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가 사랑한 조선 문신 소세양의 신도비

신탄마을은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사연이 많은 곳이다.

첫째는 이곳에 백제의 육로 방어선인 탄현(炭峴)이 있고, 통일신라 후기 후백제의 왕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이 싸웠던 곳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조선시대 때 문신으로서 크게 유명세를 떨친 진주소씨 가문의 소세양 신도비와 소씨 종중의 선산이 이곳에 있다.

옛날 이 지역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사에 대해서는 현재 마을 주민으로부터도 들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다만 이곳은 진주소씨의 선산이 있는 곳으로, 소씨 집안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점만 확인된다.

◇충신 성충   “신라군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신탄마을은 백제인들에게는 슬픈 곳이었다. 이곳은 백제 말기 의자왕 때의 충신 성충이 신라군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던 탄현(炭峴)이 있는 곳이다.

탄현은 신탄마을이 있는 용화산 자락이 여산면의 천호산으로 이어지는 곳인데, 일명  ‘숯고개’라고 한다. 옛날에는 ‘수자리고개’라고 했는데, 이것이 ‘숯고개’가 되고 이를 한자로 적다 보니 숯 탄(炭)자와 고개현(峴)자를 써서 ‘탄현’이라고 했다는 게 통설이다.

‘수자리’는 국경을 지키거나 전선을 방어하는 병사를 이르던 말로, 지킬 수(戍)자를 써서 수자리라고 한다. 따라서 수자리고개 또는 ‘수자리곡’은 병사들이 주둔하며 방어를 했던 곳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2007년 익산문화원이 발행한 ‘익산향토지’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군사가 전주의 견훤 군대를 치기 위해 전주로 가다가 여기에 머물면서 ‘수자리한 곳’, 즉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어서 ‘수실(戍室)’, 또는 ‘수곡(戍谷)’이라고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수실을 꽃 수실로 알고 화곡(花谷)이라고도 하고 ‘수실’을 ‘숯실’로 보아 탄곡(炭谷)이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익산향토지는 또 “화곡은 또 옛날에 ‘굇골’이라고도 불렀다. 꽃의 우리말이 ‘곶’이기 때문에 ‘곶골’이 ‘굇골’이 되고 귀골로도 달리 불렸다. 그런데 원래는 ‘수자리골’에서 바뀐 말이다”고 썼다.

신탄마을에서 만난 주민은 이곳을 ‘쑥고개’라고 했다. 그는 쑥고개가 후백제의 마지막 보루로 이곳이 무너지면서 후백제가 망했다고 말했다. 견훤왕의 아들이 여기서 버티다가 태조 왕건에 패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지는 마을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 같은 민담들은 세대를 거치면서 사실과 다른 얘기가 됐을 가능성이 크며, 이를 바탕으로 마을 이름의 유래를 추정한 익산향토지의 기술도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왜냐하면 후백제 견훤왕 이전부터 탄현이란 이름이 있었고, 수자리골, 수자리고개라는 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려 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 동성왕 때 탄현에 책(柵:적을 방어하는 울타리)을 설치해 신라에 대비했다고 했고, 의자왕 때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백제의 신하였던 흥수라는 사람이 충신 성충의 말을 빌어 “백강(백마강. 금강. 지벌포. 기벌포)과 탄현은 우리 나라의 요로”라면서 “당나라 병사는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수자리골, 숯고개, 즉 탄현은 후백제 견훤왕과 고려태조 왕건 이전부터 백제의 군사요충지였고, 병사들이 주둔하며 이곳을 방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익산향토지가 기록한 태조 왕건과 견훤왕 전투에 대한 일화는 백제가 멸망한 서기 660년 이후부터 후백제가 멸망한 936년까지 무려 276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탄현은 백제의 군사요충지였고, 탄현으로 불렸다는 것을 볼 때 탄현이나 수자리골, 숯고개라는 말은 후백제가 생기기 수백 년 전인 백제 때부터 생긴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탄현이 신라에 대응한 백제 남쪽의 최종 방어선이었다면 상시 군사를 배치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탄현은 백제 때부터 ‘수자리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서는 탄현이 충남 대덕군 동면 마도령(침령)이라는 주장도 있고, 충북 보은의 탄현이라는 설이 있으나 통설은 아니다. 또 당시 백제의 수도가 부여라는 점을 감안할 때 대덕군 마도령이나 보은군의 탄현이 남쪽 방어선이라고 보기 힘들다.

