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일제의 강제수탈의 상징 ‘하지끼’.. 조선말 천주교 박해 때 피난민 정착한 용왕마을
함열읍 석매리는 익산시내서 함열읍으로 진입하는 다송리, 낭산면과 경계를 이룬 흘산리 사이에 끼어 있다.

미륵산 자락이 낮게 흘러와 낭산산을 만들고, 낭산산 일대의 지맥들이 서쪽으로 흘러 용왕산을 만들었으며, 용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 석매리다.

석매리는 특히 옛 전설보다는 조선 말, 일제강점기 때부터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근현대를 살아온 주민들의 기억에서 추출되는 얘깃거리가 더 많다.

석매리는 두라, 용왕, 석치, 매교 등 4개 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이번에는 석치마을과 용왕마을을 방문해 주민들을 만났다.

◇ 일제강점기 강제 수탈의 기억, ‘하지끼’

익산시 함열읍 석매리石梅里는 조선시대 때 함열군에 속했던 동삼면 지역이었다. 함열군수가 있었던 함라면 함열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삼면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동삼면 지역의 금반리와 매교리, 석치리, 점촌, 용왕동 전체와 두라리, 학선동의 일부를 합쳐 석매리를 만들었다. 따라서 석매리는 석치리石峙里와 매교리梅橋里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이중 석치마을은 ‘돌이 많은 재’, 즉 돌이 많은 산능성이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말로는 ‘돌재’, ‘돌고개’, ‘도로재’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석치가 됐다.

석치마을은 용왕산으로부터 낮고 길게 뻗어온 구릉성 산자락 어귀에 둥지를 틀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낮은 야산과 마을 전체를 석치라고 부른다. 

“이 근방이 전부 석치요.” 마을 안길에서 만난 주민의 말이다.

석치마을에는 보기 드믄 장소가 하나 있다.

주민들은 마을 동쪽 어귀를 ‘하지끼’, ‘하지키’, ‘하직키’, ‘하직끼’라고 부르는데,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다. 옛날부터 그렇게 불렀으니 그냥 ‘하지끼’라는 것이다.

하지끼는 순 우리말이 아니며, 일본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일본말 하지끼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일본에서는 구슬치기 놀이를 하지끼라고 한다. 구술을 손가락으로 튕겨 다른 구슬을 맞히는 놀이다.

하지끼는 또 권총이라는 뜻도 있다. 하지끼를 차고 다닌다는 것은 순사가 권총을 차고 다닌다는 말이다.

또 하지끼는 따돌림, 혐오, 배척의 뜻을 갖고 있다. 일명 왕따와 같은 의미다. 흙으로 구운 일본식 그릇을 하지끼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본지가 주목하는 하지끼의 의미는 공출供出이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 때 쌀과 철제품을 강제로 빼앗아 간 것이 공출이다.

일본어로 “하지끼다쓰”라고 하면 염출하다는 뜻이다.

일제는 1940년대 들어 미곡배급규칙을 만들고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쌀을 시장에 유통시키지 못하게 하고 전량을 수거해 거의 대부분을 일본으로 반출했으며, 일부만 국민들에게 배급 형태로 나눠줬다. 처음에는 쌀만 걷어갔는데, 나중에는 콩 같은 모든 작물로 확대됐다.

게다가 전쟁무기를 만든다며 놋그릇이나 솥단지, 농기구 등 철로 만든 제품을 모두 쓸어갔다.

이 때 각 마을에는 의무적으로 생산해야 할 쌀이나 곡식의 양이 할당됐으며, 마을 내부에서는 집집마다 생산량을 할당받았다. 이게 주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지켜봤던 공출, 즉 염출의 현장이었다.

따라서 마을 주민들이 ‘하지끼’라고 부르는 동쪽 어귀는 각 가정에서 내놓은 철 제품이나 곡식을 모아두는 자리였을 것이다. 아마도 일제는 마을 한 귀퉁이에 공출한 것들을 모아 군산이나 부산으로 운반해 일본으로 반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집안의 놋그릇을 죄다 뺏어간 일제는 사기로 만든 ‘공출사발’을 만들어 돌렸다. 공출사발을 놋그릇 대신 쓰라는 의미였다. 공출사발에는 ‘공출보국 供出報國’이라는 말을 써 놓고, 비행기와포탄 그림을 새겨놨다. 공출보국은 공출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공출은 19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해방되기 전인 1945년 중반까지 5년 정도 이뤄졌으므로, 마을 주민들은 ‘하지끼’의 뜻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었지만 공출장소는 여전히 남아 ‘하지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하지끼라는 뜻을 모르는 것은 공출을 생생하게 경험했던 세대가 이미 사망했거나 타지로 이주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새로운 길을 낼 때도 공출 형식을 띠었다.

일제 때 낸 도로를 ‘신작로’라고 하는데, 길을 낸 후에는 자갈을 깔았다. 이때 석치마을에는 돌이 많아 자갈을 대는 역할을 주민들이 맡았다. 강제 부역이었다.

일제는 당시 석치마을에서 수집해야 할 자갈의 양을 정해줬고, 집집마다 일정량이 할당됐다.

