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천도 증명하는 제석사지 터 있는 곳..

불교와 토착신앙 결합된 곳.. 꾸준한 연구조사 이뤄져야

제석사 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궁평(宮平)마을은 그동안 백제에 대해 역사적으로 해결을 보지 못했던 의문점들이 압축된 곳이다.

백제 무왕으로 추정되는 무광왕(武廣王)이 익산 금마로 도읍을 옮기고 궁평마을이 있는 곳에 제석정사帝釋精舍(제석사帝釋寺)라는 절을 지었고, 그동안의 문화유적 발굴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무광왕이 무왕인지, 정말 익산으로 천도를 했는지, 아니면 천도를 하다가 실패했는지, 천도했다면 백제는 언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겨 그곳에서 멸망했는지, 고대왕국의 도읍지에만 있었던 제석사가 왜 이곳에 있는지, 역사적 기록은 왜 거의 남아 있지 않은지, 왜 제석사를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한마디로 익산 땅은 백제의 신비를 간직한 곳이라기보다는 ‘답답함’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몰라 그 사람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궁금해서 답답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구술사 탐방에서도 이런 심정은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 마을에 남아 있는 기억의 파편들

왕궁리는 1913년까지 제석면(帝釋面)이었는데, 일 년 후 행정구역 개편 때 금마군 우북면과 익산군 제석면이 통합돼 왕궁면으로 바뀌었다.

궁평 마을은 왕궁리 유적에서부터 동서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홍성운(70)·이분님(69)씨를 비롯한 여러 주민들로부터 옛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주민들은 이곳에 궁녀(宮女)들이 살아 궁평 마을이 되었고, 특히 후궁들이 많이 살았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의 장독대에서 제석사 목탑의 꼭대기 부분이 발견됐는데, 주민이 경운기로 부여박물관까지 실어다줬다는 말도 했다.

또 마을 우물에서 징이 발견됐는데, 한 번 치면 삼십 리까지 소리가 퍼졌고, 징 소리가 워낙 커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옆에서 풍물을 쳐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게 뺏길까봐 우물 속에 징을 숨겼는데, 도중에 일본인들에게 뺏겼다.

그 후 언제인지 모르지만 다시 찾아왔는데, 어느 샌가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칠월칠석날에는 옆 동네 ‘신정마을’의 큰 깃대가 궁평마을의 깃대에 두 번 절하면 궁평 마을의 깃대가 한 번 절하고 나서 궁평 마을에 두 마을 사람이 모여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한 주민이 담을 쌓다가 금으로 만든 새 모양의 공예품, 즉 금새가 나왔다는데, 누군가가 가져갔다.  

또 이전에는 이곳이 왕궁면이 아니고 제석면帝釋面이었으며, 마을 회관 뒤를 ‘제석뜰’이라고 불렀고, 왕궁리유적이 있는 탑리 마을은 ‘왕금’, 궁평마을은 ‘궁뜰’이라고 했으며, 춘포면 엽동마을은 무기창고, 그 옆 창평마을은 곡식창고였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이 제석사지를 발굴했는데, 아래에 흙을 쌓고 그 위에 목탑을 쌓은 흔적을 발견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의미는 있지만, 기억의 파편에 불과했다. 이것만 갖고는 궁평마을이 간직한 비밀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혹시나 기대했던, 학문적 연구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은 숨어있지 않았다. 

◇ 왕도王都였다는 명확한 증거, 제석사 터

궁평마을에는 백제시대 때 지은 절, 제석정사帝釋精舍, 즉 제석사帝釋寺 터(사적 405호, 1998년)가 있다. 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았고, 탑을 세운 주춧돌과 건물을 세운 흔적, 기와 파편들만 발견됐다.  

이곳이 제석사였다는 두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는 1993년부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와 원광대 박물관, 2007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이곳을 발굴, 조사했는데, 제석사帝釋寺라고 적힌 백제시대 기와를 발견했고, 절이 세워졌다는 명확한 증거를 확보했다. 두 번째는 일본 교토에 있는 절, 청련원靑蓮院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부처의 영험함을 경험한 사건을 적은 글)에서 백제 무광왕武廣王(무왕이라고 추정됨)이 익산 금마로 추정되는 곳으로 도읍을 이전했고, 제석정사帝釋精舍, 즉 제석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두 가지 사실로 미뤄볼 때 이곳은 분명 백제가 지은 절이라는 점과 여러 고대왕국에서 왕실사찰로 제석사를 지었다는 점에서, 분명 제석사는 백제 왕실의 절이었다. 그리고 이곳과 가까운 지점에 왕궁(왕궁리 유적)이 있었다.

관세음응험기는 이렇게 적었다.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密地(익산 금마)로 천도해 새로 정사(精舍)를 지었다(新營精舍). 정관 13년(서기 639년) 기해년 겨울 11월(동짓달) 하늘에 큰 벼락과 비가 내려 제석정사(帝釋精舍)를 불태웠다. 불당과 칠급부도七級浮圖(사리를 묻은 칠층 탑), 낭방廊房(승방.행랑채)까지 모두 타 버렸다. 탑 아래 주춧돌 속에는 종류가 다른 일곱 가지 보물과 부처님 사리가 든 수정병이 있었고, 또 구리로 만든 종이에다 금강반야경을 베껴 옻칠한 나무함에 넣어두었는데, 주춧돌을 들춰보니 남김없이 타버렸다...곧 공양을 시작해 다시 탑을 조성하고 이들을 넣어두었다.” 

