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산 고개 오르기 전 쉬어가던 곳, 큰 재·작은 재 산길 흔적만 남아

 누항성치는 석회암이라 물이 새 누항(漏項), 천호산성 있어 성치(城峙)

여산면은 동쪽에 천호산, 남서쪽엔 용화산과 미륵산, 낭산산이 있어 분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면 가운데로는 여산천이 흐르며, 좌우에는 넓은 평야가 있어 풍요롭다. 가히 한 고을이 될 만한 곳이며,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거점이다. 그래서 백제와 신라, 고려 때는 현청이 있었고, 조선 초기에도 현청이 있다가 나중에 부(府)로 승격됐다. 고종 때 군으로 한 단계 내려앉았는데, 그래도 현 보다는 큰 고을이었다. 일제 때 행정구역을 바꾸면서 면으로 내려왔고 익산군에 편입됐다. 물은 툭 터진 북쪽으로 흘러 강경천과 합류해 금강 서쪽으로 빠지고 강경천과 금강은 익산과 논산, 익산과 부여의 경계이자 전북과 충남의 경계를 이룬다.

전북지역 내에서 여산면은 천호산을 가운데에 놓고 완주군과 이웃한다.

여산면 태성리는 여산에서 완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이곳에서 관연마을 신승식(55)씨와 이름을 대지 않은 주민 2명, 관연마을 옆 노동마을에 사는 장정연(95)씨를 만나 흘러간 얘기를 들었다.

◇ 천호산 고개 높아 숨이 가빠 ‘가쁘네’

천호산 자락의 여산면 태성리 관연冠淵마을은 우리나라 지명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지금이야 한자가 아닌 우리말로 이름을 지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반드시 공식적인 이름으로 기록되기 위해서는 한자로 써야만 했다.

관연마을은 갓 관冠에 못 연淵자다. 갓과 연못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이런 일이 생겼다.

관연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이곳을 ‘가뿌네’라고 불렀다.

옛날 길이 뚫리지 않았을 때 이곳은 여산장을 보고 완주군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장을 본 사람들은 천호산 고개를 넘기 전에 반드시 이곳에서 쉬어갔는데, 재를 넘으려면 숨이 가쁘기 때문에 ‘가뿌네’였다.

천호산을 넘으면 완주군 화산면과 고산면 비봉면을 거쳐 봉동읍으로, 경천면을 거쳐 운주면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여산장이 서는 날이면 항상 오가는 사람들로 동네가 북적거렸다.

그런데 ‘가뿌네’가 나중에 ‘가쁜내’ 혹은 ‘갓부네’, ‘갓분내’ 또는 ‘갓뿐내’, ‘가쁜내’로 변했고, 이것이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갓을 뜻하는 한자 관冠과, ‘네’와 ‘내’, 즉 물이나 연못을 뜻하는 연淵을 써서 관연이 된 것이다. 관연마을 저수지는 이후에 생겼다.

그래서 ‘가뿌네’ 마을은 주민들의 삶과 문화, 역사와 풍토성이 없어진 관연이란 곳으로 변해버렸다. 따라서 말은 생명력을 잃었고, 그저 문서에 기록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가 돼버렸다.

가뿌네 마을을 거쳐 천호산 너머 완주군에 닿으려면 큰 재와 작은 재를 넘어야만 했다. 재넘이길은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 산자락이 시작되는 곳에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왼쪽은 큰재넘이길, 오른쪽은 작은재 넘이길이었다. 

완주군 사람들은 여산면 소재지에서 장을 보고 걸어오다가 관연 마을 입구나 재넘이길 앞에서 쉬어갔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 여산장에서 교창삼거리를 지나 여산향교가 있는 교동마을을 거쳐 가뿌네(관연)까지는 십리. 짐이 무거운 사람은 마을 입구에 있는 '태성삼거리'서 쉬고, 기운 있는 사람은 마을로 들어와 재를 넘기 전에 쉬었다. 태성리 관연마을을 찾았을 때 태성삼거리에는 '태성가든'이 주막을 대신하고 있었고, 재넘이길 초입에 있었던 오막살이 주막집은 비바람에 흩어져 황량하고 허무했다.

사람의 마음은 길을 내고, 길은 사람의 마음을 이끈다. 억지로야 산길을 왜 못 오르겠냐만, 길이 끊겨서 마음이 슬픈 곳이다.

당시 완주군 사람들은 여기서 물이라도 한 잔 먹어야, 막걸리 한 잔이라도 걸쳐야 큰 재, 작은 재를 넘어갈 수 있었다.

십리나 되는 재를 넘으면 성치·누항마을이 나온다. 관연마을에서 볼 때 성치마을은 천호동굴이 끝나는 곳인데, 성치마을 주민들 입장에서는 천호동굴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천호동굴은 관연과 성치를 이을만큼 길게 산속으로 뻗어 있다. 누항에서 조금만 더 가면 화산과 비봉, 고산과 경천에 닿는다.

고산 사람들이 재 넘기 전에 이곳에서 많이 쉬었다. 완주군 고산면은 원래 감으로 유명했다. 여편네들이 감을 팔기 위해 연시나 홍시를 광주리에 담아 여산장으로 많이들 몰려갔다. 팔 수 있는 것이면 무조건 이고 지고 갔다. 관연마을 어린이들은 이들이 마을 앞을 지나갈 때면 으레 “감 하나 주세요”라고 졸랐는데, 선뜻 내 줄 리 없었다. 고산서 이곳까지는 적게 잡아도 이십 리 길. 이 먼 곳까지 머리에 이고 왔는데, 아이들 주전부리로 감을 내 주기에는 아까웠을 터였다.