“일정 때는 부락별로 호당 자갈을 얼마씩 해오라. 그렇게 하니까 산에서 자갈을 캐다가 도로에 깔고 그랬지.”

자갈을 바치는 것은 석치마을 옆 용왕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자갈을 각 부락별로 담당했었어. ‘어디서 어디까지는 어느 부락이 자갈을 깔아라’고 내려오면 그것을 집집마다 얼마씩 돌을 주워다가 깔아주고 길이 움푹 패이면 메꿔주고 그게 신작로여.”

용왕마을 박현신씨(65)의 말이다. 

  ◇ 공산당 간부가 활동했던 ‘모스크바’

석치마을은 6.25 전쟁 때 ‘모스크바’라는 별명이 붙었다.

공산당 간부 세 명이 이 마을에 살면서 주변 마을 공산당원들을 통솔했다고 해서 부른 이름이다.

“육이오 때는 이 부락이 모스크바여. 이 동네 사람 셋이 공산당 거시기였어.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우두머리 역할을 했어.”

세 명의 공산당 간부들은 휘하 당원들을 줄줄이 이끌고 다녔다고 한다.

공산당 간부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촉발시켰던 러시아의 모스크바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로, 주민들은 뒤에서 ‘모스크바’라고 수군댔다.

◇ 연료가 없어 흙을 판 ‘토탄배미’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주민들은 수탈의 후유증 때문에 허덕이며 살았다.

식량, 의복, 주거, 의료 등 모든 측면에서 황폐해진 상태였으며, 특히 추운 겨울에 땔감이 부족했다.

주민들은 이럴 때 논바닥에서 ‘토탄’을 파내 말린 후 연료로 썼다.

토탄土炭은 식물이 땅속에 묻힌 뒤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 제대로 된 석탄이 되기 전의 상태인 흙을 말하는데, 이것을 채취해 말린 후 태우면 연료로 쓸 수 있다.

주민들은 마을 동쪽 ‘하지끼’ 너머에 있는 논에서 토탄을 채취했는데, 이곳을 ‘토탄배미’라고 부른다. ‘토탄을 캤던 논’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거기가 바다였던 모양이어. 나무가 귀하니까, 한 일미터만 파면 나무 썩은 것이 이렇게 한 짐씩 나오는 데가 있어. 그것을 캐가지고 지게로 져 날라 산에다 말려서 때고 그랬지. 옛날에는 이 동네서 미륵산까지 나무 하러 댕기고 그랬어. 멀지만 어떡혀. 밥은 해 먹어야는디.”

◇ “철도 위에 돌맹이 놨다가 깜빵 갔다”

석치마을 앞으로는 호남선 철도가 지난다.

철도가 생소했던 당시 사람들로서는 위험성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석치마을에서 함열장을 오가는 주민들은 철길로 이동을 했는데, 열차에 치여 많이 죽었다고 한다.

마을의 어떤 총각은 철도 위에 세수 대야만한 돌을 놓아뒀다가 철창 신세를 지기도 했다.

기차가 지나갈 때 어떻게 되는가를 보기 위해서였는지, 일제의 수탈이 싫어서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국에 들킨 그 총각은 재판 받고 감옥에 갔다. “왜 돌을 갔다 놨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한 번 놓아본 것이겠지. 그래가지고 깜빵에 가서 살고 왔대요.”

주민들은 철도가 신기해 못이나 철사를 철로 위에 놓아두기도 했다. 기차가 지나간 후에는 모양이 납작하게 되는데, 이것 갖고 칼을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 천주교 박해 피해 정착한 땅, 용왕마을

석매리 용왕마을은 조선말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이 피난을 와서 만든 마을인데, 용왕산 바로 밑에 있어 용왕마을이다.

당시 피난 온 사람들은 나무로 작은 성당을 짓고 지붕을 씌운 뒤 한데 모여 미사를 올렸다.

때문에 당시 이곳을 관할하던 신부 ‘블라드’가 용왕마을에 정식 성당을 짓자는 의견을 교구에 올렸고, 주민들도 기대했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무산됐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아직도 익산지역 카톨릭 신자들 중에는 조선말 그들의 조상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처음 정착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 모인 카톨릭 신자들은 농사를 지었는데, 매년 음력 7월에는 ‘만두레’를 했다. 만두레는 ‘설매기’라고도 한다.

만두레는 모내기를 한 뒤 맨 마지막으로 하는 풀 뽑기, 즉 김매기를 말하는데, 대개 농촌에서는 모 심고 처음 하는 김매기를 ‘아시매기’, 두 번째 김매기를 ‘이듬매기’라고 하며, 마지막 세 번째 김매기는 ‘세벌매기’라고 한다. 세벌매기가 나중에 ‘설매기’로 변한 것이며, 이를 ‘만두레’라고 부른다.

만두레 날을 기점으로 마을에서는 우물을 청소하고 사흘간 잔치를 벌였다. 풍물패가 농악을 울리며 논둑을 돈 뒤 집집마다 들러 풍물을 친다. 용왕마을에서는 이 때 마을 앞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잡고, 가축을 잡아 풍년농사를 기원하고 여름 김매기를 끝낸 기념으로 사흘간 먹고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