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호세안민(護世安民)을 기원

익산시 도심을 빠져나와 호남고속도로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백제의 옛 향기가 점점 진해진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긴 잠에 들어있는 쌍릉과 서동생가터를 지나 만나게 되는 금마사거리는 천사백년 전 백제의 중심지였던 금마와 왕궁의 갈림길이다. 금마사거리에서 왕궁리유적 방향으로 궁성로를 따라 200미터 쯤 가다보면 왼쪽으로 빠지는 제석사지로가 나온다. 이 길로 들어서서 2km 정도 가다 보면 궁평교 건너 좌측으로 촌락을 이루고 있는 궁평마을을 만날 수 있다. 이곳 마을의 안뜰에 백제 무왕이 세워 왕국안정과 백성의 편안함을 기원한 사찰, 제석사의 터가 있다. 제석사는 익산시민에게도 미륵사와 왕궁리유적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백제왕도 익산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적 중 하나다. 국가경영의 의지를 담아 창건되었다가 어느 날 벼락을 맞고 불타버렸다는 제석사. 그 후 다시 세워졌다고 전해지지만 오랜 세월에 자취를 감추고 그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국가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호세안민의 바람으로 제석사를 세운 무왕의 혼을 찾아 제석사지를 들여다보았다.

제석사지 발굴 현장에서 왕궁리 유적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가운데 목탑지가 솟아있고 둘로 쪼개진 심초석이 남아있다.

◇ 왕실사찰 제석사

제석사지는 왕궁리유적에서 동쪽으로 약1.4km 떨어져 있다. 궁성에서 보통걸음으로 10여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제석사가 왕실사찰의 역할을 했으리라고 짐작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불교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그 시대에는 궁궐 내에도 불당을 두었고 따로 가까이 사찰을 두어 국가경영의 기틀로 삼았는데, 대규모 사찰인 제석사가 왕궁성과 함께했다는 사실은 무왕의 익산천도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주는 사료가 되고 있다.

중국 육조시대 문헌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여 제석정사(帝釋精舍)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을 뒷받침 한다.

관세음응험기는 무왕의 익산천도 가능성을 밝힌 유일한 기록으로 역사서가 아니기에 신빙성이 의심되기도 했다. 그러나 1913년 이전에 궁평마을 일원이 제석면(帝釋面)으로 불렸던 사실과 1942년 이 지역에서 ‘제석사’라고 찍힌 기와가 출토되며 백제시대 제석사가 이곳에 실재했음이 밝혀졌다.

이와 더불어 관세음응험기에 ‘정관 13년(639, 무왕재위40년) 뇌우로 인하여 불당과 7층 목탑 및 건물이 모두 불탔다’는 기록이 이어지는데 그것 또한 사실로 밝혀졌다.

제석사에서 북쪽으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왕궁리 와요지(기와를 굽던 가마터)로 알려져 있던 곳에서 2003년 시굴조사에 의해 불에 탄 소조상(塑造像), 벽체파편, 명문와 등이 수습되며 제석사가 불에 탔을 당시 그 폐기물을 묻었던 폐기장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로써 미륵사가 백제의 국립사찰이었다면 제석사는 왕실사찰이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 제석사에서 궁성을 바라보며

야트막한 구릉 위에 세워진 궁성에서 무왕은 선화공주와 함께 제석사에 자주 들렀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몇 명의 시종들만을 대동한 채 아침 산책을 겸해 제석사를 향하지는 않았을까. 제석사가 궁궐의 동쪽에 세워졌다는 점은 해가 뜨는 방향에서 궁성을 향해 그 영험한 기운을 비춰 주리라는 기원에서였다.

아침 이슬을 밟으며 제석사로 발걸음을 옮기는 서동과 선화는 햇빛에 눈이 부셔 살짝 찡그리기도 했지만 제석사로 가는 내내 미소가 가득했다. 사찰의 마당을 쓸던 동자승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장난질에 한참이다 깜짝 놀라기도 했으리라.

제석사지에서 발굴된 세계최초 인동당초문 암막새와 연화문 수막새.

