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황학루·등왕각 본떠 황각동(黃閣洞)으로 지칭한 듯..

“소세양을 사랑한 노참판 딸, 집안 반대로 황각바위서 자결” 전설 내려와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황각동마을(황각리, 황각동.黃閣洞)은 옛적에 익산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마을주민들은 이곳이 조선시대 때 노씨와 황씨가 많이 살던 부자마을이었다고 한다.

경치가 좋아 중국 강남의 3대 명소 중 하나인 ‘황학루(黃鶴樓)’를 본떠 황각마을이라 이름을 지었다는데, 지금은 옛 정취는 온데간데없고, 계곡은 인공적으로 정비됐으며, 옛집과 새집이 엉성하게 들어앉은 모습을 보노라니 비감(悲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왜 황각(黃閣)인가

황각동 마을은 우선 이름이 왜 황각(黃閣)인가 몹시 궁금해진다.

누를 황(黃), 누각 각(閣)자를 썼는데, 왜 그런가 하는 것이다. 

조선 성종 때 펴낸 ‘여지승람’에는 천호산의 한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용화산을 만들고 용화산 자락에 패인 골짜기가 황각동이라고 했다. 

익산문화원이 여러 고서를 참고해 발간한 ‘익산향토지’에는 황각동이란 중국의 동정호(洞庭湖)에 있는 소상8경(瀟相八景)의 하나인 최호(崔灝)가 지은 ‘황학루(黃鶴樓) 시’에 견주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는 착오가 있다.

황학루는 중국 호북성 무한시(武漢市)에 있는 강남 3대 누각 중의 하나다. 동정호에 있는 것은 황학루가 아니라 ‘악양루’다.

‘익산시사’(市史)에는 ‘익산 구지(舊誌)’에 “사철 풍경이 입과 붓으로 다 형용할 수 없어 시인 묵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고, 황각동은 중국에서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황학루에서 취한 명칭”이라고 썼다.

실제로 마을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모정이 있고, 이 뒤에 조그만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한자로 ‘황각동(黃閣洞)’이라고 씌어있다. 언제,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조선 때가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따라서 이곳이 옛날부터 황각동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황학루를 본떠 이름을 지었다면 '황학동'이라 해야 맞는데, 각(閣)자는 왜 넣었을까. 옛 문헌과 주민들의 말로도 연유를 찾을 수 없기에 궁금증이 커진다.

중국에는 장강(양자강) 이남에서 가장 유명한 누각 세 개가 있는데, 앞서 말한 황학루, 강서성 남청시에 있는 등왕각(騰王閣), 호남성 악양시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다. 이 누각들은 전통적으로 좋은 경치를 묘사하는데 자주 인용됐고, 유명한 문호들이 이곳에 와서 시를 지었다. 

따라서 본지는 황각동이란 이름은 황학루의 황, 등왕각의 각(閣)자를 땄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제기해본다.

아무래도 마을 이름을 지은 사람은 이곳 경치가 황학루, 등왕각 못지않다는 자부심이 있었거나 혹은 그곳에 가보고 싶은 간절함을 '황각동'라는 이름으로 드러내지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물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시고 시 한 수 지으면 그게 황학루고 등왕각 아닌가"라는 선비의 유유자적함도 배어 있다. 

황각동 마을 선비들이 전원생활을 즐기며 쉬었던 ‘하서대’

◇ 전원생활 즐겼던 곳

또 하나 궁금한 점은 모정 뒤 널찍한 바위에 ‘하서대(荷鋤臺)’라고 써 있었는데, 향토지를 비롯한 관련 문헌에는 어떤 의미로 이런 이름을 새겼는지 기록하지 않았고, 마을 주민들도 뜻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서(荷鋤)는 호미나 괭이 같은 농기구를 뜻한다.

그런데 이곳에 하서라는 말을 쓴 것은 아마도 옛 중국의 대표적 문호인 당송팔대가들의 시(詩)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당나라 시인 백락천의 '동쪽언덕에 꽃을 심다'(동파종화: 東坡種花)란 시에 "호미 들고 나가서 고랑 손보고(荷鋤仍決渠:하서잉결거)..삽으로 흙 퍼다 땅을 돋우고.."라는 싯구가 있다.

