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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사를 찾아서5. 왕궁면 왕궁리 탑리마을

▲ 옛 왕도 익산의 상징, 궁궐·절터가 있는 곳

‘왕궁은 누가 왜 지었나’ 아직도 수수께끼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탑리 마을 입구.

익산이 옛날에 ‘왕도’(고도古都)였다는 점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탑리 마을에 있는 ‘왕궁리유적지’다. 이곳에는 백제 왕궁 터와 절터가 있다.

지금까지 왕궁리유적지는 20여 년 동안 발굴 조사가 이뤄졌고, 다양한 학술연구결과가 발표됐기 때문에 시민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곳이다.

하지만 구술사口述史 정리는 현지 주민들이 입으로 한 말을 적어 사료로 정리하는 것이고, 왕궁리유적은 미륵사 터와 함께 익산의 고도古都문화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탑리 마을을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과 만나면서 역사적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의미 있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연구조사가 활발히 이뤄지지 않았던 백제문화에 대한 궁금증은 그대로 남았다.

◇ 남매와 탑

탑리마을에서 연세가 지긋하신 김금초씨(78)씨와 김정배(63) 이장을 만나 그동안 마을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한 말들을 들었다.

김씨는 익산 미륵사지 탑과 왕궁유적지 탑은 같은 시기에 쌓았다고 말했다.

두 탑은 남매가 쌓았는데, 미륵사지 탑은 여자가 치마폭에다 돌을 날라 빠르고 높게 쌓았고, 왕궁 탑은 남자가 쌓다보니 늦게 쌓았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매 해 정월 열나흘이 되면 동네 길목 곳곳마다 제사를 지냈다.

특이한 점은 길바닥에 짚으로 열십(十)자를 해놓고 그 뒤에다 제사상을 놓았다는 점이다. 마을 입구와 왕궁 탑 앞에서도 제사를 지냈는데, 왜 짚으로 열십자를 해놨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풍습은 아마도 우리나라 곳곳에서 행해졌던 액막이 행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과 형태는 다르지만 전북 순창군 일부 마을에서는 칠월칠석날 마당에 열십자로 짚을 깔고 그 위에 물을 떠놓고 장수와 건강을 비는 풍습이 있고, 충남 서천군 일대에서는 대보름날 주민 왕래가 잦은 거리에 짚으로 열십자를 만들어놓고 제사를 지내 액운을 막았다. 정읍시 일부 마을에서도 대보름날 짚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태워 액땜을 했다. 이외에도 짚으로 자루를 만들어 냇가의 양쪽을 연결하면 착한 일을 했다 하여 액운을 떨쳤다고 한다.

김씨는 마을앞 논 앞에 돌기둥 두 개가 있는데, 옛날 백제 때 화살터였다고 말했다.

그곳을 기점으로 완주군 삼례읍 쪽으로 활을 쏘았다는 것이다.

마을 위쪽에 있는 금마면에는 사람 모양을 한 인석人石이 있는데,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세워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왕궁 탑을 다시 쌓으면 동네가 망한다는 말이 전해온다고도 했다.

마을 이장 김정배씨도 동네 앞에 있는 논이 ‘화살자리’(화살을 쏘는 자리)라고 했다. 이어 인근의 평장리가 군사훈련장, 동네 뒤 창평리는 군기창고였고, 궁녀들 살아서 궁평리, 신전리는 신하들이 살았다고 해서 신전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또 탑리 마을은 임금이 살았다고 해서 ‘왕금’이라 했다고 말했다.

김 이장은 정월 대보름날 빗자루를 태우며 도깨비를 몰아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했다.

또 이곳을 ‘왕금리’라 했는데, 탑 뒤에서 금이 나와 왕금부락이라고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을 앞 들판을 ‘섬들’이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마을 앞까지 배가 다녔기 때문에 섬돌이며, 제주도의 돌을 배로 실어와 성을 쌓는데 썼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존 발굴조사에서 제주도 현무암이 나왔다는 보고는 없다.

