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보수공사 중 1층 탑신부와 기단부에서 사리장엄 대 발견, 학계의 큰 관심

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전시 중,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볼 수 없어 아쉬움 커

백제 무왕이 익산에 남긴 강렬한 흔적인 왕궁리유적. 20년이 넘도록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궁궐 건물과 성곽 등의 건물윤곽이 드러나며 찬란한 백제 문화유산이 눈부신 빛을 내고 있다. 왕궁리유적은 현재도 활발하게 발굴이 진행 중이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문화재 발굴조사 중 전무후무한 역사로 기록될 정도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그런 왕궁리유적 발굴현장 한가운데에 천사백년 동안 궁궐을 지켜왔으며 수십 년의 발굴과정 또한 지켜보고 있는 왕궁리오층석탑이 있다. 기실 거의 땅 속의 흔적들뿐인 유적지에서 유일하게 번듯이 서있는 석탑은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하지만 백제의 단아하면서도 조화로운 미적 감각이 잘 나타나 있는 이 석탑 안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리장엄구가 나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너무 오래된 탓도 있겠지만 왕궁리유적전시관 어디에서도 그 화려한 유물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륵사지석탑의 사리장엄 발견보다 앞선 대발견이었던 왕궁탑 사리장엄. 볼거리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왕궁리유적지에서 다시금 감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충분한 고도 익산의 아름다운 보물이다.

◇  1965년 겨울의 왕궁탑

1965년 12월 5일의 왕궁리오층석탑 해체보수 현장은 여느 날과 다른 긴장감이 맴돌았다. 현장 인부들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현장 총지휘를 맡은 당대 최고 드잡이공(전통문화재 수리 전문가) 김천석씨의 이마에는 매서운 북풍에도 불구하고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입회한 사람들도 추위에 아랑곳 않고 이제 막 지붕돌이 해체되는 왕궁탑 1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1층 탑신(塔身)부를 덮고 있던 판석을 안전하게 들어내자 겨울 햇빛을 받은 탑신의 상면에 두 개의 구멍이 드러나며 눈앞에 천년의 시간을 뛰어 넘은 사리장엄이 나타난 것이다. 동서로 뚫린 사각형의 구멍엔 세월이 무상하게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사리병과 금판경(金版經) 등이 나왔고 이는 추위를 잊게 할 만한 대발견이였다.

해체 현장은 탄력을 받아 활기차고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리고 다시 5일 후 또다시 전 국민의 관심이 왕궁탑 해체 현장에 모아지게 된다. 1층 탑신부를 해체하여 기단부 심초석(心礎石:가장 중앙에 놓여있는 주춧돌)이 드러나고 그 안에서 다시 놀라운 유물들이 나온 것이다. 심초석에는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 청동방울, 목향 등이 나왔다. 왕궁리오층석탑과 함께 왕궁리유적의 가치를 높이 세우고 문화도시 고도 익산의 초석이 된 발굴역사의 쾌거였다.

◇ 왕궁탑의 비밀

왕궁탑은 60년대에 이르러 기울어짐이 뚜렷하게 나타나 해체보수가 전격 결정됐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현대적 기술이 부족해 밧줄과 통나무 비계(飛階)를 이용한 전통방식으로 이뤄졌다. 공사기간도 1965년 11월 하순부터 이듬해 5월까지로 6개월여밖에 되지 않는 초단기간이다. 미륵사지석탑의 해체복원이 10년 넘게 걸리는 현재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공사였다. 그 와중에 탑의 1층 탑신부와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왕궁리유적이나 탑의 건립연대를 비롯한 여러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서 가치가 컸다.

