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길, 황등호 3 - 허리다리

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황등호 서쪽 입구(허리다리 쪽)에는 ‘만추의 여정’을 위시한 황등호의 내력과 현황, 제방 축조와 보수에 참여한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는 표지석 등이 세워져 있다.

함열 방면 익산대로에서 황등 고가교 못 미처 오른쪽에 허리다리로 빠지는 길이 있다.
약간의 경사길을 막 내려가면 왼쪽 어깨에 삽을 걸쳐 매고 오른손으로는 벼를 옆구리에 끼고 서서 남쪽 하늘을 우러르며 선 농부의 동상이 있다.
동상 받침석 양 측면에는 건설 참여자들의 명단과 황등배수개선사업의 개요가 기록되어 있다.
이 동상은 잘 다듬어진 정방형의 화강석이 받치고 있는데, 화강석 전면에는 '만추의 여정'이라는 작품의 제목이 음각되었다.
이 화강석은, 그보다 한 뼘 가량 넓은 사각의 화강석 궤에 채운 모래 위에 놓여 있다.
화강석 궤에 담긴 모래는 높푸른 하늘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연상의 방아쇠를 당긴다.
농부의 추수는 모래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물과 흙이니, 그렇게 생각을 일으키려는 것이 모래를 매개로 선택한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다시 살펴보아도 동상과 돌·모래는 일말의 이질감이 없고, 창공 아래 풍광과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어쨌거나 이 만추의 여정은 가을걷이가 막 끝난 들녘 초입에 들어선 기자에게 무뚝뚝한 어조로 한마디를 건네는 듯 하다. '이 곳은 하늘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땅'이라고.
그 오른쪽에는 일제강점기의 임익수리조합장이 황등호 제방을 수축하다가 땅속에서 발견한 요교비(허리다리비)가 예의 모래를 채운 반듯한 화강석 궤에 거치되어 있다.
이 요교비는 전북농조 황등출장소에 보존되어 오다가 이곳에 이설되었다. 요교비의 내용을 보면 1780년 무너져 내린 황등호 제방을 수축하는 일과 요교를 가설하는데 많은 시주를 한 몇 사람의 은덕을 후세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화주승(인가에 나다니면서 염불이나 설법을 하고 시주하는 물건을 얻어 절의 양식을 대는 승려) 지원(芝苑)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풍화현상으로 마모된 요교비의 음각된 글씨는 거의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다. 매끄러운 부분은 수마를 겪었고 부분은 쓰러진 비석의 밑면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요교비의 불규칙하게 마모되어 뒤틀린 모양과 석질은 오랜 세월에 인위성이 지워지고 남은 결정 같아서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 왼쪽에는 황등호의 개요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서 있다. 현재의 익산시 신용·영등·어양·정족·임상·월성동, 황등면 황등·율촌리, 삼기면 용연·간촌리가 황등호에 속했던 동네였다.
이 황등호는 일제강점기의 임익수리조합이 농업 수원으로 사용했고 몇 차례 보수되었는데, 수량이 1,900만톤에 달했다.
수량으로 보면 익산시가 상수원으로 쓰고 있는 신흥동 저수지의 19배에 달하고, 당시 평균 수심이 1.8미터였다.
물 위로 나룻배들이 다녔는데 '백길 나루터' 등 여러 나룻터가 운용되었다고 안내되어 있다.
길은 50보 가량 경사져 있다. 경사의 끝은 황등호를 진술하는 표지판과 표지석을 지나서 10여보 더 내려가는 지점이다.
길은 오른쪽 탑천변에 자리잡은 요교양수장에서부터 평탄해진다. 양수장은 탑천의 남부 양안을 가로지른 수문과 연결되어 있다.
이 수문이 익산 황등뜰과 군산 임피·대야·익산 오산뜰의 젓줄 탑천의 시작이다.
수문 쪽에서 허리다리 쪽을 돌아보니 23번 국도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곳 수문이 도로의 지표보다 웬만한 사람의 키 만큼 깊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수문의 남쪽 지평선 끝에 영등동의 아파트 숲이 장벽처럼 동·서로 늘어서 있다. 마치 황등호의 인위적 제방 같기도 하다.
영등동 쪽에서 북진해 온 고압 전기 철탑은 탑천을 건너지 못하고 수문 끝에서 급격히 서쪽으로 허리다리 위를 통과한다.
그 바람에 철탑에 연결된 전선이 흰구름 뜬 창공에 오선지를 그렸다. 그 보다는 철탑과 철탑에 연결된 선은 하늘의 현악기에 가까워 보인다.
그저 바라보노라면 상쾌한 가을바람이 연주하는 수많은 음악들을 들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런 풍경은 물 속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하늘과 물이 다르지 아니하다는 것처럼.

