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건설에 적당한 천혜의 자연환경 여건 갖춰.. 신석기시대 흔적도 다수 발견

백제문화 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익산은 한국의 고대사(古代史)에 있어서 그 위상이 높음에도 그동안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한 사서(史書)에 제대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지금도 익산이라는 도시가 고대문화도시가 아니라 호남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발달한 신흥 도시라고 여겨지고 있는 것은 그러한 문화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문화도시로서의 자긍심을 일깨우지 못한 후대의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늦었지만 수십 년 동안 발굴조사와 연구가 행해진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제석사지 등의 백제문화 유적에서 최초, 최대, 최고(最古)라는 수식어가 붙는 다양한 문화재가 알려지면서 익산이라는 도시가 고대문화의 중심지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화려한 백제문화의 중심지였던 익산의 더 먼 과거는 어떠했을까. 백제라는 국가가 등장하기 전부터 익산은 마한(馬韓)을 비롯한 다수 소국(小國)의 도읍지로 경영돼왔으며 그보다 멀리는 금강유역청동기문화권의 중심지로, 나아가 신석기와 구석기에까지 이르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장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익산시 곳곳에서 발견된 청동기문화는 익산에서 백제의 화려한 문화가 꽃피게 된 원동력이며 지리적으로도 국가 경영의 기반을 갖춘 익산을 재조명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 지리, 경제, 군사 삼박자 갖춘 익산

역사적으로 도읍지였던 고구려의 평양, 고려의 개성, 조선의 한양 등이 일국의 수도로 성장했던 이유는 바로 그 지역들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경제적, 군사적 이점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익산은 타 도읍지와 마찬가지로 삼박자를 모두 갖춘 도읍지의 ‘명당’이라고 할 만하다.

전라북도 서북단에 위치한 익산은 노령산맥의 지맥인 미륵산과 천호산 등의 험준한 산이 동부에 위치하고, 함라산 주변에서부터 남서로 향하는 구릉과 대소 하천 등으로 형성된 비옥한 평야가 자리해 일찍이 농업생산력이 가장 높았던 곳 중 하나다. 또 북서쪽으로는 금강을, 서쪽으로는 옥구평야 넘어 서해가, 남쪽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전주와 김제와 접하며 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요새의 요건도 만족한다.

금마면 미륵산을 중심으로 옥룡천과 부상천이 흘러내려 지금의 춘포면 일대와 왕궁리유적 일원까지 배가 드나들었을 정도로 뱃길을 이용한 교통이 편리했으며 금강과 만경강이 둘러싸고 있고 북쪽과 동쪽은 미륵산과 천호산에 미륵산성, 낭산산성, 용화산성, 천호산성 등 중요 성을 집중적으로 쌓았다는 점에서 군사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익산이 교통과 군사, 산업상 최적의 요건을 갖춘 지역이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여타 중심지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문화 중심지로 성장, 청동기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 도심에서 만나는 청동기 유적

백제시대 이전부터 익산은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로 청동기문화유적이 산재해있다.

과거 익산의 중심지는 금마면 일대였다. 해발고도가 낮았던 현 도심지는 과거의 해수면을 예상했을 때 대부분 습지가 차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금마와 가까운 부송동과 영등동 일부는 바닷가이거나 수변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등동과 부송동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 흔적은 그런 지리적 이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익산시 궁동로 57호에 위치한 영등시민공원 안에는 지난 2005년 5월 익산시 향토유적 제 1호로 지정된 영등동유적이 자리해 있다. 얕은 언덕으로 보이는 이 유적은 영등동에서 발견된 총 24기에 달하는 청동기시대 집자리 흔적 중 5기의 집터로, 90년대 영등동 택지개발 과정에서 발견됐다.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이 유적에 대해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청동기시대의 장방형 집터 3기와 원형집터 2기 등의 집자리와 각종 유물을 수습했으며 이 중 1기의 장방형 집터가 지금의 자리에 있었고 나머지 4기는 주변지역에서 이전해온 것이다.

부송동 유적은 현재 미소드림아파트가 위치해 있는 곳인데 영등동유적보다 먼저 1993년에 택지개발 과정에서 발굴됐다. 이 유적에서는 모두 3기의 집자리가 확인됐는데, 청동기시대의 대표 유적인 부여 송국리 유적의 집자리유형과 같은 것으로 익산에서 최초로 조사된 청동기시대 집자리다.

