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수호신 모신 절은 황량.. 제대로 된 익산국립박물관 건립 필요성 역설

마을입구

▣ 익산천도의 사실을 밝힐 수 있을까

7월 16일 오후 7시 해가 긴 여름 하늘은 아직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던 중의 땡볕에 달궈진 습한 공기는 살갗은 물론 기도를 타고 내부에 들어와 자꾸만 땀샘을 열었다.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어느 지점에서는 미미하지만 풀이 타는 냄새가 났다. 천년 전, 불굴의 무왕도 나와 같은 공간에 서 있었으리라.

백제의 중흥을 꿈꾸면서도 운명 앞에 왜소해지고 겸허할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의 신심이 깃들어 있는 곳 '제석사지'. 무왕은 이곳에서 서서 비가 쏟아지길 기다렸을까. 아니면 폭염에 정면으로 맞서며 자신이 세운 도읍을 응시했을까. 만감이 교차했으리라. 천도는 잘한 일일까. 잘 할 수 있을까.

그는 이곳 변덕이 심한 장마철 일기 속에서 불투명한 미래를 바라보며 부국강병과 국태민안을 염원했으리라. 하지만 무왕의 염원이 깃든 왕실 사찰은 천년세월의 바람에 흩어지고 황량한 벌판이 됐다.

제석사지의 초석과 초석 사이를 오가며, 무왕이 왕궁에서 지나쳐 왔을 길을 되짚어 본다. 제석사지는 그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왕궁 후원을 나와 2km의 숲 길을 걸으며 엄습하는 불안을 달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길 위를 소나무와 잡목들이 차지하고 있다.

사라진 것은 길만이 아니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도읍이 기록된 역사는 통째로 소실됐다. 다만, 절터의 바닥 구조와 규모, 양식 그리고 흩어져 있는 유물들이 왕실사찰을 명증하고, 중국 육조시대에 전량 등에 의해 쓰여진 '관세음 응험기'를 통해 절의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사라진 역사를 더듬는 허허로움과, 고도와는 무관하게 형성돼 어제를 잃어버린 마을이 겹쳐 갑자기 막막해진다.   

▣ 이뤄지지 않은 왕도의 꿈

몇 그루의 소나무는 오래됐다 한들 천년 세월을 이어줄 수 없으니, 심초석을 비롯한 바위가 묵은 예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목탑지는 대부분 논밭으로 경작돼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

고대 국가에서 불교와 사찰은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신라에서는 황룡사가, 백제에서는 미륵사가 대표적인 왕실 사찰로 꼽힌다. 그리고 불교를 존숭하는 고대의 모든 도읍지에는 제석천을 주존으로 모시고 신앙하는 제석사가 있었다. 제석사지는 백제 무왕이 당시 수도를 왕궁리로 옮기려고 지은 궁궐 근처에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주존 불상으로 모신 절이 있던 자리이다.

제석사지는 1993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시굴조사를 통해서 그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해 1998년 5월 12일 사적 제405호로 지정돼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다.

이후 백제의 익산 천도설과 관련해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와의 밀접한 관련성이 제기되면서, 2002년부터 익산시에 의해 정비사업이 추진됐다. 그 일환으로 2007년부터 2012년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사적지 내 토지매입과 지장물 철거가 이루어진 곳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1탑 1금당의 가람배치가 확인됐으며, ‘제석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와 더불어 인동당초문 암막새 등 7세기 백제기와가 다수 출토되고, 북동쪽의 폐기유적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 유물은 모두 국립 부여문화재연구소 유물자료관으로 옮겨졌고, 그 출토지는 텅비게 된 것이다. 제석사지에서 무왕의 원대했던 포부를 만나고 싶다면, 부여에 있는 유물자료관을 먼저 다녀와야 하는 이유다. 익산에 제대로 된 국립박물관이 왜 건립돼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현장이다.  

▣ 그 이름만으로도 빛나는 문화유산, 제석사지

제석사지는 백제 무왕의 익산천도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유적이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에 천도해 제석정사를 지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제석사는 무왕40년(639년)에 벼락으로 폐사(전소)됐으나 탑 아래 심초석에 넣어 두었던 불사리와 동판금강반야경을 넣었던 칠함만이 보존돼 다시 사찰을 지어 안치했다고 한다.

1965년 인근 왕궁리오층석탑에서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된 사리장엄구와 거의 일치하는 사리장엄구가 출토되고, 북동쪽 제석사지 폐기유적이 발견되면서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익산천도의 사실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제석사지 자체는 예사로운 곳이 아니다. 그 존재만으로도 백제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유산이며, 왕실의 사찰로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곳이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백제의 문화에 대해, 무왕에 대해, 익산의 왕도로서의 모습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한번쯤 가볼 만한 곳이라는 인식을 점점 가지게 되면 지금 거적때기에 가려진 그 가치가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될까.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지역별 공약에 따르면 ‘고도익산 르네상스’를 위한 관련 사업의 지원이 점차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익산시도 왕궁리유적과 제석사지의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를 위한 종합정비계획과 정비사업을 추진한다고 한다. 왕궁리 유적과 제석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건물지 정비, 탐방로 조성, 조경, 편의시설 설치 등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2017년까지 단계별로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문화재청과 함께 왕궁리 유적과 제석사지를 익산 미륵사지, 익산 토성 등 주변의 문화유산과 익산의 대표 축제인 서동 축제 등의 행사와도 연계하는 프로그램 개발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왕궁리 유적과 제석사지가 백제시대 왕궁과 왕실 사찰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