1965년 12월 29일자 경향신문의 보도에서는 왕궁탑의 사리장엄 발견에 대해 ‘보물 제 44호로 지정돼있는 귀중한 석탑이지만 쓸쓸하게 서 있는 배경불명의 석탑에서 국보감인 사리장치와 순금판의 경전이 나타난 것은 기적적인 출현’이라고 쓰고 있다. 당시 왕궁탑의 사리장엄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사리장엄이 나오기 전의 왕궁탑은 어떤 연구나 보호 없이 쓸쓸하게 허물어져가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리장엄구는 탑을 건립하거나 중수할 때 탑 안에 넣는데 이들은 탑의 건립과 보수의 연도, 건립주체는 물론이고 학문, 풍속, 생활, 종교, 사상 등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왕궁탑에서 나온 사리장엄 일체의 유물도 베일에 싸여있던 왕궁리유적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는 중요한 정보원인 것이다.

◇ 신비로움을 남기고

왕궁탑 사리장엄구는 1층 탑신부에서 발견된 사리병과 금판경, 그것을 담은 내외 사리함(舍利函)과 기단부 심초석에서 발견된 금동불상, 청동방울, 철편 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향목(香木)과 실에 꿴 유리구슬 등도 고루 발견됐다.

녹색유리로 만든 사리병은 동쪽 구멍에서 나온 사리함 속에 들어있었는데 길쭉한 목을 하고 있는 물방울 모양으로 순금으로 만든 연꽃 모양 마개가 있으며 연꽃 대좌(臺座)위에 놓여 있다. 허나 사리병 안에는 들어 있어야 할 사리가 없어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없이 봉안(奉安:받들어 모시다)된 형식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리함은 내외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외함은 청동, 내함은 금동이다. 외함과 달리 내함을 금동으로 만든 것은 귀중한 사리를 직접 담는 부위이기 때문이고 또 외함도 안쪽에 금도금을 해 사리에 대한 경외감을 표시했다.

서쪽 구멍에서 나온 금판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을 19개의 금판에 새긴 것으로 각 판은 경첩으로 연결하여 접고 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또한 금제 띠를 만들어 경판을 묶어 둘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 19번째 판을 제외한 모든 판에는 글자를 17행씩 배치했고 각 행마다 17자씩 배치했다. 글자는 금판에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명확한 방법은 아직까지 알 수 없지만 글자를 새긴 목판을 밑에 두고 위에서 눌러 찍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일종의 인쇄술로서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함께 고도로 발달된 인쇄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사리병이나 금판경을 비롯한 사리장엄구 일체가 제작된 연대는 약 9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사리함의 문양이 통일신라 사리함과 비교해 화려함이 덜하고 사리병의 목이 긴 것은 고려시대 초기의 양상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판경의 서체는 해서(楷書)체로서 삼국시대 서체보다 정돈된 서체이고 해인사, 화엄사에서 볼 수 있는 9세기 말의 서체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신(佛身)·좌대(座臺)·광배(光背)로 이뤄진 금동불입상의 경우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 비해 비례나 양식이 형식적으로 나타나 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 왕궁탑 사리장엄을 탑의 품으로

왕궁리유적 현장에는 그동안의 발굴 성과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유적전시관을 열고 방문객들에게 찬란한 백제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전체적인 발굴 현황에서부터 수부(首部)명 기와, 인장와(印章瓦), 연화문수막새 등 기와유물을 비롯해 공방터 유물, 각종 토기제품, 화장실 유적, 정원 유적 등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각종 영상을 상영하고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해놓아 왕궁리유적을 찾는 사람들에게 고도(古都) 익산의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왕궁리유적 발굴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유물중 하나인 왕궁리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전시관에서 볼 수 없다. 1965년 발견된 이들 유물은 국립박물관이 없는 익산에서 소장하지 못하고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가야 만날 수 있어 왕궁리유적전시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사람들이 유적지를 찾는 것은 박물관 관람과는 다른, 실제 현장에서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왕궁탑 사리장엄을 왕궁리유적지에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최근 미륵사지석탑의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미륵사지석탑의 사리장엄도 마찬가지다. 현재 대전시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왕궁탑 사리장엄처럼 익산에서 나온 역사적 가치 있는 유물을 타지에서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 자체로 제 자리에 위치해 있는 역사적 의미를 위해, 또 미륵사지를 찾고 왕궁리유적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들 유물들이 하루빨리 제자리에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정완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