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는 여러 왕비 중 한 명일 수 있다” 주장 제기 

정사인 삼국사기·화랑세기엔 선화공주 기록 없어 한계

익산시 금마면·왕궁면 지역은 상고시대와 고대 마한, 백제의 흥망에 이르기까지 짙은 자취를 남겼기 때문에 늘 역사 연구의 수수께끼가 되어 왔다.

특히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미륵사를 누가 언제 왜 세웠느냐를 놓고, 고대 문헌이 부족한 가운데 추측성 연구결과가 너무 많이 나오고,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는 탓에 아직도 정리된 것이 없다.

다만 2009년 미륵사 서탑西塔 해체과정에서 나온 ‘사리장엄봉안기’로 인해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다. 그러나 이로 인해 ‘무왕의 비인 선화공주의 뜻에 따라 지었다’는 삼국유사의 서동선화 설화가 허무맹랑한 것이 됐기 때문에 설화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주장이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고대 문헌에 대한 정리와 발간사업을 서둘러야 하고, 아울러 유물 발굴 및 고증작업을 더 활발히 펼쳐야 하는 과제를 후손들은 안고 있는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대 정권에서 제대로 된 역사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떨치기 힘들고, 오히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일제강점기 때보다 덜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현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이미 옛 기억을 잃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기양마을의 미륵사지 터를 보면서 이곳에 최초의 왕국이라고 할 만한 나라를 세운 마한의 기준왕 때부터의 자취를 순차적으로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호에 이어>

"하루는 왕(무왕)이 부인(여기서부터는 공주라고 하지 않고 부인이라고 썼다:편집자주)과 함께 사자사로 가는 도중 용화산 밑에 있는 큰 연못에 이르자 미륵삼존불이 물속에서 나와 수레를 멈추고 예를 올렸다.

이에 선화부인이 이곳에 큰 절을 짓기를 원한다고 왕에게 말하자 왕이 이를 허락했고, 지명법사에게 의논하니 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미륵삼회(미륵삼존불:편집자주)를 모셔 절을 세운 후 왕이 미륵사(삼국사기에는 왕흥사라고 함)라고 이름 지었다.

(신라)진평왕은 많은 일꾼들을 보내 작업을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지금 전하는 말로는 홀어미의 자식이라고 하니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이게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선화 설화의 근거이고 미륵사를 짓게 된 배경이다.

기록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일연선사가 직접 미륵사를 방문하고 인근 주민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서동의 출생비밀과 서동이 선화공주를 만나 부부인연을 맺는 과정, 진평왕이 공주를 쫓아낸 이유, 황금의 양, 지명법사의 신통력 등을 연결한 이야기의 틀이 허술하다.

따라서 이 기록은 지명법사의 신통력과 미륵삼존불을 모신 배경, 왕과 공주의 불심에 대해 설명한 것이지, 서동이나 선화공주를 묘사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불교 승려의 입장에서 불교의 중흥에 관심을 갖고 쓴 글이라는 점이다. 금마에 실제로 마룡지로 추정되는 '연동제'가 있고, 당시 지명법사가 사자사를 창건했다는 기록과 함께 현재 미륵산 정상 부근에 사자암이 남아 있는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런 정도의 이야기는 충분히 지어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삼국유사의 내용은 야사, 즉 민담이나 전설, 설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이에 반박하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런 와중에 2009년 미륵사 서탑西塔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함이 나오고 사리를 봉안한 목적과 배경을 적은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서동선화 설화는 실제로 전설이 됐다.

사리봉안기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전생에서)오랜 세월 착한 일을 하여 현생에 (태어나) 좋은 보답을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었기에 재물을 바쳐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己亥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모셨다. 원하옵나니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길고...아래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라고 적혀 있다.

