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나루터’가 대장촌으로 바뀌고 철도로 식량 반출돼

익산시의 동남쪽에 있는 춘포면은 금마면과 왕궁면의 물줄기가 합류해 만경강의 지류를 만드는 지역이다. 예로부터 이곳은 물이 범람했었고, 만경강을 타고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왕래했으며, 물과 물고기가 충분한 곳이었기 때문에 석기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굴되고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기억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본에 온전히 넘어간 1910년 한일합병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건너와 토지를 대규모로 사들이고, 우리 농민들로부터 높은 소작료를 거둬 식량을 수탈해간 현장이다. 이번 호에는 춘포면 지역에서도 일본인 지주가 살았던 중촌(中村)마을과 바로 옆에 있는 회화(回化) 마을에서 주민들과 나눴던 얘기를 소개한다.

◇ 대장촌大場村에서 '딸촌'까지 

춘포면 춘포리는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1914년)할 때 익산군 춘포면과 동일면, 김제군 회포면 일대 9개 자연마을을 합쳐 만든 대장촌리大場村里였다. 

1996년 춘포리로 이름을 바꿨는데, 현재는 회화, 중촌, 신촌, 역전, 구담, 신평, 화신 등 7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이 중 주민자치센터(면사무소)가 있는 중촌中村 마을이 일본인 지주가 살았던 대장촌리의 핵심지역이었다. 지금도 중촌 마을에 가면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대장교회’가 우뚝 서 있다. 당시의 건축양식이 아닌 현대식 건물이며, 춘포면에서 가장 큰 건물이기도 하다. 중촌은 각종 행정기관과 학교, 철도역(춘포역) 등이 있는 춘포면의 중심지역으로 주로 일본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중촌이라는 이름도 일본인들이 지은 것이다. 

지리적으로 중촌마을과 특별한 구분 없이 맞닿아 있는 회화回化 마을도 당시에는 일본인 농장 및 소속 직원들과 우리나라 소작인들이 살던 곳이었다.

중촌 마을에서 각각 1932년과 1942년에 태어난 김석봉·함경희씨를 만났다.

김석봉씨는 이곳에 세천細川(호소카와), 금촌今村(카네무라) 등 두 명의 일본인 농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원래 이 지역은 물이 넘치는 곳이었는데, 일제 때 만경강을 정비하면서 둑을 쌓고 침수지역을 간척해 농지로 만들었으며, 일본인 지주는 주위의 땅을 매입해 양곡을 수집한 뒤 춘포역(당시 대장역)을 통해 군산으로 쌀을 실어 날랐다.

또 원래는 중촌과 회화 마을 앞에 흐르는 강(현재는 구강으로 불림, 구강은 옛날에 강이었다는 뜻)으로 배가 드나들었는데, 만경강을 정비하고 둑을 쌓으면서 뱃길이 끊겼다. 이곳에는 주로 봄에 고깃배나 소금 배들이 들어와서 물건을 내주고, 가을에 와서 곡식으로 받아가는 나루터가 형성됐다. 

김씨는 중촌에서 일본인은 농장 지주였고 주민들은 소작인이었는데, 한국인들 중에서는 농장에 취직해 중간관리자로 있는 사람도 있었고, 소작인들은 소작료와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식량을 다 뺏겼다고 말했다.

식량 수탈의 교통거점이었던 춘포역은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준다. 건물 앞으로는 현재 고속철이 오가는 철로가 새로 생겼다.

춘포역. 1914년 일제가 건립해 식량 반출거점으로 삼았다.

중촌·회화 마을 앞 ‘구강’

춘포면 중촌마을에 남아있는 일본인 농장 가옥.

김씨는 1908년에 기찻길이 생겼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식량을 수탈하기 위해 춘포역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익산시내(당시 이리시)에 섬유산업이 발전했던 7,80년대와 90년대 초반, 바깥쪽에는 중촌마을을 '딸촌'으로 부르기도 했다.

춘포역에서 젊은 여자들이 기차를 타고 이리시내로 출근했기 때문이었다.

"이리에서 쌍방울 같은 공장들이 생기다 보니까 이 지역에 있던 여자 분들이 시내로 기차 타고 다녔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옛날에는 집에서 살림만 하던 여자들이 많이 나갔단 말이에요. 강 건너 살았던 분들도 전부 여기서 기차를 탔어요. 그러다보니 외부 사람들이 여기를 뭐라고 그러냐면 ‘딸촌’이라고 그랬는데, 여자들이 시간 되면 아침에 출근 하려고 기차를 타고 저녁에 끝나면 많이 내리고 하니까 그런 별명 아닌 별명이 생겼죠."

중촌에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면 회화마을은 소작인들과 현지 주민들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5부터 5년 동안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5명의 주민들(송규봉, 박학수, 김부순, 김점여, 전말분)에 따르면, 1925~1937년 만경강 제방을 쌓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뻗친 강 지류로 배가 들어왔기 때문에 마을에는 장사꾼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회화 마을은 강 나루터가 있는 마을인데, 주변에는 빵집, 술집, 고기집, 식당 등이 즐비했다.

