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주민들의 화합과 유대감 형성했던 전통 풍습 많아..기세배, 기싸움 등 명맥 끊어져

행동 은행나무

함라마을 전경

오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마을답게 그에 얽힌 이야기가 무궁무진한 함라면 함열리. 지난 호에서 함라 고을의 풍수지리적 자연환경과 함께 삼부잣집에 얽힌 이야기를 다뤘지만 그 밖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비롯해 주민들이 들었거나 경험했던 일들, 지명과 관련한 이야기 등은 오래 전부터 마을을 지켜온 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는 풍속화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이번호에는 마을 주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풍속과 전해 내려오는 전설들에 대해 다뤘다.

노소(老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랄지, 오래된 은행나무와 관련된 이야기, 용샘과 똥바위, 기세배 풍습 등 향토사적인 가치를 지닌 삶의 모습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 마을이 품고 있는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기록하고 발굴해 후대에 전하는 원광대 대안문화연구소와의 동행은 무척 보람 있게 다가왔다.

천남, 수동, 망월, 교동, 행동 마을 등과 함라노소를 찾아 두루 이야기를 수집했고 마을 주민 조상호(70) 씨를 비롯해 조봉현(56), 한현교(56), 김무웅(80) 씨 등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 노소가서 볼기짝 맞을래?

함라 고을은 그 유래가 깊고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을로 명성이 높았다. 인심 좋은 고을이라는 것도 그런 살기 좋은 자연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의 풍속이나 풍습도 그런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삶에 형성됐을 터이다.
그런 함라 마을이 품고 내려오고 있는 고유한 풍속 중 하나가 바로 함라노소(咸羅老所)인데, 현재로 치면 경로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특별한 역할을 하던 곳이라고 마을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관아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마을 일을 관장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왔다.

수동마을에 위치한 함라노소는 1687년(숙종13년) 세워져 지금껏 326년이라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의 향약과 같이 자치규약을 세우고 실천하던 일종의 자치기구 역할을 했는데 지역사회를 통솔하고 이끌어가는 정치, 사회적 기능이 강했다고 한다. 고을 관아에서는 형법과 관련된 업무를 보았다면 노소에서는 예의범절과 생활 질서를 담당하며 정신적인 중심축 역할을 했다.

노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조상천(85) 옹은 “함열현에 원님이 내려오면 일단 먼저 노소에 와서 인사를 하는 것이 순서야. 지금도 도지사고 시장이고 함라에 오거든 노소먼저 들러서 인사를 하고 간다고. 노소에 보관하고 있는 문서가 있는데 1453년(단종 1년)부터 지금의 이한수 시장까지 전부 와서 이름을 남기고 갔어”라고 말했다. 노소의 위상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노소는 ‘읍강법’이라는 규율을 시행했는데 이는 함열 현감이 노소의 승인을 얻은 후 활쏘는 사람들을 시켜 민간 불량배들을 잡아다 벌을 주는 제도로서 ‘상하 분별 못하는 놈, 불효하는 놈, 게으른 놈’이 그 대상이다.

이는 매년 정월 보름에 행해졌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 보름이 오면 일찌감치 피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노소에 대해 조상호(70) 씨가 들려준 일화는 노소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어릴 때만해도 부모들이 말 안 듣는 자식들에게 ‘이놈자식 노소 가서 볼기짝 맞아볼래?’ 그러면 애들이 벌벌 떨었어요. 그만큼 무서운 곳이었다고. 또 구전으로 들은 얘긴데, 예전에 원님 아들이 하도 못된 짓을 많이 하니까 노소에서 잡아다 거세해 버렸다는 거에요. 그만큼 노소의 권위가 초법적이었다는 것이고 마을의 질서를 잡는 중심 역할을 했죠.”

◈ 기세배와 기싸움 통해 마을 화합

마한 백제의 고도로 알려진 익산에는 특수한 풍속 중 하나로 예전부터 기세배라는 민속놀이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현재 금마면에서 보존되고 있는 기세배가 대표적이다. 헌데 함라면 주민들은 기세배의 시조가 함라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따른 근거는 없지만 50년대까지도 마을에서는 기세배 풍습이 활발하게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함라 마을의 기세배 풍속을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멀리 김제시를 비롯해 이웃 고을에서 구경 오는 사람도 많았으며 사람들이 몰려 장이 설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기억을 토대로 전체적으로 종합해 함라 고을의 세시 풍속을 그려봤다.