"심술궂은 아이들은 길에다 줄을 이렇게 매놔요. 그러면 아지매들이 홀딱 넘어져요, 허허허. 그러면 홍시가 길가에 떨어져 깨지죠. 그러면 아이들이 '깨진 건 먹어도 되죠?' 하면, '그래 먹어라', 그러면 먹고 그러던 기억이 있어요." 신승식씨는 회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여산장에는 꽤나 큰 소시장(우시장)이 섰는데, 소를 많이 키우던 완주군 화산·고산 사람들이 여산장에 바쁘게 드나들었다.

"여산장에 팔려고 소를 많이 끌고 왔어요. 그런데 이리 다녔거든. 지금이야 포장돼 큰 길이 됐지만, 그 전에는 이 길이 (여산장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어요." 신 씨가 마을 안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길목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소 끌고 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우물가를 거쳐 가야 했다.

하지만 이곳은 물 긷는 마을 아낙네들이 자주 오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 마을 여자들이 물을 길러 저쪽(우물가)으로 가요. 그런데 소를 끌고 오면 그 앞을 못 지나가요. ‘소 지나갈 때 길 끊는 게 아니다’ 해 갖고. ‘여자가 길을 끊으면 재수 없다’고 막 그래가지고 소를 끌고 지나갈 때는 물동이를 이고 그냥 있어야 돼요. (만약) 그 앞을 지가나면 어우! 대단한 난리가 났어요. ‘여자가 재수 없이 길 끊는다’고 해 가지고. 아무리 물동이가 무거워도 그냥 이고 있어야지 통과를 못해요.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그랬습니다. 그게 굉장히 심했어요.”

왜 그랬을까? 여자가 물동이를 이고 소 앞을 지나가면 왜 재수가 없었을까?

아마도 여성은 남성의 집중력을 흐리기 때문일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 소 값을 흥정해 좋은 값을 받아내야 하는데, 외간남자가 모르는 여성을 보면 시각적으로 성적 호기심이 일어난다. 즉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딴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일이 잘 안되면 남성들은 여성 탓으로 돌린다. 소 값을 싸게 받으면 “아까 소 앞을 지나가던 여자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투덜댔을 것이다.

이는 남성 스스로 성적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기 때문인데, 남성들 사이에서는 꿈에 여성에게 유혹 당하면 재수 없다는 말이 있다.

꿈 해몽가들 사이에서도 꿈에 남성이 화끈하게 여성과 일을 치르거나 성적 만족도를 얻으면 좋지만, 여운이 남으면 좋은 꿈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문명사에서 남녀의 성관계가 금기시되고 더럽게 치부된 이유 중 하나로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가장 금기시’하는 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깊이 원하기 때문에 이뤄지지 않으면 심리적 고통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금기시함으로써 근원적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다.

천호산이 깊다보니 골짜기에 산적들이 들끓었던 모양이다.

관연마을을 지나 천호산 자락을 타고 오리 정도 올라가면 ‘도둑놈 잔치골’이 있다.

이곳은 산에 있지만 주변 지역보다 푹 팬 곳인데, 옛날 도둑놈들이 소나 돼지를 훔쳐다가 잡아먹으면서 잔치를 벌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얼마나 세가 컸던지 여산 관아에서도 어쩌지를 못하고, 고산관아나 화산관아는 원채 멀었기 때문에 신경도 못 썼던 모양이에요. 도둑놈들이 소를 훔쳐다가 삼일간이나 잔치를 벌였더랍니다. 지금도 거기 가면 푹 파여 가지고 도둑들이 잔치를 했다고 해서 도둑놈 잔치골이라고 하는 골짜기가 있어요.”

산적 떼는 조선 말기에 더 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른 바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못 이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도 삼정의 문란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조정에서 벼슬을 돈 주고 팔았기 때문에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은 당연한 것이었다. 삶터를 떠나 유랑한 백성들의 일부는 산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물이 새는 목, 누항성치

천호산 일부가 석회암질로 돼 있어 천호동굴이 있고,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곳도 석회암이 깔려 있는지라 비가 오면 바로 물이 빠졌다.

관연마을을 지나 작은 재를 넘으면 성치마을과 누항마을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둘을 합쳐서 누항성치라고 하며, 누항은 셀 누漏, 목 항項 자를 쓴다.

누항은 원래 ‘새는 목’이었다. ‘세목’, ‘시여목’이라고 불렀는데, 사람이 물을 마시면 목구멍으로 새어 들어가듯, 비가 오면 땅속으로 바로 스며든다는 뜻이다. 새는 목을 한자로 표기해 누항이 됐다. 

익산향토지에는 “시여목(새는 목)에 괸 물이 자하로 스며 흘러 호산리로 새어 나갔다. 호산리에서는 물이 솟는 출구를 ‘바람구멍’이라 하며,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겨울에는 반대로 따뜻한 바람이 나온다고 한다”고 적혀 있다. 아직도 천호동굴이 끝나는 곳에서는 물과 바람이 나오는데, 현재 동굴의 출구는 방문객들의 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물과 바람은 산자락 뒤에서 앞으로 나오지만 사람은 앞으로 들어가 뒤로 나온다. 

관연마을에서 작은 재를 넘으면 천호산성이 있는 성치城峙 마을과 누항마을이 나오는데, 성치城峙는 성이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산성은 백제와 신라가 싸울 때 쌓은 것이라고 한다.   

김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