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만에 산을 허물어 미륵사 창건을 도운 지명법사(知命法師)의 신통력 전해져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미륵산은 주변 역사 문화와 함께 오래도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미륵사지를 비롯해 미륵산성, 심곡사, 사자암, 석불사 등등 귀한 백제시대 문화유산이 곳곳에 남아있으며 해발 430m로 그다지 높지 않은 산세는 포근한 느낌으로 등산객들의 발걸음을 이끈다. 산을 찾은 사람들은 주변 둘레길과 연계한 등산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고도 익산의 백제문화를 보너스로 즐길 수 있다. 특히 산 중턱에서 만날 수 있는 사자암(獅子庵)은 백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고찰(古刹)로, 본디 사자사(師子寺)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자암으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해발 320m의 8부 능선에 위치한 사자암은 미륵산 산행에 있어 빼놓지 말고 들러야 할 장소다. 사자암에서 내려다보이는 익산의 경관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사자암이 품고 있는 신비한 전설이 마음을 설레게 하기 때문이다. 요즘엔 절 안에 시민선방을 마련하여 등산객들이 땀을 식히거나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오며 익산시의 역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자암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자암 대웅전.
아담한 앞마당에 석등과 석탑이 놓여 있고 거목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 사자암에 오르기
사자암에 오르는 방법으로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거쳐 양쪽으로 나있는 등산로를 따라 약 2km가량 오르면 정상 가까이에 우측으로 사자암에 이르는 안내판이 있고 여기서 300m가량 더 가면 사자암에 당도한다.
미륵사지를 거치지 않고 사자암에 빠르게 오르는 방법으로는 구룡마을 입구에서 바로 올라가는 코스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용화산을 통해 미륵산으로 넘어오는 코스와 삼기 낭산 지역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도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또한 특별한 방법으로 모노레일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사자암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나르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사자암주차장에서 70도 정도의 경사를 5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도보로 이동해도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몸이 불편하거나 짐이 많은 신도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다.
아담한 경내에 들어서면 좁은 대지에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등의 건물과 석탑 등이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석축을 쌓아 터를 닦고 계단을 이용해 자연을 해치지 않도록 들어서 있다. 탁 트인 전면으로는 한반도 지도를 닮은 금마저수지와 함께 그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으며 맑은 날엔 멀리 삼례와 전주까지 내려다보인다.
◇ 사자사에서 사자암까지
사자사란 이름에서 사자(獅子)는 문자 그대로 백수의 왕 사자를 뜻하기도 하지만 불교에서는 부처의 위엄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인다. 부처가 앉는 자리를 사자좌(獅子座)라고 부르거나 부처의 설법을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에 비유해 사자후(獅子吼)라고 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닌 것으로 그려지고, 사찰 석탑의 4면에 사자상(獅子像)을 놓았던 것도 불교와 사자의 밀접한 관련성을 말해준다. 특히 사자사(사자암)는 미륵불이 하생하기 전 도솔천에 있을 때 앉아 있었다는 사자상좌(師子床座)에서 따온 이름으로 추정되며, 미륵신앙이 익산지역에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미륵사지도 마찬가지 신앙이 적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자사에 대한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미륵사 창건연기설화와 관련되어 처음 등장한다.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불공을 드리기 위해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를 찾았다는 내용으로 미륵사창건 이전부터 백제의 중요 사찰로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선시대의 기록은 모두 삼국유사의 기록을 따르고 있는데 사자암(獅子庵)으로 개칭된 것은 사세(寺勢)가 위축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대 기록에서 사(師)와 사(獅)는 동일하게 쓰였음)
근래까지 사자암이 위치한 곳이 사자사터일 가능성을 두고 학계의 관심을 받았으나 미륵사지 발굴조사단에 의한 주변 조사에서도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사자사’라고 적힌 기와편이 출토 됐다.
