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생각할수록 상상할수록 매력적인 왕궁탑
1989년 본격적으로 왕궁리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하기 전, 왕궁리오층석탑은 벌판에 뜬금없이 서있는, 오래된 것 같지만 그다지 돋보이지도 않는 돌탑일 뿐이었다.
전혀 궁궐터 같지 않고, 야산인지 농지인지 알 수 없는 빈터에 외롭게 서있던 ‘왕궁탑’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학생들이 이곳에 소풍을 오기도 했는데, 석탑만 덩그러니 서있는 그곳에서 별 감흥 없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일쑤였다. 아마도 첫째는 석탑의 크기와 육중함에 놀랐을 터이고, 커다란 탑 주변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기에 느끼는 황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던 왕궁리오층석탑이 20여 년에 걸친 왕궁리유적 발굴과정을 통해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됐다. 더불어 익산이 고도(古都)로 지정되며 백제문화 중심지의 하나로 발돋움하는 지금에 와서는 고도익산의 초석이라 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미륵사지석탑의 경우에서처럼 왕궁탑을 중심으로 궁성이 발굴되고 있어 장차 왕궁이 복원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더욱 천사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궁궐을 홀로 지켜온 왕궁탑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제는 폐허에 남은 탑이 아닌, 잠자는 백제 문화를 복원해내는 근원으로서 왕궁탑이 자리하고 있다.
왕궁리오층석탑
◇ 조화로운 아름다움의 매력
왕궁리오층석탑은 왕궁리유적 발굴지인 궁터의 중앙에 있다. 최근 건립된 왕궁리유적전시관 앞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먼저 발굴된 성벽의 흔적과 성문이었던 곳을 지나게 된다. 이어 야트막한 오르막을 오르면 탁 트인 성터에 신비로운 자태를 지닌 탑을 만나게 된다.
왕궁탑은 높이 8.5m에 이르는 장중한 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탑을 받치고 있는 아랫부분)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다른 백제 시대의 탑과 마찬가지로 목조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단층기단과 넓은 지붕돌 등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았다.
첫 인상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아 수수한 느낌을 준다. 근처의 미륵사지 탑과 비교하더라도 그다지 돋보이는 점이 없다. 그렇지만 누구나 탑 앞에 서면 왠지 모를 아찔함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점이 바로 왕궁리오층석탑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탑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그 모습이 불안한 듯 보이면서도 안정적인 느낌을 동시에 받게 된다. 기단보다 1층 지붕돌이 크고 탑신(塔身:탑의 몸체)이 얇게 느껴져 얼핏 균형 있게 보이지 않다가도 위로 올라갈수록 묘한 균형미를 지녀 탑 전체가 단단한 기둥처럼 굳건하게 느껴진다. 또한 탑신에 새겨진 기둥무늬는 단순해서 수수하게 보이지만 지붕돌의 삼단 받침과 보일 듯 말 듯 하게 살짝 올라간 처마를 바라보노라면 절제미의 극치를 맛보게 한다. 지금은 처마 끝에 구멍만 남아 있지만 풍탁(風鐸:처마 끝에 다는 방울)이 남아있다고 상상해보면 그 아름다움은 더할 것이 틀림없다. 더하여 주변 건물과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라면 조화로운 모습으로 그려볼만 하지 않을까.
이렇게 소박한 듯 화려하며, 불안한 듯 안정감을 주고, 가녀린 느낌과 굳건한 느낌이 공존하는 경계에 왕궁탑의 아찔한 매력이 있다. 누구든 왕궁탑에 가면 적어도 10분 이상은 제대로 감상해 볼 것을 추천하는 이유다.
◇ 시대를 관통하는 매력
왕궁탑이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백제와 신라 고려의 문화를 모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석탑이 있는 자리의 밑에 목탑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주변 건물들과 높이를 같이하여 한 변이 17m나 되는 정방형의 목탑이 있던 자리라는 것인데, 최초 왕궁을 조성할 당시에 목탑이 먼저 있었고 그 후 목탑이 소실된 후 석탑이 그 자리에 들어섰을 것으로 추측한다. 아울러 석탑의 일부가 신라 석탑의 양식을 띠어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1965년 해체 보수 당시 알게 된 기단의 구성 양식이나 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유물로 볼 때 고려 초기에 건립됐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덧붙여 ‘금마지’에 ‘왕궁탑은 전주 완산의 지리가 않아 있는 개모양이고 그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 왕궁면이라, 이곳에 탑을 세워 개의 꼬리를 누르고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압승하게 된다’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 한다.
