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괴석이 표현하는 수려한 자연경관..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백제 왕실의 풍류 

지금도 왕궁리유적지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위 사진은 왕궁리 유적에서 정원이 있던 곳의 모습이다. 오른쪽 하단 사진은 일본식 정원으로 왕궁리유적의 정원 양식이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유일한 왕궁터로 확인된 왕궁리유적은 그 역사적 가치와 함께 다양한 유물로 백제인들의 문화와 삶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20년이 넘게 진행 중인 발굴조사에서 천사백년 전 서동 무왕(武王)이 세웠던 궁궐의 규모와 각종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결과 왕의 집무실과 후원 등 여러 건물지와 성벽, 공방터, 대형화장실, 배수로, 정원(庭園)유적 등이 발견됐는데 이로써 무왕이 익산에 세운 궁궐의 모습을 좀 더 확실하게 그려볼 수 있게 됐다.

그 중 2004년 확인된 정원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유적이며 당시 중국과 일본의 일반적인 정원양식과 다른 독특하고 창의적인 백제인의 조경기술을 만날 수 있는 유적이다. 또한 놀랍도록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치된 정원시설과 정원을 꾸민 각종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은 백제인들의 풍류를 오늘날에 전해주고 있다. 서동 무왕과 선화공주가 거닐며 수려한 경관을 감상했을 왕궁의 정원에서 천사백년 전 백제 왕실정원의 이야기를 상상해 본다. 

◇ 선화공주를 위한 정원일까?

왕궁리유적에서 정원은 궁궐의 중앙에서 후원으로 연결되는 지점에 조성됐다. 현재 왕궁리유적에 들어서면 정면인 남문터를 지나 왕궁리5층석탑 뒤편으로 왕의 집무실인 정전건물터가 있고 그 뒤에 주변 건물지와 함께 정원이 있는 것이다. 왕이 집무를 보는 공적인 영역과는 다른 휴식공간으로 후원영역을 구분하는 역할을 정원이 담당하고 있다. 궁성을 조성하는데 중요한 요소인 휴식공간이며 후원과의 연결통로 역할을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무왕이나 선화공주가 기거하던 침전이 가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정원은 기암괴석으로 산과 바위 등을 표현했고 아담한 연못에 맑은 물이 적당히 흘러들어오며 연못에서 다시 물길을 따라 굽이치며 흐르도록 만들었다. 주변엔 각종 나무를 심었고 화려한 꽃들이 아름다움을 더했을 것이다. 비교적 작은 규모지만 근처에 산책로와 정자(亭子)가 있었고 다리가 놓였던 흔적도 있다. 왕궁 내에서도 특별히 아름다운 공간이었음이 틀림없다.

서동 무왕이 익산에 왕궁을 세우면서 특별한 지시를 내렸던 게 아닐까? 선화공주를 위한 특별한 선물로 정원을 만들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당시 일반적인 정원이라 하면 연못을 파고 옆에 정자를 세우는 양식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자연경관을 축소해 마당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획기적인 조경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왕이 선화공주에게 처음 정원을 보여주던 장면을 상상해본다.

무왕이 선화공주의 눈을 가린 손을 떼자 선화의 눈에 수려한 정원이 펼쳐졌다.

“폐하,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저 바위하며, 물줄기까지 꼭 고향에 온 느낌이 드옵니다. 혹시…”

“맞소, 내 그대를 위해 특별히 경주 금오산(현 경주남산)과 형산강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았소. 맘에 든다니 다행이오.”

감동한 선화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무왕과 선화공주는 달빛이 그윽하게 내려앉도록 정원에서 담소를 나눴다. 

◇ 기암괴석이 수놓은 정원

왕궁리유적의 정원 중심부와 주변에서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괴석과 조경석이 확인됐다.

이는 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특별히 조달된 것으로 보이며 그 중 2개의 특별한 조경석이 발견됐다. 여러 종류의 자갈이 뭉쳐 굳어진 각력암(角礫岩)으로 추정되는 이 돌들은 어린아이 머리만한 크기와 그보다 좀 작은 크기의 조경석인데 이와 유사한 암석이 주변에서 확인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 이와 유사한 조경석이 중국 태호(太湖) 근처 석회암 지대에서 나오고 있으며 물고기비늘과 닮았다 하여 일본에서는 어린석(魚鱗石)이라고 불리는 귀한 돌이다.

나머지 조경석은 그 모양이 울퉁불퉁하여 괴석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왕궁리유적에서 4.5km떨어진 시대산이나 13km떨어진 천호산에서 조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 석회암이 오랫동안 불특정하게 녹거나 깎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특히 천호산에는 석회암동굴이 있으며 대규모의 석회암 집중노출지점이 확인됐다.