사리장엄기의 발견으로 최소한 미륵사는 사씨 가문 출신 왕비의 뜻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의 요청에 의해 무왕이 미륵사를 세웠고, 신라 진평왕의 신임으로 서동이 인심을 얻어 왕이 됐으며, 왕이 되기 위해 선화공주와의 만남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었고, 우연적인 만남은 나중에 미륵사 창건이라는 필연으로 이어졌다는 내용의 삼국유사 기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전설의 선화공주

선화공주가 실존 인물인가는 아직도 논란거리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선화 설화와 미륵사지 설립 배경에 대해 의문이 일자, 무왕에게는 왕비나 후궁이 많았을 것이고, 선화공주는 여러 왕비 중 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정사인 삼국사기와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라거나 셋째딸이라는 기록이 없으며, 여러 왕비 중 한 명이라는 정황도 불확실하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두 명의 딸 가운데 장녀가 만덕공주(선덕여왕), 화랑세기에는 장녀가 천명공주로 나와 있다는 점만 다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서동선화 설화가 신라 김서현 및 김유신이 겪었던 일화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전에는 "일찌기 서현(김유신 아버지)이 길에서 갈문왕 입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여식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에 들어 눈짓으로 꾀어 중매 없이 결합했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그때서야 딸과 서현이 결합한 것을 알고 만명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벼락이 문간을 때려 지키는 사람이 놀라 달아났고, 만명은 창문으로 빠져나가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달아났다. 서현이 밤에 별 두개가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 또한 어린아이가 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임신한 후 20개월이 지나 유신(김유신)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당시 이 얘기는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퍼졌을 것이고,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선사도 삼국사기를 보았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이런 얘기가 빠지고, 무왕 편에 선화공주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선화'라는 명칭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에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이른바 미륵선화彌勒仙化 설화다. 신라 25대왕인 진지왕 때 흥륜사의 진자라는 스님은 미륵부처님이 화랑으로 태어나주기를 빌었는데, 어느 날 꿈에 스님이 나타나 웅천(공주)의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진자스님은 우여곡절 끝에 '미륵선화'라는 어린 소년을 발견해 가마에 태워 왕에게 보였고, 왕이 소년을 좋아해 화랑으로 삼았는데, 7년 동안 화랑으로 지내다가 어느 날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로 보아 당시 신라나 백제나 미륵선화가 미륵부처님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독특한 신앙세계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일설에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했는데, 어머니가 선화부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것도 구술로만 전해오는 얘기이기 때문에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미륵신앙과 '선화'는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추측도 가능하다. 미륵사를 세운 무왕과 미륵선화를 연결시키려는 일연선사는 미륵선화가 인간으로 태어나 선화공주가 됐고, 선화공주가 무왕을 만나 미륵사를 세웠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불교의 연기설과 미륵신앙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대목이다.

아울러 신라세력과 백제세력의 갈등 봉합을 위한 일연선사의 충정으로도 볼 수 있다.

후백제를 멸하고 고려를 세운 태조는 지방의 명문 호족과 인척관계를 맺었고 이런 전통은 후대까지 이어졌는데, 중앙정계에서 신라출신과 백제출신 인사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심했다.

태조가 죽으면서 남겼다는 훈요십조에는 차령 이남 출신들은 기용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의 문서는 거란의 침입 때 타 버렸고, 나중에 신라계 관리인 최승로의 자손 최제안이 훈요십조의 필사본이라며 들고 왔는데, 거기에 풍수설에 입각한 백제출신 인사 기피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신라계와 백제계 인사들의 권력 투쟁을 볼 수 있는 단면이다.

따라서 서동선화 설화는 백제인 무왕과 신라인 선화공주가 결합해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미륵사를 세웠으니, 그 마음을 본받아 부처님을 한 마음으로 믿으면서 인간세의 작은 갈등은 접어두라는 일연선사의 충고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불교라는 종교를 통해 정쟁을 없애고 나라의 멸망에 한 맺힌 백제 후손들을 어루만지기 위한 선사의 뜻이 아니었을까.  

한편, 미륵사 설립 주체가 무왕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미륵신앙은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삼국시대 이전부터 토착신앙인 '풍류도'의 한 형태로 존재했고, 통일신라 말기의 문신 최치원은 '난랑비 서문'에서 우리나라에는 유불선이 합해진 풍류도가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

또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도읍을 익산으로 천도하고 제석사를 지은 사람은 무왕이 아닌 무강왕으로 나와 있고, 역사서에는 무왕의 천도 기록이 없으며, 미륵사 사리장엄기에도 대왕폐하로 되어 있지 무왕으로 추정할 만한 단서가 없다는 점을 들어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은 무왕이 아닌 무강왕이며, 무강왕은 온조왕이 통일한 백제시대의 무왕이 아니라 그 이전 고조선 때 기준왕이 남하해 세운 마한백제의 무강왕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는데, 단적인 주장에 그치고 있다.     

김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