◇ 청동기 문화의 전래

청동기 문화가 익산지역에 들어온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금마를 중심으로 익산지역에는 많은 청동기 유물이 산재해 있어 북방전래설과 함께 독자적인 발전 가능성도 내다보고 있다. 익산은 청동기문화 발전의 전제조건인 자연동(自然銅) 광산이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충남 금산 백암리, 김제 오봉리, 진안 용담리에 구리 광산이 있어 익산 주변에서 많은 동이 산출됐음을 알 수 있다.

익산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는 금마면 용화산의 동검(銅劍)과 오금산의 다뉴경(多紐鏡:꼭지가 많이 달린 청동거울이라는 뜻)과 동검, 용제동 이제마을의 동과(銅戈:청동 창)와 동착(청동 끌), 함열읍 다송리의 다뉴경과 동포, 원형동기편, 왕궁면 평장리의 청동검, 동모(청동제 무기), 전한경(前漢鏡:전한시대의 거울) 등이 있다.

용화산의 동검은 비파형동검(악기인 비파모양의 검)의 형태로 산의 서쪽 산기슭에서 발견됐다. 다송리에서 출토된 다뉴조문경(粗紋鏡:거친무늬거울)과 동포는 금강유역을 제외하면 대동강유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는 유물로 그 당시 청동기 문화의 전래가 대동강유역을 거쳐 익산으로 전해졌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고조선 시대에 위만에게 쫓긴 준왕(準王)의 남하와 청동기 문화의 전래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준왕이 대동강유역에서 남하해 익산에 도착한 후 토착집단 세력을 밀어내고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강력한 힘이 청동기문화였다면 일리가 있어 보인다. 또 평양 주변에서 출토되는 중국식 동검이 익산 미륵산에서 출토된 사실도 이러한 추측에 힘을 실어준다.

◇ 청동기시대의 무덤 유적들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은 대부분 집터나 무덤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인 만큼 무덤 또한 다수가 발견됐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함열읍 다송리에 위치한 석실무덤, 낭산면 석천리에 소재한 옹관무덤, 춘포면 신동리의 토광무덤을 들 수 있다.

다송리 무덤은 1975년 11월 발굴됐으며 다뉴조문경과 동포 그리고 거푸집이 나왔는데 익산지역에서 이미 청동의 제작 및 사용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석천리 옹관무덤(항아리를 이용한 관)은 총 3기가 발굴됐는데 국립부여박물관과 전주박물관에 의해 각각 조사됐다. 옹관묘의 경우 석관묘와 달리 부장품이 없기 때문에 연대를 설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전형적인 청동기 시대 옹관묘로 항아리 바닥에 작은 구멍을 뚫어 관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동리 토광무덤은 총 3기가 조사됐는데 입지여건에 따라 주변에 많은 유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 당시 이미 땅이 많이 깎여나간 탓으로 지표면 바로 아래서 유물이 출토됐으며 세형동검과 철기제품이 같이 나와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현재의 익산을 꽃피우는 선사시대

이 밖에도 익산의 청동기 문화는 수도 없이 많다. 석매리 무문토기, 갈산리 무문토기, 어량리 선사유적, 무형리 무문토기, 화산리 무문토기 등 지역 전체에 산재해 있다. 가까이는 영등동 유적에서도 구석기시대의 토기가 출토됐으며 미륵사지 연못에서는 신석기시대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익산이라는 도시에서 오늘을 살아간다. 공원에서 선사시대의 생활 터를 만나기도 하고, 그 당시 사람들이 경작하던 밭에서 아직도 농작물을 키우기도 하며, 그네들이 걸었던 길 위에서 걷기도 한다. 청동기문화의 중심 익산에서 백제의 문화가 꽃피웠던 것처럼 오늘의 익산이 문화도시로 다시 꽃피길 기대해 본다.       

정완창 기자 

영등동 시민공원에 있는 청동기시대 집자리 유적.

주변을 롤러스케이트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1. 영등동 집자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토기.

2. 독널. 옹관이라고도 하며 항아리에 시신을 넣고 장례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3.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주거생활을 재현한 움집 모습.

4.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사용하던 뚜껑달린 토기.

5. 청동기 대표유물인 세형동검과 동검제작에 사용되는 거푸집.

6. 반달돌칼과 숯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