한편 탑 주변의 발굴 조사에서 ‘관궁사(官宮寺)’ ‘대관관사(大官官寺)’ 등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삼국사기’의 무열왕 기록과 관련된 대관사라는 절의 탑으로 661년부터 존재한 탑이라는 설도 있다. 이 밖에도 탑의 조형미가 전형적인 백제탑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미륵사지석탑, 정림사 오층석탑과 비교해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점이 있다.
이렇게 왕궁탑이 건립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 또한 왕궁탑이 지닌 매력이 아닐까 싶다. 백제시대에 세워져 신라와 고려시대를 관통하면서 저마다 왕궁탑에 남긴 흔적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싶다. 그 얘긴 적어도 고려시대 까지는 왕궁탑이 잊혀 지지 않고 역사의 중심에 자리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해체 보수 당시 탑의 1층 탑신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국보 123호로 지정됐다.
◇ 전설과 신비함을 간직한 매력
왕궁리오층석탑은 그 유구한 역사적 가치와 함께 많은 전설을 품고 있다. 오래도록 사람들에게서 잊혀 지지 않고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라진 왕궁에 홀로 남겨져 있었지만 왕궁탑과 관련된 이야기는 새롭게 만들어지고 전해지며 생명을 이어왔다.
먼저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이야기는 왕궁탑의 건립과 관련한 이야기다. 기록마다 왕건이 세웠다는 기록과 견훤이 세웠다는 기록이 혼재하고 있으나 모두 풍수지리 이론으로서, 전주 완산(完山)이 개의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개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꼬리의 위치인 왕궁리에 탑을 세웠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지금도 왕궁탑 때문에 완산이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형국인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1965년 4월 7일 왕궁탑의 해체 복원 공사 당시 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기록된 제석사 화재당시 목탑에서 나온 사리장엄 유물의 기록과 놀랍도록 흡사하여 학계의 관심을 받았다. 사리의 개수와 유물의 소재가 약간 다를 뿐이어서 제석사의 사리장엄이 왕궁탑에 다시 봉안되면서 추가되고 약간 변형되지 않았나 하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
이와 함께 해체 복원 당시 전해지는 영험한 이야기가 몇가지 전해지고 있다. 1965년 탑의 해체공사가 시작되자 밤마다 왕궁탑 주변에서 큰 불덩어리가 솟아올라 하늘로 사라졌다. 이 불덩어리를 보고자 사람들이 탑 부근에 가까이 접근하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 왕궁탑의 복원 공사를 맡은 총감독이 그 당시 우리나라 최고 드잡이공(문화재 복원전문가) 김천석(金千石)씨였는데 탑을 해체하는 도중 지붕돌 이음새에 사용했던 철제 꺽쇠가 나왔다. 길이 40cm 정도의 녹슨 꺽쇠에는 ‘千石’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이는 왕궁탑을 쌓은 석공의 이름이 천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년을 사이에 두고 동명의 사람이 탑을 쌓고 고쳐쌓는 기이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탑의 1층을 해체하던 중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그 당시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먹구름이 일고 어두워지면서 안개가 뿌옇게 일어났다. 그러다가 보물들을 거두어 수납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맑아졌다.
◇ 볼수록 알수록 빠져드는 매력
수많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백제와 신라를 관통해 익산시대에 바라보는 왕궁리오층석탑은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움을 품고 조용하게 지금껏 버텨와, 이제는 모두에게 역사 속으로 안내하는 에너지를 내뿜고 있다.
오래된 석탑으로 바라볼 때와 달리 지금은 그 영험함으로 왕궁을 지켜냈음을 느끼게 한다. 만약 왕궁탑이 무너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면 백제 무왕의 왕궁은 그 흔적조차 사라져버리고 말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발굴과정과 미래에 복원될 왕궁은 우리가 아니라 조용히 기다려온 탑의 힘이 행하는 게 아닐까 싶다.
고려 초기 양식을 띠고 있는 금동불상이 탑의 기단부에서 발견됐다.
만약 왕궁리오층석탑을 방문한다면 이렇게 감상하는 법을 추천한다. 먼저 가능한 오랫동안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음미한다. 그리고 탑에 얽힌 이야기들과 역사를 떠올리며 신비로운 감흥을 느낀다. 마지막은 천사백년 전 궁성에서 건물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탑을 마주하고 있다는 상상으로 맺는 것이다.
정완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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