중촌 마을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송규봉(77)씨는 어렸을 때 중촌 마을에 가면 "일본 놈들이, 애들이 막 돌을 던졌고, 우리는 도망 다녔다"고 말했다.

또 공출이라는 명분으로 농민들이 수확한 쌀을 마구 가져갔는데, 공출을 안내면 반장이나 이장 집으로 끌고 가 무릎 꿇려 놓고 추궁했다고 한다.

춘포역은 전주와 이리시, 군산시를 연결하는 철도 중심지였기 때문에 기차는 30분마다 있었고, 통학하는 학생들이 "까마귀 떼" 같이 많았다. 당시에는 버스가 없었기 때문에 철도 이용객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까마귀 떼" 는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일컫는 말로 들린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일찍이 이곳에는 수돗물을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만경강 상류인 고산천으로부터 물길을 끌어온 것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더 이상 먹을 물을 대 주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곤혹을 치렀다. 그래서 주민들은 우물을 파기도 하고, 빗물을 받아쓰거나 개천의 물을 길어다 먹기도 했다. 하지만 땅에 아직 소금기가 남아 있어서 식수로 쓰기에는 부적합했는데, 물이 안 좋으니 주민들 사이에서 피부병이 많았다는 말도 전해온다.

◇ 전설의 파편들

중촌과 회화마을 사람들은 어렸을 때 도깨비불을 많이 체험했다고 했다. 또 더러는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고 자랐다.

춘포면 용현리 철로 변에는 '도깨비 방죽'이 있었는데, 밤에 도깨비에 홀려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다. 한 번은 마을 주민들이 방죽에서 물고기를 잡아 근처의 논에 갔다 놨는데, 아침에 보니 모두 없어졌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도깨비에 홀려 밤새도록 주변을 헤매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춘포면에는 들판만 있고 산이 없는데, 유일하게 낮게 솟은 '춘포산'과 철도 주변에는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 '도깨비불'이 많이 나타났다.

"불이 열 개 도 되고 그게 30개 정도로 불어나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이 도깨비와 싸움을 했데요. 장승같은 사람하고 싸웠는데, 죽을 힘을 다해 허리띠를 풀어 나무에 묶어 놓았는데, 아침에 술 깨고 보니까 도깨비가 아니고 빗자루더랍니다. 긍게 그전에는 빗자루를 여자들이 잘 깔고 앉았거든요. 그러면 체액이 묻어 도깨비불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도깨비와 여성의 외로움을 연결시킨 우스꽝스러운 얘기다.

"사람에서 나오는 인 성분이 조금 뭉쳐 있으면 푸르스름하게 빛이 나잖아요. 반딧불같이. 인제 고런 것들이 보이니까 사람들은 공포를 느낀 것이지."

마을 사람들에게는 또 '벽에 못을 박으면 눈이 아프다'는 미신이 있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못 박으려면 좋은 날을 받았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아프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잖아요. 근데 모든 것을 여기(미신)에 연계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스스로가 그 안에 귀속되어 버리는 거여." 중촌마을 김석봉씨의 말이다.

◇ 제국주의의 잔존물

중촌마을에는 두 개의 "근대문화유산"이 있다.

일제의 유산이 왜 근대문화유산인지, 근대를 규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논란이 있지만, 이곳에는 해방 전 농장 관리인이 지은 이층집 한 채와 일제가 건립한 춘포 역사(역 건물) 등 두 개의 제국주의 유산 또는 잔존물이 있다.

일본식 2층집은 이곳에서 가장 큰 농장을 갖고 있었던 호소카와細川 가문 밑에서 관리인으로 있던 '에토'라는 일본인이 1940년에 지은 집으로,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 주택이다.

지금은 문화재 제211호로 등록돼 문화재청과 익산시가 관리하고 있는데, 개인이 소유하고 있고, 외부는 과거의 모양을 유지하고 내부 일부만 바뀌었는데, 당시 일본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춘포역은 1914년 대장역이란 이름으로 건축됐다. 이것도 문화재 제210호로 등록돼 있으며, 일제가 지은 명칭을 고친다는 취지에서 1996년 춘포역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문화재청과 익산시가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역사驛舍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에토 가옥과 춘포역은 일제의 수탈을 상징하는 제국주의의 대표적 유산이다.

하지만 건물 및 주변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고 홍보가 미흡하며, 배경 설명이 없어 방문객들에게 별다른 감응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식민지화 및 수탈을 위한 철도 구축, 식량을 더 수탈하기 위한 제방 축조와 농지 간척, 조선인 소작인을 착취했던 대규모 농장과 농장을 관리하는 간부직원의 가옥은 한국의 근대화보다는 제국주의자들의 탐욕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따라서 근대문화유산이라는 말은 수원 화성에, 일본인 가옥과 춘포역사는 '제국주의 유산'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김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