다양한 크기의 이런 조경석들은 왕궁 정원을 조성하는 핵심으로 자연경관을 축소하여 정원에 옮겨놓을 때 주로 산과 절벽 등을 표현하는데 쓰였을 것이다. 그 자체로도 동물을 비롯한 여러 모양을 띠고 있어 정원의 경관을 독특하고 아름답게 꾸미는데 쓰였으며 정원 외에도 그 크기에 따라 여러 곳에 위치하며 궁내 조경용으로 쓰였다.

무왕과 정원을 거닐며 산책을 하던 선화공주는 신기한 모양의 바위들을 보다 궁금해졌다.

“폐하, 저 돌들은 어디서 나는 것인데 저리도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답니까.”

“자연이 만들은 것이오. 한낱 돌멩이도 오랫동안 녹고 깎여나가 저런 아름다움을 지니게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니겠소. 저 태호석은 중국에서 들여온 것인데 귀하기도 하거니와 그 생김새가 워낙 특이하여 정원에 두고 바라볼 요량으로 놓아두었소.”

정원유적에서 나온 여러 괴석들 가운데 특히 제석(蹄石)이라고 불리는 돌이 있는데 그 돌에는 백제 무왕이 하늘에서 천마를 타고 내려올 때 말이 내려서며 말발굽 자국을 남겼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 과학적인 수로 조성

왕궁리유적의 정원은 크게 중심시설과 주변시설로 구분할 수 있는데 중심시설은 화려한 괴석과 강자갈돌로 장식된 중심부, 입수부와 출수부로 이뤄졌다. 주변시설은 정원중심부로 물을 공급하고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수조시설 및 배수시설, 집수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정원 출입시설과 정원을 관람하기 위한 정자 건물, 교각의 흔적도 발견됐다.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 정원을 만들기 위해 먼저 정원의 북편에 수조시설을 만들었다. 완만한 구릉지형을 L자 형태로 파고 만든 수조는 가로 47m, 세로 276cm, 깊이 42cm로 물 5만 5천 리터를 담을 수 있는 규모다. 주로 빗물을 모으거나 후원의 우물에서 길어온 물로 채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빗물을 모을 당시 물을 정화하기 위한 집석(輯石)부와 웅덩이가 여러 개 발견됐다.

수조에 모아진 물은 깨끗하게 걸러져 입수부를 타고 정원 중심부로 떨어지게 된다. 괴석에서 물을 받고 장방형의 괴석으로 물이 흘러 내려와 마지막으로 정원 중심부에 자연스럽게 고이게 하는 3단 구조로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정원 중심부의 바닥에는 강자갈돌이 일정하게 깔려 있으며 깊이는 22cm로 비교적 얕아 바닥의 돌멩이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게끔 하였다.

정원을 돌아 흐르는 물은 폭 1m 안팍의 물길을 따라 보기에 수려하도록 구불구불한 형태로 빠져나가게 되며 물길 중간 여러 곳에 불순물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웅덩이를 갖추고 있다. 물길은 총 228m에 이르며 동편 담장 쪽으로 흘러가 빠져나간다.

또한 정원유적에서 암거배수(暗渠排水)시설이 발견됐는데 이는 땅 속에 관을 묻어 수조에 물이 넘치는 것을 방지하고 일정하게 정원으로 물이 흘러가도록 만든 시설로 처리할 수 있는 물의 양은 2,349리터에 달한다.  

◇ 사랑이 만든 유일한 정원

한국의 고대 정원과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부여의 관북리 연못과 궁남지, 정림사지 연못지, 미륵사지 연못, 경주 안압지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백제의 정원과 관련된 유적이 대부분 연못 형태로 발견되었을 뿐 전체 정원의 구조와 조영원리를 구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 무왕의 왕궁리유적 정원은 중심시설, 수조시설, 암거배수시설, 집수시설, 건물지 등이 발견되어 정원의 구조와 구성 원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무왕이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선화공주와 배를 타고 놀았다고 전해지는 부여의 궁남지는 야외에 조성한 인공연못으로 당시 정원의 일반적인 형태다. 미륵사지의 동·서 연못이나 신라 문무왕(661-681)대에 세워진 안압지도 마찬가지로 왕궁리유적 정원과는 다른 양식이다.

왕궁리유적의 정원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비단 궁궐 내에 조성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왕이 익산경영을 통해 남겨놓은 여러 유적과 더불어 놀랍도록 창의적이고 과학적이며 아름다운 백제문화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궁궐 내에 조성된 왕실 정원의 원형으로 후대에 전해지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정원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만든 정원을 고도(古都) 익산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일 것이다.                                  

정완창 기자

정원유적에서 출토된 각종 괴석들과 발굴 당시

정원 중심부가 드러난 모습 (좌하단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