서울 모처에서 보름간 전시를 할 때였어요. 가을에서 초겨울에 접어들 무렵인데, 때 이르게 털목도리를 한 여인이 전시작들을 유심히 살폈어요. 근데 30여분이 지나도록 자리를 뜨지 않는 거예요.”

그는 여인과 차를 한 잔 했다. 여인은 많은 전시작 중 3점을 꼽았다. 가장 화려한 색감의 작품들이었다. 여인은 몸이 성치 않아 요양 중인데 이 그림들을 보면 나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후 작품은 여인의 집에 걸렸다.

“꽤나 오랜 전 이야기지만, 가끔씩 생각이 나요. 이맘때쯤 되면. 건강은 좋아지셨는지 하는 생각.”

◇ 보이지 않는 역할이 아름답다

“목단을 셋 그렸는데, 전부 주연급이면 어떨 것 같아요?”

좋은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는 도중에 그가 뜬금없이 묻는다. 한국화는 최초의 선이 최후의 선이기 때문에 그리기 전에 계획(구상)적이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자유분방하다. 실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할 경우 버리게 되는 그림이 많지만, 아무 기대 없이 시작된 선이 갈수록 근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틱하다”는 게 그의 표현이다.

그런 와중에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앞선 질문은 보이지 않는 역할을 묻고 있다. 언뜻 화려한 목단이 주의를 끌겠지만, 이내 다른 작품으로 눈을 돌리기 십상이라는 거다. 질문의 답은 “산만하다”이다.

“사진을 찍을 때 전부 자기가 잘 나오려고 고개를 내미는 것과 같아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지요.”

주위의 보이지 않는 역할들이 있기에 주인공이 있는 것이고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에 이번 전시의 방점이 찍혀 있다.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자리가 더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바람도 담겨 있다.

◇ 그저 먹색이 좋았을 뿐

그는 애당초 직물디자인을 전공했다. 산업미술은 갈 길이 아니란 생각에 과감히 벗어던졌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먹색이 좋았다.

순수미술은 찾는 이들(수요)이 없으면 사장되기 마련이기에, 그의 아버지는 실용학문을 권했고 다른 이들처럼 취직을 원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홍익대 대학원 2학기를 마치고 새로운 선택을 했다. 결혼 후 작은 아이가 5살 무렵이었고 30대를 넘어선 시점이었으니 작가로서는 꽤 늦은 출발이었다.

3년여를 스승을 찾아 헤맸고, 2년여를 매달려 그림을 배웠다. 부모는 물론이고 주위 친구들의 만류가 거셌다. 지금과는 달리 여성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정받는 때가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살림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과단성 있게 도전했다.

“10년 늦었으면 10년 더 살면 될 것 아냐. 지금 안 하면 나중에 50대 60대 돼서 얼마나 후회하겠어.”

그래서 그의 작품이 단호하다고 느껴지는 것일까. 그의 수묵담채는 자유스럽지만 과단성이 있다. 때로는 엄격하다. 문외한이 봐도 충분히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작품을 마주한 상대에게는 한없이 온화하다. 그는 관계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주위의 만류를 단호히 뿌리칠 수 있는 모습 역시 그에게는 관계의 힘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마음그릇에서 상대가 넘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기저에 깔려 있다.

◇ 우연한 기회에 등단

그는 박미서의 글과 그림 ‘사람이 살아가는 길 옆에’, 수필집 ‘내 안의 가시 하나’, 수필선집 ‘이 찬란한 꿈을’ 등을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한국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학창시절 그는 글재주가 좋았다. 중학교 때 이틀에 3권씩 학교도서관과 동네 책대여점을 섭렵하면서 읽은 책들이 자양분이 됐다. 책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았지만, 위인전은 매력이 없었다. 꼭 모범답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한 지금의 박미서라면 그때도 충분히 그랬을 듯 싶다.

여고시절 친언니처럼 따르며 수필 쓰는 법을 가르쳐줬던 선배가 한국화가로 한창 활동하고 있었던 40대 중반에 글 2편을 청해 왔다. 여고시절 약속에 못 이겨 2편을 썼는데, 또 3편만 더 써 달라고 해 3편을 더 썼다.

그는 그때 글을 쓰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우울감이 사라졌고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렇게 글 5편을 쓰고 우연한 기회에 전북일보에 기사가 실렸다. 어찌하다 보니 전북문인협회 시화전에 참여하게 됐고 회원이 됐다. 그렇게 회원이 되고 난 후에는 발표할 지면이 많아졌고, 자연스레 글을 쓰는 사람이 됐다.

“지금 모습이 내가 잘나서 그런 거 아니다. 주변에서 끌어주고 보탬이 돼 준 선배, 동료들 덕분이다. 늘 마음 써 준 그분들처럼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지금을 살고 있다.”

송승욱 기자

碧松

雨中化, 능소화

[한국화가 지원(志苑) 박미서]

이리남성여고 졸업 / 전북대 섬유공학과 졸업 / 전북대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졸업

개인전 15회(익산, 전주, 서울, 경기도) / 한국미술협회전, 전북단체연립전, 익산미술협회전, 연지회전, 한민서화회전, 부산타원여루전 등 국내 단체전 및 대만, 일본, 중국 등 해외전과 초대전 다수 출품

한국예총 익산지부 수석부지부장(전) / 한국미술협회 익산지부장(전) / 한국미술협회 전북지회 한국화분과 이사(전)  / 한국미술협회 전북여성미술인협회 감사(전) / 이리남성여자중고등학교 총동창회장(전) / 남성미술제 운영위원장(전)

한국미술협회·전북문인협회 회원(현) / 익산문화관광재단 이사(현) / 전북도립미술관 작품구입 심의위원(현) / 전북대 평생교육원 한국화반 출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