사찰터의 정문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서서 왕궁리유적을 바라보며 이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제석사의 ‘제석’은 불교에서 불

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아수라(阿修羅,악귀)의 군대를 정벌한다는 임금이며 우리나라 토속신앙에서는 환인(桓因)을 제석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제석사를 창건하고 제석신앙을 퍼뜨렸던 백제 무왕의 뜻은 곧 제석의 힘을 통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밖으로는 외세를 물리치고자 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제석신앙을 기반으로 왕이 곧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미륵사의 미륵불과 태봉사의 삼존불과 달리 제석사는 왕실 사찰이며 국가수호 사찰의 성격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대규모 가람 제석사

제석사는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金堂,부처를 모시는 건물)식 가람배치로 이뤄져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탑이 제일 먼저 서있고 그 뒤로 금당이, 그 뒤로는 강당이 일렬로 서있으며 양쪽으로 회랑을 두고 있는 형태다.

미륵사가 동양 최대의 규모로 3탑 3금당의 형식이었다면 제석사는 단독 사찰로 그 규모가 만만치 않다.

1탑 1금당 사찰로는 남북 길이가 100m가 넘는 대규모의 사찰이었고 특히 목탑은 기단의 길이로 볼 때 21.2m에 달해 미륵사지의 목탑보다 더 큰 규모의 목탑이 있었다고 보인다. 또한 금당지도 미륵사지의 중금당지보다 5.8m가 더 큰 31.8m이며 강당지는 미륵사지보다 약간 작은 51.8m에 이른다.

규모로만 볼 때도 미륵사지와 견줄 수 있는 대규모 사찰이며 이는 공주와 부여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워 익산이 불교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일깨워 준다.

◇ 더 이상 목탑을 받칠 수 없는 심초석

현재 제석사지는 2차 발굴조사(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8-2009)까지 이뤄져 있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사적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목탑지가 눈에 들어온다. 작은 동산처럼 북돋아 있는 곳이 목탑지인데 그 위에 커다란 바위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본디 하나였던 돌이 두 개로 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바위가 바로 목탑을 지탱하는 기둥을 받치는데 쓰였던 심초석(心礎石)이다. 이 심초석에는 사리공의 흔적이 남아있어 목탑을 세우고 사리장엄구를 봉안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한다.

이에 관련한 내용을 관세음응험기에서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제석사가 전소되었을 당시 탑 아래의 초석을 빼내보니 모두 타고 오직 불사리병과 반야경을 넣어둔 칠함만이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사리병의 안을 볼 수 없고 뚜껑도 열리지 않아서 왕이 법사를 불러 참회하니 뚜껑이 열렸고 불사리 6개가 온전히 있어 다시 탑을 쌓아 봉안했다는 내용이다.

제석사폐기장에서 나온 불에 탄 소조상 등으로 보아 제석사가 639년 화재로 전소됐다는 내용은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그 당시 사리병과 반야경이 안전하게 남았던 곳이 바로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심초석일 것이다.

◇ 제석사를 기억하는 법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백제의 문화와 고도 익산의 가능성을 넓혀주는 제석사지는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의 가치와 견줄 만하다. 우리나라 최초이며 세계에서도 최초라고 말할 수 있는 인동당초문암막새(끝부분을 막아 문양을 넣은 암키와)와 불에 탄 소조상을 비롯하여 인장와(문자를 찍어 넣은 기와) 등이 발굴되며 백제의 숨결을 익산시에 불어넣고 있다. 무왕의 익산경영을 짐작하게 해주는 사적 중 하나로서 당당히 대접받을 만하다.

무왕은 641년까지 백제의 왕으로 재위했다. 639년에 제석사가 벼락을 맞고 불에 탔으니 그 후 2년 만에 물러난 셈이다.

사찰을 새로 짓는데 몇 년이나 소요될지 생각해보면 아마도 무왕은 다시 제석사를 방문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제의 국운이 제석사의 소실과 함께 기울었다고 보기는 너무 감상적인 생각일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의 제석사지에서 왕궁리 유적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이다.  

정완창 인턴기자

제석사 폐기장 유적지 발굴 당시 불에 탄 흔적이 있는 소조상과 기와편이 출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