세종 때 출생한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직은 ‘고산의 탄현에서 성충을 생각한다(高山炭峴有懷成忠)’라는 시에서 “대둔산 아래 세 겹의 고개가 있는데, 탄현이 중간에 있어 적을 방비하는 요충지를 이뤘으나, 5만 명의 동쪽병사(신라군)가 쉽게 통과하니 부여의 왕업이 헛일이 되었네..여기서 황산(황산벌. 충남 연산 일대)까지 삼십리 거리인데, 옥중에서 글을 올린 성자(성충)가 가련하구나”라고 썼다. 이 글로 보아 탄현은 지금의 여산면과 왕궁면 사이의 ‘수자리고개’가 맞다고 본다. 당시 백제인들로서는 한이 서린 곳이다. 

마을 주민들은 탄현을 ‘쑥고개’(숯고개가 변화된 말)라고 하며, 후백제의 마지막 보루였다고 말한다. 한 주민은 견훤 아들이 태조 왕건의 군대에 맞서 이곳에서 버텼는데, 여기가 무너지면서 후백제가 망했다고 말하기도 했고, 이곳은 으슥하고 험준해 산적과 강도, 늑대나 여우가 많은 곳으로 지나가기 무서웠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쑥고개의 맥을 끊기 위해 길을 냈다. 이후 포장도로가 났는데 교통사고가 많이 일어났고, 용화산이 대한민국 5대 맥이었는데, 쑥고개를 끊어 기운이 쇠했다는 말도 덧붙인다. 

익산시 왕궁면 신탄마을에 있는 진주 소씨 선산.

이곳에 소세양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황진이가 사랑한 남자, 소세양의 신도비

신도비(神道碑)는 죽은 사람의 평생 행적을 기록해 묘지 앞에 세운 비석이며, 신도(神道)는 죽은 사람의 영혼(귀신)이 간 길, 즉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한다.

1486년 조선 성종 때 태어나 1562년 명종 때 별세한 소세양은 연산군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정승벼슬인 종 1품 좌찬성까지 지낸 조선의 유명한 문신이다. 그러나 송도삼절이자 만인의 연인이었던 황진이 때문일까? 소세양은 유명한 문신이라기보다는 당시 최고의 기생 황진이가 사랑했던 남자로 더 유명하다.

소세양은 황진이에 대한 유명세를 듣고 ‘한 달만 사귀다가 헤어지겠다’고 장담하고는 정말 한 달 후 헤어졌는데, 이때 황진이가 소세양과 술을 마시며 이별가로 지은 시가 유명하다. “달 빛 아래 뜰에는 오동잎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네. 높은 누각은 하늘과 맞닿아 있고, 사람은 취했으나 술잔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 소리와 어우러져 차갑고, 매화는 피리 소리에 젖어 향기로워라. 내일 아침 우리 서로 이별한 뒤에, 사무치는 정은 푸른 물결과 함께 끝없이 흐르리.”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진주 소씨 세천비’. 세천은 대대로 산소를 모시고 사는 곳이다.

소세양은 시를 잘 짓고 송설체를 잘 쓰는 문인으로 이름을 날렸고, 성품이 강직한 선비였다.

세조가 난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시키고 단종의 어머니였던 현덕왕후도 서인으로 폐위됐는데, 중종 때 소세양이 왕에게 건의해 복위됐다. 당시 문사들 중에서 가장 학문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시문을 잘 지어 중국에서도 유명했다고 전한다. 전라도관찰사 때는 왜구침입에 대비하지 못했다고 파면됐고, 다시 복직해 좌찬성(종1품)이 됐으나 인종이 즉위한 뒤 반대파에 밀려 사직했다. 명종이 즉위한 후 좌찬성이 됐는데, 곧 벼슬을 사직하고 익산 금마의 도천리에 들어가 살다가 77세 때 별세, 선산인 신탄마을 용화산 자락에 묻혔다. 문집으로는 양곡집이 있다. 

이 마을은 전통적으로 소씨가 많이 살았는데, 주민들은 지금도 소세양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김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