관세음응험기가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금마는 백제의 왕도였고, 왕궁리 탑리 마을에는 왕궁이 있었으며, 궁평 마을에는 왕실사찰인 제석사가 있었다.

그렇다면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에는 왜 금마 천도사실이 없고, 만약 무왕 때 익산으로 천도했다면 그의 아들이었던 의자왕 때는 왜 부여에서 멸망했는가. 그 사이 언제 백제는 도읍을 부여로 옮긴 것일까. 혹시 백제는 공주와 부여와 금마에 각각 도읍을 두고 정치적 상황에 따라

왕이 거주했던 것인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옛 문헌에는 아무런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무광왕 때 제석사를 지었다고 했는데, 무왕 때 벼락을 맞아 무너진 것으로 정확한 연대가 적혀 있다. 학계에서는 무왕이 무강왕武康王으로도 불렸다는 점을 들어 무광왕은 무강왕을 잘못 적은 것이며, 따라서 무광왕은 무왕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무왕 때 금마로 천도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광왕이 정말 무왕인지, 혹시 조선 때 세종과 세조의 호칭이 비슷하듯 무광왕과 무강왕은 다른 왕인지도 알 길이 없다.

탑리 마을에 있는 왕궁도 무왕이 세운 것인지, 정식 왕궁이 아닌 행궁인지, 그 이전에 왕궁이나 행궁이 세워졌는데 특히 무왕 때 주로 사용한 것인지, 고려 때 개경(개성)과 서경(평양)이 있었듯, 백제 때 부여와 금마가 이와 비슷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또 관세음응험기에 왜 무광왕이 “새로 정사를 지었다"(新營精舍)고 말했는지도 의문이다.

보통 옛날에 맨 처음 건물을 지을 때는 그냥 “지었다. 세웠다. 창건했다”고 쓰는 게 일반적이며, 허물고 다시 짓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거나 또는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이 있는데 또 다른 기능을 설치할 때 “새로 지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왕 이전에 지었던 제석사를 무왕이 다시 지었다는 것인지, 그 전에 왕실사찰이 있었는데 따로 제석사를 지었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나온 연구결과만 보면, 구체적인 기록 보다는 거의 추측에 의존하기 때문에 의문만 더 깊어진다. 지역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익산시청이나 문화관광체육부, 문화재청이 나서 백제에 대한 정확한 학술조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발굴 조사된 제석사 터의 가람 배치도.

◇ 제석신앙의 핵심지역

어쨌든, 궁평 마을에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시대의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제석사가 있었다는 점은 이곳이 제석신앙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제석신을 모시는 신앙 또는 풍속은 오래전부터 왕실과 민간에 뿌리박혀 있었다.

제석은 원래 불교가 탄생한 인도의 토속신인데, 석가모니를 호위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열 두 개의 하늘 중 동쪽(도리천)을 맡는 신이며 임금님이다. 제석이 있는 궁궐이 제석궁이다.

따라서 궁평은 후궁들이 따로 모여 살았던 곳이 아니라 제석궁의 궁宮자를 써서 궁평이다. 제석이 다스리는 하늘세계가 도리천인데, 제석은 사천왕을 통솔하며 못된 마귀들인 아수라들을 물리치면서 인간세상을 다스리며 보호한다.

하지만 삼국시대 때 불교가 들어오면서 토착신앙과 결부돼 민간신앙으로 확대됐다는 게 통설이다. 이것과 결합한 토착신앙은 단군신앙과 옥황상제를 모시는 도교신앙이다. 단군하느님과

하늘에서 인간을 다스리는 제석신과 모든 하늘을 다스리는 옥황상제가 동일시된 것이다.

제석이 토착신앙과 결합된 이유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토속신앙과 섞이지 않으면 불교가 흡수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실에서는 제석사라는 절을 짓고, 민간에서는 집 부엌에 곡식을 넣은 단지를 놓고 제석신을 모시며 건강, 집안의 안녕, 풍요를 빌었다.

◇ 왜 제석면이 없어졌나

이곳에 백제가 제석사를 짓고 불교를 유포했다는 것은 이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이곳이 단군이나 옥황상제를 비롯한 토착신앙이 강했던 지역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왜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에는 제석사가 없고 이곳에만 있는가를 설명하는 단초다. 특히 이곳은 백제 이전에 마한의 중심지였고, 나중에 백제에 복속됐다는 점에서 백제 이전에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제석면이 없어진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910년 한일합방 후 5년째 되던 해 이곳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제석면에서 왕궁면으로 바뀌었는데, 일제가 우리민족 고유의 토착신앙을 없애기 위해 제석이라는 지명을 없애버린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왕궁은 제석궁에 비해 한참 낮은 세계다.

김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