그러다가 1992년 사자암 법당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사자사’라고 적힌 명문기와가 발견되며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자사터임이 밝혀진 것이다. 미륵사를 비롯해 왕궁성 등이 스러지고 흔적으로 남아 있는 가운데, 천오백여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지금까지 사찰로서 명맥을 잇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 지명법사의 신묘한 능력
용화산 사자사에 거하고 있었다는 지명법사(知命法師)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무왕이 어렸을 적부터 지명법사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설이 전해지는 것 외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것이 전부다. 단지 신라 진평왕 대에(603년) 당나라에서 지명법사(智命法師)가 돌아와 포항시 내연산에 보경사를 세우고 불법을 전했다는 기록은 묘하게 백제의 지명법사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지만 동시대에 비슷한 이름의 고승이 활동했고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예를 들어 백제의 지명법사와 신라의 지명법사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생각하면 서동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의 혼인도 지명법사의 중매가 있어 가능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전해지고 있는 지명법사의 신통력이라면 충분히 백제와 신라를 넘나들며 불국정토(佛國淨土) 건설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삼국유사 무왕조(武王條)의 미륵사 창건연기설화에 등장하는 지명법사의 행적은 이렇다. 서동이 선화공주와 혼인하여 비로소 금(金)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오금산에서 많은 양의 금을 취하게 되는데 이를 신라왕실에 보내기 위해 지명법사에게 수송할 방법을 묻는다.
지명법사가 자신의 신통력으로 금을 보낼 수 있으니 가져오라고 해서 선화공주의 편지와 함께 사자사 앞마당에 갖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냈다. 그 후 진평왕은 서동을 존경하게 됐고 서동은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무왕은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를 찾아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 커다란 연못에 이르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출현한다. 이에 왕비가 연못에 커다란 사찰을 세울 것을 청해 허락했으나 연못을 메울 방법이 없어 또다시 지명법사에게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했다.
이밖에 지명법사에 대한 행적은 밝혀진 바가 없으나 무왕과 관련한 것이나 사자암이 사자사터로 밝혀진 것에 의해 백제말기에 활동했던 승려임은 확실해 보인다.
정확한 문헌기록이 없지만 지명법사가 금산사와 수덕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하룻밤이면 모든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신통력은 그만큼 지명법사의 영향력이 컸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사자암 발굴현장 모습.
◇ 법등을 꺼뜨리지 않고 이어오다
현 사자암의 대웅전 및 전각들은 모두 최근에 와서야 개축된 것들이다. 1992년 이전만 하더라도 슬레이트지붕을 얹거나 비닐하우스 등으로 이뤄진 초라한 암자였다. 이는 조선 말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사자암을 사용하면서 일제에 의해 모두 파괴됐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사자암은 계속해서 법등(法燈)을 꺼뜨리지 않고 1990년대에 들어서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개축됐다. 그 과정에서 발굴조사가 이뤄지며 사자사터임이 확실해지기도 했으며 몇 번에 걸쳐 계속해서 개축되는 과정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발굴결과 시기를 달리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건물 기단의 흙속에서 사찰명이 적힌 기와가 발견됐다. ‘지치2년사자사조와(至治二年師子寺造瓦)’라고 명문된 기와가 출토된 것인데 지치2년은 1322년에 해당돼 고려 후기 충숙왕 9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사자암이 사자사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가 됐다. 그 밖에도 백제시대 기와 편 다수와 청동약사여래입상, 청동여래입상 등 시대를 달리하는 유물들이 나와 오랜 시간 동안 개축되며 명맥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사자암 대웅전 앞에 서있는 삼층석탑은 오래전에 흩어져 나뒹굴던 잔해들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높이 276cm의 비교적 작은 석탑인데 본래 모습을 알 수 없고 복원 당시 주변의 석등 부재가 일부 섞여 들어갔기 때문에 부자연스럽다. 탑신부와 지붕돌이 일정하지 않고 맨 위 지붕돌은 거꾸로 놓여 있는 상태다. 사자암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는데 새로 만들어 세운 탑과 나란히 대웅전 앞에 놓여있다.
사자암 발굴 당시 출토된 청동여래입상.
◇ 고도(古都) 익산을 내려다보며
미륵산 주변에는 풍부한 백제 문화를 탐방할 수 있는 둘레길이 잘 조성돼 있다. 왕궁리유적에서부터 금마로 이어지는 무왕의 흔적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고도 익산의 백제문화에 흠뻑 취하게 된다.
익산이라는 도시에 백제시대의 문화유산이 이렇게 풍부하고 밀집해 있다는 것은 그동안 익산시민들도 잘 몰랐던 행운이다.
미륵산 사자암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백제시대의 익산을 그려본다. 동양 최대규모의 미륵사가 산 밑에 자리해 있고 옥룡천을 따라가 시선을 옮기면 궁성과 제석사가 눈에 들어온다. 서동이 마를 캐던 오금산과 익산토성이 성큼 다가오기도 한다. 천오백년 전에도 그곳에 사찰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지명법사의 독경소리가 사찰 내에 그윽하게 울리는 것 같다.
정완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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