먼저 섣달 그믐날 밤이면 마을은 풍물을 울리며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메구(매귀)꾼들로 떠들썩해졌다. 한 해 동안의 잡귀를 몰아내는 의미로 행해졌으며 이날 아이들은 대나무 빗자루에 불을 붙이고 우물, 부엌, 변소 등을 따라다니기 바빴다.

설날이 지나고 초사흗날부터는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 집집마다 고사를 지냈다. 큰 바위 밑이나 고목 등에서 떡과 음식을 차려놓고 소원을 빌었다. 50년대만 해도 그런 장면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을 만큼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떡시루 엎으러 다닌다’는 장난스러운 말이 전해질 정도로 일상 풍속이었다.

정월 보름이 가까워지면 본격적인 기세배가 시작한다. 먼저 마을 어른이 제주가 돼서 ‘농기고사’를 지내며 한해 농사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소원을 빈다. 풍물꾼들이 기를 앞세우고 마을을 돌며 집집마다 좋은 일이 들어오기를 빌어주면 주민들은 쌀이나 먹을 것을 챙겨줬다. 그렇게 한바탕 마을 행사가 마무리되면 본격적으로 이웃 마을 간 기세배가 시작되는데 마을사람들이 총동원된다.

함라 마을의 수동마을과 천남, 천북 마을은 기고사를 지낸 후 세낫갈(세갈래 길이 하나로 모이는 곳)로 내려오는데 세 마을이 만나는 이 지점이 기세배와 기싸움의 마당이 된다.
각자 마을의 기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기세등등하게 내려와 세 마을이 만나면 서로 서열에 따라 기세배를 올리거나 받아야 되는데 이게 또 쉽지 않다. 서로 자기 마을이 윗서열이라고 주장하며 대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동마을이 노소나 관아가 있다는 이유로 자기마을이 어른이라고 주장하면 다른 마을도 향교나 다른 이유를 들어 지지 않고 옥신각신하게 된다. 그러면 기싸움이 벌어지게 되는데 장정들이 나서 서로 깃발을 뺏거나 넘어뜨리려고 하면서 육탄전을 방불케 하는 장관이 펼쳐진다. 자기 마을을 응원하는 풍물 소리가 흥을 더욱 돋운다. 그렇게 한바탕 노는 마당이 진행되다 어느 마을의 기가 찢기고 부러지면 끝나며 그 후에는 마을 간 잔치를 벌이며 화합을 다지는 시간을 갖는다. 

이런 함라 마을의 풍속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던 조상호 씨는 “싸움이라고 해도 끝나면 서로 화합하고 웃으며 지냈다”면서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그런 행사에 직접 참여했는데 60년대 들어 없어져버려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 전설을 품은 함라 마을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은 항상 전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전설들을 수집하고 기록으로

남겨놓는 것 역시 구술사프로젝트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함라 마을에도 여러 전설과 민담이 남아 있었다. 도깨비 목격담에서부터 함라산 금광의 영향을 받아 잎이 유독 노랗게 변한 은행나무, 삼부잣집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 공기바위 전설, 샘에 얽힌 전설 등 다양한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이야기다. 주민들이 풀어놓은 이야기 중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함라 향교 옆에 5백년 된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그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했다. 그 20m쯤 높이에 가지가 갈라진 곳이 있었는데 그 자리가 썩자 그곳에 탱자나무가 자라더니 탱자가 열기까지 했다 한다. 거기에 벌집이 생기자 마을 주민이 벌집을 태우려고 불을 a놓았는데 그만 은행나무가 속으로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의용소방대가 출동해 온종일 고생해 겨우 불을 껐다.
그런데 속 불이 꺼지지 않아 나무가 죽어버리자 향교 쪽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베어버리기로 결정하고 사람을 불러다 나무를 벴다.

3일에 걸친 작업 끝에 나뭇가지를 쳐내고 밑동을 잘라내는데 그만 나무가 빙그르르 돌아 작업자를 덮쳐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만 것이다. 주민들은 영험한 은행나무를 베다가 동티가 난 것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또 공기바위 전설에 얽힌 일화도 있다. 공기바위는 함라산에 있는 큰 바위로 장군이 공기놀이를 하던 바위라는 전설을 품고 있다. 그 공기바위의 정기를 타고났다는 인물이 함라에 살았는데 그 사람의 걸음이 출중해 사람들은 그가 축지법을 쓴다고 말하고들 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그는 함라 집에서 밥을 짓기 시작할 때 출발해 재를 넘어 곰개나루에 갔다 오면 그때 솥에 밥이 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걸음걸이를 본 사람들이 모래가 한움큼씩 흩날렸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공바우’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도 말했다.      

함라 노소

함열 향교

  정완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