또 당나라 문인이자 남종화의 시조인 왕유의 '위수의 시골집'(위천전가: 渭川田家)이란 시에 "농부는 굉이 메고 돌아오며(田夫荷鋤至: 전부하서지),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에 끝이 없네"라는 싯구가 유명하다.

또 송나라 시인 도연명의 '전원으로 돌아와 지내면서'(귀전원거: 歸田園居)란 시에 "남산 기슭에 콩을 심었네. 달이 떠서야 호미 메고 돌아오는데(帶月荷鋤歸: 대월하서귀)"라는 싯구가 있다.

조선 중종 때 문인 임억령((林億齡)은 '양지바른 곳에 오이를 심었네'(양파종과: 陽坡種瓜)라는 시에 "가랑비에 호미 들고 나서니(細雨荷鋤立: 세우하서립), 조금씩 조금씩 푸른 우비를 적시네"라고 말했다.

이로 보아 널찍한 황각동 하서대 바위는 양반들이나 농부들이 정원이나 밭을 일구면서 쉬는 곳이었거나, 선비들이 전원생활을 하며 안분지족했던 풍류를 '하서대'란 말로 드러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 이곳이 정말 황각동인가

황각동 마을에 들어서서, 씁쓸한 마음 가눌 수 없었다.

우리 조상들이 이곳 경치를 과장했더라도, 그럴만한 풍경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마을에 다가서니 계곡은 하천 정비로 옛 모습이 온데간데없고, 정자가 있을 법한 자리에는 잡초만 자라 있었다. 마을 뒤에서 조상들이 풍류를 즐겼을 법한 자리에는 허름한 모정이 세월을 한탄하는 듯 보였다.

진정 이곳이 “사철 풍경이 입과 붓으로 다 형용할 수 없어 시인 묵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한 곳인가.

또 옛 문헌에는 “황각동에는 높은 산들이 첩첩이 쌓이어 마치 병풍을 펴놓은 듯 둘러 있고 계곡은 굴곡과 기복이 심하고 기암괴석이 곳곳에 산재하여 봄에는 꽃, 가을에는 단풍, 여름에는 구름, 겨울에는 눈의 아름다운 계곡의 모습은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후손들의 잘못인지, 세상이 변한 것인지 비감할 따름이었다.  

다만 한 가지, 객의 심사를 달래주는 장소는 있었다. ‘유상곡수(流觴曲水)’라고 쓰인 바위인데 그 위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유상곡수는 삼월 삼짇날,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시(詩)를 짓는 놀이다. 이 바위는 계곡물이 바위 틈새를 따라 포석정처럼 굽어 흐르게 돼 있는데, 아마도 이곳 선비들은 위쪽에서 술잔을 띄운 다음 아래로 내려올 동안 시를 짓는 놀이를 했을 것이다. 시를 다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셨다. 

◇ 소세양을 사랑한 처녀

이 마을에는 조선 전기 때 있었던 재미있는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온다.

이곳에는 노씨가 많이 살았는데, 참판(종2품) 벼슬을 하고 있는 노씨의 딸이 용화산을 사이에 두고 십리 정도 떨어진 마을에 사는 청년 소세양(蘇世讓)을 사랑했다고 한다. 소세양은 조선의 유명한 문신인데, 황진이와 한 달 간 사귀다가 헤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노참판은 소세양 집안이 가난하다며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소세양은 식년문과에 급제(조선 중종)해 고향으로 축하받으러 내려오는데, 그 처녀가 마을 뒤 ‘황각동’이라고 쓰인 바위에서 소세양의 행차를 바라보다 너무도 억울해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소세양의 할아버지가 참판 보다 높은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 판윤(정2품)을 지냈는데, 아버지가 낮은 벼슬(종5품)을 해서 그랬는지, 소씨 집안이 가난해서 노참판이 혼사를 반대했다는 점이 이상하지만 흥미 있는 얘기임에는 분명하다.                     

김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