참살이는 비워내어 집중하는 것

초입에서 180여보쯤 길을 따라 걸어가면 기양천변에서 활터 '건덕정'을 만나게 된다. 이 활터는 23번 국도와 기양천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사대는 남쪽에 있고 표적은 북쪽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여 궁사가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분위기 탓일까. 궁사는 고구려쯤의 한 전사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궁사가 쏜 화살은 연못을 건너 표적을 향해 허공을 가른다.
궁사가 준비된 화살을 다 쏠 때까지 한 편에 숨을 죽이고 있다가 활을 거두는 틈을 타 안쪽으로 들어갔다.
입구 쪽 벽면의 '푸른 하늘을 나는 화살도 욕심없이 마음을 가다듬고 시위를 당기면 화살은 반드시 과녁에 적중한다(창공비전심정필중)'는 사훈(射訓)에 이끌리어 그 아래 걸려 있는 액자들 앞에 다가섰다.
그 중 '집궁시제원칙'의 가장 하단에 눈길이 머물게 된다.
'쏘아서 맞지 아니하면 자신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다시 살핀다(발이부중 반구제기, 發而不中 反求諸己)'는 예기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비단 활을 쏘는 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이 가르침을 곱씹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여기가 황등호의 한 부분인 탓일까. 23번 국도와 기양천 사이에 자리잡은 이 건덕정은 도로의 동쪽 높은 빗면에 바싹 붙어서 모습을 감춘 듯 보인다. 외부의 눈이 닿지 않는 은자들의 쉽터 같다는 느낌이 든다.
활을 쏘지 않더라도 사대 쪽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거나 혹은 탁 트인 들판을 바라보노라면 흉중에 쌓인 시름이 흩어질 것도 같다. 그래서 건덕정은 담장이 따로 필요없었던가 보다.

해가 지나는 다리를 건너

입구로 나와 가던 길 위에서 보면 다리 하나가 눈길을 끈다. 50보 가량 북쪽에 있는 이 다리는 허리다리 쪽에서 동쪽 간척지로 건너가는 유일한 다리다. 다리 이름은 달리 표시되어 있지 않다. 기양천을 가로지른 이 다리는 동서를 잇고 있다.
다리에 이름을 붙여보자면 이 다리 위로 해가 지나다니니 일행교(日行橋) 정도가 어울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리 초입에서 동쪽으로 건너려니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가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북서풍이 불었다.
기양천변 은빛 갈대들이 일제히 동남쪽으로 누웠다. 기양천 제방을 지나는 바람의 순례자들이 황등호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듯 했다.
아니 북서풍이 일상이어서일까. 갈대 목들은 황등호를 향해 꺾인 채 되서지 않았다.
다리 건너 제방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저 간척지가 아직 습지였을 때 북으로는 황등, 함열을 거쳐 성당에 닿았을 것이다.
 미륵산 일원의 물만으론 황등호에 물이 충분하지 못했을 테니 성당 앞을 지나는 금강에서 지류가 가지쳐 들어와 배를 띄울 만한 물이 유입되었을 것이다.
물은 남쪽 끝의 오금산 자락에까지 미쳐 차올랐을 것이다. 그 넘친 물은 서쪽으로 흘러 광활한 뜰을 적시고 만경강에 합류해 서해로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탐사 방향을 북쪽이나 남쪽으로 정하기 전에 탑천을 마주보고 있는 동쪽 끝을 먼저 가보기로 한다.
제방과 동쪽을 연결하는 가장 까까운 농로는 일행교에서 남쪽으로 110여보 쯤에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휑하다. 그래서인지 과거에는 이곳이 습지였다는 것을 실감한다.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

황등호 수문, 서쪽평야를 적시는 탑천의 상부.

황등호 수문에서 바라본 두천(망동천), 이 물길은 미륵산에서 발원해 금마뜰과 삼성동을 적시고

이곳 황등호에 이른다.

건덕정, 이 활터는 23번 국도와 기양천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기양천, 과거 미륵산에서 발원한 물과 금강에서 유입된 물이 만나는 수로였을 것이다.

건덕정을 끼고 도는 길은 기양천을 건너 동쪽 습지를 잇는 다리와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