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마한시대 부족이 살았다”.. 가운데 있는 큰 마을이라 ‘하나구탱이’

익산시 춘포면 천서리는 안수마을과 담월마을로 이뤄져있는데, 이중 담월마을은 윗담월과 아랫담월이 한 마을을 이룬 곳다.

담월潭月은 동서 양쪽에 흐르는 하천 가운데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금마면 옥룡천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감아 내려오는 익산천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춘포면 신동리에서 시작해 서남쪽으로 흐르는 목천포천이 있다.

담월마을은 학이 날아오르는 형국이고, 안수마을은 모래밭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지세(평사낙안)이라, 예로부터 매우 좋은 땅으로 불리는데, 마을 앞으로는 삼례가 가깝고, 남쪽으로는 백리 가까이 떨어진 전주 모악산이 앞산처럼 다정하게 보이며, 고덕산과 만덕산은 물론, 동쪽 완주군의 옥녀봉과 봉실산, 안수산, 수양산 등이 화폭처럼 펼쳐져 있어 매우 아름답다. 옛날에는 전주천과 삼례천이 만나는 만경강에 돛단배 오가는 모습이 익산 12경의 하나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곳의 옛날 이름은 담월이 아니라 '다멀', 즉 다물多勿이었고, '달배미(달처럼 생긴 논), '왕달배미', '못다리'(물이 고이는 논)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옛 이름 '다물'은 '달배미'와는 전혀 다른 이름이라, 다물이 무슨 뜻이고, 누가, 언제, 왜 붙였는지 알 수가 없다. 마을 주민들의 말을 듣고 역사를 더듬어봤다.

◇ 마한시대 부족이 살았던 곳

원래 천서리 담월潭月 마을은 춘포면 소속이 아니었고, 조선 후기 익산군 두촌면豆寸面에 속했다. 1914년 일제 때 행정구역을 바꾸면서 춘포면으로 흡수됐다. 당시에는 창평리 천동리 천서리 신동리 오산리도 두촌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춘포면 소재지보다는 팔봉동이나 덕기동, 석암동, 왕궁면에 더 가깝다. 쌀 수탈이 심했던 일제가, 수로를 따라 농지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 춘포면으로 묶어버린 것뿐이다.

이곳에서 신형묵(85), 김도수(81), 최한규(77), 신동헌(54)씨를 만나 마을의 내력을 들었다.

주민들은 1972년 담월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 이곳에 '기와집골'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논밭으로 만들어 흔적이 없어졌지만 농지를 일굴 때는 기왓장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마을 앞 익산천은 제방이 생기기 전에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다녔고, 건넛마을에 가려면 쪽배를 탔다. 제방이 생긴 후 개펄이 농지로 간척되면서 지금의 담월마을이 생겼고, 농지가 많으니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됐다. 이들은 담월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 많을 다多, 만물 물物자를 써서 “다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제 때는 윗마을을 상다上多(윗다물), 아랫마을을 하다下多(아랫다물)라고 해서 상하다上下多마을이라고 불렀고, 한편으로 상다마을을 다물, 하다마을을 통골이라 불렀다고 했다. 지금은 다물과 통골이 합쳐져 ‘담월’이라는 마을이 됐다. 

담월마을 당산나무 

마을 뒤에는 오래된 느티니무가 있어 절기에 맞춰 굿을 하고 제사를 지내며 풍물을 치기도 했다.

주민들은 느티나무를 보고 점을 쳤는데, 밑에서부터 잎사귀가 나면 봄에 비가 많이 오고, 위에서부터 잎이 나면 가을에 비가 많이 오며, 위 아래 고르게 나면 풍년 든다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도 아름드리 나무는 위풍당당하게 마을을 지킨다.

신동헌씨는 동네에 ‘왕달배미’, 물이 많이 나서 ‘수렁배미’, 또는 ‘배마촌배미’라고도 부른 논이 있었는데, 이곳에 달빛이 비쳐 담월이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최한규씨는 “여기에 마한시대 때 한 부족이 살았는데, 옛날에는 두촌면이었다. 통골이라는 곳은 이곳이 소가 누운 형세라 소죽통 같다고 해서 통골이라고 했다. 또 우리 마을 가운데를 ‘하나구탱이’라고 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터라는 뜻이다”고 설말했다.

여기서 구탱이는 귀퉁이나 모퉁이라는 뜻이고 하나는 ‘한’, 즉 크거나 가운데라는 말이므로 하나구탱이는 ‘한 귀퉁이’, ‘가운데 마을’, ‘큰 마을’ 정도로 해석된다. 또 다물의 물자도 만물 물物이 아닌 말 물勿자다. 

일제 때는 춘포면 춘포리(대장촌리)에 일본인 지주의 농장이 있었고, 주변 마을에는 '사암'이라는 직원을 한 명씩 두고 관리하고 있었는데, “최고 악질”이었다고 한다.

“사엄이라는 것이 일본 놈들 심부름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일개 부락에 하나씩 주둔하고 살았지. 우리 농민들 피 빨아다 바쳤어. 사엄 집은 곳간에 갈비짝이 썩어서 나간다 이거여. 그만치 사기를 처먹었어. 조선 놈이 조선 땅을.”

여기서 사암은 '사음舍音'을 말하는 것으로, 지주를 대신해 소작지를 관리하는 중간관리자(마름)인데, 일제 때 농장에 딸린 직원이었다.

담얼마을의 '하나구탱이', 마을 가운데라는 뜻이다.

1872년 익산군지도에 '다물'이라는 지형이 적혀있다.