김 이장은 탑리마을의 형세가 말 대가리인데, 왕궁 탑이 대가리를 눌렀기 때문에 주민들이 머리를 못 들었고 출세를 못한다는 얘기도 있다고 전했다. 이곳은 용화산 자락이 내려온 곳이기 때문에 용머리를 말머리로 인식한 것 아닌가 한다.

왕궁을 둘러싼 성터 옆 ‘모질매’에서는 사람이 많이 죽었으며, 때론 맞아 죽기도 했는데, 시체를 성터 바로 밑 패인자리에 묻었다고 한다. 사실 확인을 위해 좀 더 주변 조사가 이뤄져야 할 필요성이 있는 대목이다.

김씨는 특히 미륵사 탑과 왕궁 탑에 대해, 미륵사 탑은 남매 중 누나가 쌓았고 왕궁 탑은 남동생이 쌓았는데, 누나는 치마 폭에 돌을 날라 먼저 쌓았고, 동생은 적삼으로 돌을 날라 늦게 쌓았다고 했다. 당시 탑을 늦게 쌓으면 죽는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려고 딸을 방해했으나 딸이 먼저 쌓아 아들이 먼저 죽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하지만 이 말을 단순한 흥밋거리로만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첫째, 미륵사지 탑과 왕궁리유적지의 탑을 남녀에 비유했다는 것, 둘째는 같은 시기에 쌓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탑을 남녀에 비유한 것은 왕궁 탑이 왕궁 안에 있는 탑으로서 내탑(內塔)을 의미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왕궁리유적지에 사찰이 있었다는 발굴조사 결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왕궁을 건립할 때 사찰도 같이 세웠다는 점을 말해준다. 특히 왕궁리유적지에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5층석탑 부지가 이전에는 목탑 부지였다는 사실로 보아, 당초 왕궁을 세울 때 목탑이 있는 궁내 사찰을 같이 세웠다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따라서 왕궁 탑은 내탑, 왕궁 밖에 있는 미륵사 탑은 외탑外塔으로서 음양의 조화를 이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왕궁 탑과 미륵사 탑이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는 전설은 무왕 때 탑 두 개를 모두 완성했다는 정황증거로 볼 수 있다. 현재 왕궁 탑은 통일신라나 후백제 또는 고려시대 초에 세워졌다는 설이 있으나 어떤 주장도 확실치는 않다. 때문에 남매가 두 탑을 같은 시기에 쌓았다는 전설은 무왕이 이곳 익산을 백제의 수도 또는 별도別都(수도 이외의 지역에 별도로 둔 도읍지)로서 경영했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외에도 탑을 늦게 쌓으면 죽는다는 말은 같은 시기에 탑을 쌓으면서 미륵사 탑을 쌓는 인부들이나 관리, 그리고 왕궁 탑을 쌓는 사람들이 서로 경쟁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다른 추측도 가능하다.

미륵사 탑은 무왕의 왕비인 사택적덕 가문의 딸이 발원해 세워졌기 때문에 남매 중 딸 또는 누님이 쌓았고, 왕궁 탑은 무왕이 익산경영을 위해 왕궁을 세우면서 쌓은 것이고, 무왕이 익산경영을 한창 하고 있을 때 낳은 아들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에 항복해 당나라에서 병으로 죽은 것을 감안하면 아들 또는 남자가 쌓았고 늦게 쌓아 죽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무왕이 큰 아들 의자왕을 낳은 기념으로 왕궁 옆에 절을 짓고 탑을 쌓았을 수도 있다.

탑리 마을에 있는 왕궁리유적지의 모습. 왕궁과 사찰 터가 발굴 됐다. 성벽을 비롯한 대형 화장실과 기와, 토기 파편, 백제식 정원 터와 여러 유물의 발견은 백제 시대에 건축됐다는 의견에도 힘을 실어준다.

