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이 세운 ‘부고’였다는 추정도 나와

왼쪽부터 기준왕 때 나라의 창고가 있었다는 춘포면 창평마을.

가운데는 창평마을 앞으로 흐르는 옥룡천. 금마저수지에서 발원한다.

마지막은 창평마을 앞 들판. 너른 평야는 옛날 '창뜰'로 불렸다.

춘포면은 익산시 북동쪽인 금마면 왕궁면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다. 

금마면 용화산 자락이 뻗쳐 내려온 덕기동의 덕기제와 서성제에서 나오는 갈전천, 춘포면 갈전리 갈전제에서 발원한 장동천, 미륵산과 금마저수지에서 시작돼 금마면 소재지를 거쳐 춘포로 내려오는 옥룡천, 금마면 용화산 밑 용화리와 용화제에서 발원하는 부상천, 금마면 동고도리에서 시작되는 도평천, 왕궁면 동촌리서 발원하는 궁평천과 동면천, 왕궁면 동봉리에서 시작되는 왕궁천을 비롯한 상류의 실개천들이 춘포에 이르러 모두 익산천을 만들고 이것이 춘포면을 감싸면서 만경강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춘포면은 익산동북부와 남부를 흐르는 하천이 모두 모이는 지역이다.

춘포면은 상당히 넓은 지역이며, 하천이 많기 때문에 농업이 발달한 지역인데, 역사적으로는 하천 하류지역인 춘포면 소재지 부근은 일제강점기 때 식량수탈의 중심지역으로 거론되고, 춘포면 내 하천 상류지역은 금마면과 왕궁면, 팔봉동과 가까워 마한백제의 역사가 전한다. 이 일대 모두 마한백제의 땅이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 속에는 더 생생했고 더 많이 들었던 얘기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 기준왕인가 무왕인가

춘포면 창평리는 엽동과 갈전리, 창평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이중 창평倉坪마을은 단군조선을 이은 고조선 때의 왕 기준이 금마로 내려와 세운 마한백제의 전설이 살아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손충모(82), 류기홍(60)씨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이들은 창평마을이 마한백제를 세운 기준왕이 나라의 식량창고를 둔 자리라고 말했다.

금마면 미륵산에 기준성이 있고, 궁궐은 왕궁면 궁평리에 있었으며, 창평에는 궁궐의 창고, 엽동 마을에는 군사훈련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익산향토지에는 이곳이 기준왕 때가 아닌 “백제 무왕이 금마에 천도하려고 이곳을 경영할 때 나라의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고 적혀 있는데 주민들의 말과는 다르다.

향토지에는 또 익산읍지에 ‘옛날 도읍 때에 부고府庫(창고)가 있던 곳이라고 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언제 부고가 있었는지 확실히 몰랐던 모양이나 창고의 주춧돌은 일제시기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창평 마을을 둘러싼 수수께끼다. 분명, 금마 왕궁 춘포지역은 기준왕이 내려와 ‘한왕’이라고 칭하며 이곳을 다스렸다고 역사서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나중에 한강 이남의 부족연맹체를 통일했던 백제의 온조왕이 이곳을 점령하기 전까지는 마한백제의 수도였다. 동시에 이곳은 백제 무왕이 천도를 시도했거나 천도했던 지역이라고 돼 있어 어느 말이 사실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또 춘포면의 동북쪽과 맞닿아 있는 금마면 왕궁면은 후백제 견훤이 군사를 주둔하며 왕건에게 항거한 곳이었다 하니 견훤과도 관련 있는 지역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익산지역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지역으로서 대대로 전주시와 함께 호남의 중요한 군사요충지로서의 기능을 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런 관점에서 춘포면을 비롯한 금마, 왕궁 지역에 관한 중국 및 우리나라 사서를 종합해보면, 이곳이 한 시대를 좌우했던 역사적 거점으로 거론된 것은 기준왕이 처음이며, 그 다음이 백제 무왕과 후백제 견훤이다.

관세음응험기에는  어느 시대 인물인지는 모르나 “무강왕武康王”이 금마로 추정되는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제석사를 세웠다고 나와 있고, 왕궁면 왕궁리 유적에서는 현 5층 석탑 부지에서 목탑이 세워졌던 흔적이 발견됐으며, 통일신라시대 때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에서 ‘우리나라에는 유불선이 전래되기 이전에 이런 사상을 모두 담고 있는 독특한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풍류도라 한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서 마한백제의 왕조와 백제의 왕조가 이곳을 경영했던 역사적 사실들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섞여버렸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추정은 추정일 뿐 조선시대 때 예부터 전해오는 고서를 거의 전부 없애버렸고, 일제 강점기 때는 우리가 자주적으로 역사를 고증하지 못하고 왜곡, 날조됐으며, 이런 기초 위에 우리의 역사학이 발전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 토착신앙과 불교 사이에서

이런 상황에서도 특히 눈 여겨 봐야 할 점은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이다.

난랑비 서문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도라 한다. 가르침의 연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적혀 있는데 사실상 그 안에 삼교(유불선)가 다 들어 있어 뭇 생명들을 접하여 감화시킨다. 예를 들어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같고,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교리이며, 악업을 짓지 않고 선행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교화와 같다”고 했다.

여기서 최치원은 당시 선사仙史라는 역사책이 실존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고, 유불선 이전에 우리나라 고유의 사상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글의 맥락으로 보아 아마도 선사仙史라는 것은 우리나라에 유불선이라는 세 종교가 들어오기 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는 “옛 기록(古記)에 적혀 있기를, 환인(제석을 이른다)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제하고자 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불가에서 토착신앙인 제석신, 즉 단군시대의 ‘하늘의 왕’ 환인을 모시는 절, 제석사를 지었다는 건 얼핏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불교가 토착신앙과 결합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라는 고유의 토착신앙 또는 가르침이 나중에 불교가 들어오고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와 섞여 도리천을 다스린다는 제석과 하늘의 왕 환인을 동격으로 묶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금마면 일대가 고조선에서 건너온 기준왕이 세운 마한백제의 왕도王都였고, 제석신앙의 근원이 유불선 이전의 토착신앙이라고 한다면, 금마 왕궁면 일대의 역사적 유산들을 굳이 백제 무왕 때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주민들은 엄연히 외래종교인 불교가 지배했던 삼국시대 보다는 그 이전인 마한백제의 기준왕에 대한 전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올 때 이차돈의 순교사건은 불교가 토착신앙과 깊은 갈등을 겪었다는 점을 시사하며,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세력들은 영토의 합병과 부족국가 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가 필요했을지는 몰라도 민초들은 여전히 토속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 발견된다.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신각이나 명부전, 칠성각, 십왕전 등은 불교가 그 이전의 토착신앙과 융합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금마·왕궁 지역의 주민들을 만나 느꼈던 것은 학자들의 역사연구에서는 백제 무왕의 익산천도 및 경영론을 주로 강조하는 반면, 주민들은 무왕 때보다는 기준왕에 대한 언급을 더 많이 한다는 점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김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