◇ 향토지로 본 담월

2006년 펴낸 익산향토지에 천서리를 설명한 기록에는 “1872년 익산군 지도에 천서리 안수(안천)마을은 명확히 나와 있으나 분명 담월은 없다. 단지 비슷한 지명으로는 다물多勿이 있다. 이를 통해 보면 담월은 다물이라고도 했고, 여기서 ‘윗다멀’, ‘아랫다물’로 불리는 ‘상하다上下多’라는 지명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04년 세워진 담월마을 건립비에는 마한시대 한 부족 마을인 ‘다물’에서 일제 때 ‘상하다’로 바뀌었다고 기록돼 있음이 매우 인상적이다. 과연 마한부족의 하나 즉 다물과 관련을 갖는지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또 “이곳 담월에는 사창社倉(조선시대 각 지방의 촌락에 설치한 곡물대여 기관. 봄에 곡식을 꾸어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둬들였다.)이 있어 창평리의 창평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니면 조선 후기 이곳의 사창은 어떠했는지 추후 연구가 진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익산군과 이리시가 익산시로 통합된 후 익산시가 편찬(2001년)한 ‘익산시사’에 따르면 “천서리는 1914년 안천리, 상다리, 하다리와 신기, 수양동의 일부로 구성됐다. 익산천(옥룡천)의 서쪽이라 해서 천서리다. 담월(다멀), 상다(윗다멀), 하다(아랫다멀)의 다멀은 전에 마을 앞에 ‘왕달배미’라는 반달처럼 생긴 큰 논이 있어 ‘달배미마을’이라는 뜻으로 '달말'이라 하던 것이 '다멀'이 됐다고 한다”고 돼 있다.

◇ 고조선의 정신을 간직한 곳 익산향토지와 익산시지의 내용이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우선 고려돼야 할 것은 1872년 작성된 익산군지도에 ‘다물多勿’이라는 지명이 분명히 적혀 있고, 주민들도 마한시대의 한 부족이 살았던 마을이라고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역사를 제대로 짚으려면 상고시대로 넘어가야 할 듯하다.

옛날 이곳은 마한 땅이었는데,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마한에 54개국이 있었

다고 쓰여 있다.

역시 중국 사서인 '후한서' 동이전 한조편에는 조선(고조선) 준왕(기준왕)이 위만에게 패하여 무리 수천을 이끌고 바닷길로 달아나 마한을 처 이기고 한왕이라 했다'고 적혀 있고,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위만이 조선을 치니, 준왕이 궁인과 좌우사람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했다'고 되어 있다.

동국통감에는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뺏기고 좌우궁인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닷길로 한韓 땅 금마군金馬郡(지금의 익산)에 가 살면서 자신이 한왕이라 했다'고 돼 있다.

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금마군은 본래 마한국'이라고 했다.

따라서 현재 금마면, 왕궁면, 춘포면을 비롯한 익산시 동북쪽과 남서쪽은 기준왕의 세력권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천서리 담월마을의 옛 이름이 고구려의 국시인 '다물多勿'과 같고, 마을 주민들도 마한의 한 부족이 살았던 마을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마을 이름은 담월이 아닌 다물이 맞고, 다물의 원래 뜻으로 보아 기준왕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다물多勿이란 '되 물린다', '되찾는다', '되돌려 놓는다'로 해석되는데, 옛 영토를 회복한다는 뜻이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중국사서 자치통감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내세웠다는 말이 있다. 또 그 이전 고조선에서도 다물이라는 칭호를 가진 단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또 일설에 의하면, 다물은 고구려에서 뻗어 나온 백제 고이왕과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이어받았다고 한다.

아울러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라 했고, 조선이 북진정책을 추진하다 포기한 점도 다물과 연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다물'이라는 말은 잃어버린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매우 일반적으로 쓰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금마군에 속했던 춘포면 천서리 담월 마을은 잃어 버린 땅을 찾아야 할 세력들이 거쳐 간 곳이었다.

기준왕은 위만에게 쫓겨 이곳으로 왔는데, 그에게 옛 고조선 땅은 다시 찾아와야할 영토였다. 그래서 '다물'은 당시 춘포면 천서리 담월마을에 살았던 마한 부족의 염원이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잠시 당나라가 이곳을 다스렸고, 신라와 당나라가 싸우게 되자 신라는 검모잠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 부응운동을 하고 있던 고구려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을 끌어다 이곳 금마저를 보덕국이라 칭하고 왕으로 삼아 당나라군에 맞서게 했다. 이후 당나라가 물러가고 안승의 보덕국이 점차 안정을 찾게 되자 신라는 안승을 소환해버린다. 따라서 안승은 고구려 땅을 찾아야 하는 입장에서 '다물'을 외치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결국 신라에 병합된 금마저는 후삼국 시대에 이르러 전주와 함께 후백제 견훤의 강력한 토대가 된다.

이때 이곳 사람들은 옛 백제의 영광과 영토를 회복해 줄 것을 견훤에게 요청했는데, 이때도 '다물'이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이었다. 하지만 견훤은 금마에서 여산으로 넘어가는 탄현고개에서 왕건에게 패배하고 만다.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익산 땅 특히 금마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기준왕의 마한세력과 백제인 및 후백제인의 한이 서린 곳이라고 봐야 한다. 기준왕은 후사가 없이 죽었다지만, 그와 함께 건너온 수천 명의 고조선 사람들은 살아남아 이 땅에 자손을 퍼뜨렸을 것이다. 담월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옛날 마한의 한 부족이 살던 마을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은 우연일까?

김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