◇ 왕궁은 누가 지었을까

탑리 마을을 탐방하며 가장 궁금했던 것은 왕궁리유적지에서 발굴된 왕궁 터, 즉 왕궁은 누가 지었는가이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백제시대에 지었다는 주장이 통설로 받아들여짐과 동시에 통일신라와 고려 때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도 함께 나와 후백제 왕 견훤이 지었다는 설, 고려 태조 왕건이 지었다는 설 등도 나온다.

건물의 공간배치나 성벽, 성축, 대형 화장실, 기와 및 토기 파편, 중국제 청자, 백제식 정원 터 등이 나온 것으로 보아 백제 때 지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또 일본에서 나온 관세음응험기에도 무왕으로 추정되는 무광왕이 익산으로 천도하고 제석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사찰 터에서 나온 기와파편이나 철로 만든 솥 등이 나와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 조선말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신라가 삼국 통일 후 고려 귀족 안승을 왕으로 봉하고 이곳에 금마저金馬渚(지금의 금마·왕궁면 일대)를 두었기 때문에 이때 왕궁이 지어졌다고 한다.

아울러 견훤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에 속했던 왕궁·금마지역인 이곳에서 고려 태조와 맞섰다는 점에서 견훤왕궁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5층석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나온 유물들은 고려 초기 것으로 판명돼 왕건이 세웠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사찰은 궁이 세워진 뒤에 건립됐다는 점과 전체적인 궁성의 양식으로 보아 백제 말기에 건립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무왕이 건립했다고 추정하는 것은 섣부르다.

삼국사기에서 무왕의 아버지로 기록돼 있는 법왕이 왕위에 올라 왕흥사를 짓다가 2년 만에 죽었는데, 무왕이 이를 이어받아 절을 완성하고 미륵사로 명칭을 변경했다는 주장도 있고, 일본의 오오치·도요타 씨의 족보에는 무왕이 법왕의 손자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법왕이 왕궁을 지으면서 미륵사 창건을 시작했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법왕이라는 명칭은 그가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본 기록을 따르면 무왕은 법왕이 손자이기 때문에 법왕이 왕궁과 미륵사 창건을 시작하고 무왕의 아버지(진이왕辰爾王) 때 완성해 무왕 때 천도를 한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그래봐야 불과 50년 정도의 시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한편, 조선조 말에 간행된 익산읍지인 금마지金馬志는 ‘완산의 지리는 마치 개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인데, 태조가 견훤을 몰아내기 위해 개의 꼬리부분인 왕궁리 유적에 탑을 세워야 한다는 도선국사의 말에 따라 태조가 이곳에 탑을 세웠더니 완산(지금의 전주와 익산 왕궁·금마면 일대)의 해가 3일 동안 어두워졌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지어낸 얘기로 보인다. 익산의 왕궁리유적이 있는 탑리 마을과 현재의 전주시, 또는 익산시와 전주시는 하나의 풍수개념으로 다뤄진 적이 없다. 전주시는 별개의 풍수개념으로 행주형 行舟形(배가 보물을 싣고 가는 모양) 명당이라는 주장이 통설이다. 풍수설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남겼다는 유산록에도 익산시 금마면이나 왕궁면의 지세를 ‘개’로 비유한 기록은 없다. 왕궁리유적지는 오히려 금마면의 용화산 자락이 내려온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며, 실제로도 그렇다. 탑리 마을 김정배 이장은 탑이 있는 곳이 옛날에 ‘말머리’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끝까지 항복 하지 않고 버티는 견훤을 물리쳐야 하는 고려 태조 왕건 진영에서는 견훤에 대한 적개심이 깊었을 것이고, 이런 심정에서 아마도 견훤(甄萱)의 견자를 개견(犬)자로 낮춰 불렀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일부 국민들은 북한 사람을 ‘빨갱이’로 낮춰 부르고 있으며, 상대방을 비하할 때 ‘개’라는 말을 붙여 쓴다. 이 점은 풍수적 고찰이 있어야 하겠다.

김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