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릇’ 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던 하갈마을.. 개가 누워 있는 형국의 마을은 하나로 대로변에 나오게 돼
밀, 보리 향기가 진했던 낭만의 기억이 있는 채산마을.. 산단 조성으로 마을 앞에 공장 들어서 새 변화

하갈마을 전경

구술사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하반기 조사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전반기 조사에서 미처 찾지 못한 마을들을 수소문하고 찾아다니며 한 마을이라도 더 찾아가고 생생한 목소리를 기록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본지에서도 마을들에서 발굴해낸 이야기들이 익산의 이야기이며 보존하고 널리 공유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한정된 지면이나마 여러 마을을 소개하는 것을 보람으로 알고 있다.

하반기 조사에서 찾아간 삼기면에서는 서두리 하갈마을과 연동리 채산마을의 이야기를 뽑았다. 둘 다 미륵산이 바라다 보이는 삼기면의 얕은 구릉지에 마을이 형성돼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 생활상도 엇비슷한 점이 있으리라 보였다. 또한 최근에 와서는 하갈마을의 경우 하나로 개통으로 인해 대로변 마을로 변했고, 채산마을은 산업단지가 마을 앞까지 들어서 산업지대를 마주하고 있는 마을로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점도 마찬가지다.

구술사프로젝트팀은 두 마을에 찾아가 과거 생활상 및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속속들이 묻고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다. 하지만 오래된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억들이 소멸된 상태였고 자연마을다운 독특한 풍습, 생생한 이야기 등을 건져내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었다. 더 늦기 전에 구술사 작업을 통해 남은 이야기를 거두었다는 점은 아쉬움 속에서 보람된 일로 남았다.

◇ 칡꽃이 떨어지는 마을

삼기면 서두리 하갈마을은 익산 도심에서 하나로를 따라 쭉 뻗은 길을 한참 달리다가 삼기면소재지로 갈라지는 교차로인 하갈사거리 좌측에 위치한 마을이다.

하나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얕은 구릉 안쪽에 깊숙이 자리한 포근한 느낌의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대로변에 위치해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주민들은 하갈마을을 본디 ‘아래치릇’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일설에는 마을이 칡꽃이 땅에 떨어진 모양이라는 ‘갈화낙지(葛花落地)’의 명당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을 일컬어 갈전(葛田)이라고도 했는데 동네가 크기 때문에 상갈과 하갈로 나눴다는 얘기다.

‘치릇’이라는 말은 원래 ‘칡밭’에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는데 얼핏 칡밭이 치릇으로 변했다고 생각하기 어렵지만 오랫동안 음변을 거친 결과라고 보인다.

하갈마을에서 만난 박래선(79), 박순옥(79) 씨로부터 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박순옥 씨는 “아래치릇, 윗치릇 그랬어. 칡이 많이 난 줄은 모르겠는데 지금은 칡이 없고 칠목산이라고 마을 뒷산이 있는데 거가 조금 있기는 하지”라고 말했다.

이어 박래선 씨는 “칠목산은 목사가 일곱이 난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산인데, 내가 듣기로 거기에 칡이 많았었대. 근데 내가 자랄 적만 해도 그렇게 많이 없었어. 아주 오래전에나 칡이 많았었던 가봐”라고 기억했다.

칡이 마을을 둘러싸고 무성하게 자랐다고 가정해보면 넝쿨로 둘러싸인 안쪽에 옹기종기 들어선 옛 하갈마을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 개가 엎드려 있는 모양의 마을

하갈마을은 과거 상주 박씨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박래선 씨의 말에 따르면 그의 12대조가 함라면에 살고 있었는데 10대조 때 함열 다송리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타성이라고 괄시를 받아서 금마 기양마을로 다시 이주했지만 천수답뿐인 기양마을이 살 곳이 못된다고 해서 9대조 때 이 동네로 이사 왔다고 한다. 형님은 상갈마을에, 아우는 하갈마을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갈마을 주민들은 칡과 관련된 지명보다 개와 관련한 지명을 더 가까이에서 쓰고 있었다. 오히려 갈화낙지형이라는 명당보다 개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는 마을 모양이 자연스럽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마을 모양이 얕은 구릉이 둘러싸고 있는 포근한 모양이어서 그런지 개가 엎드려 있는 모양과 꼭 같으며 그래서인지 마을사람들은 ‘개꼬리’, ‘개머리’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구분하고 있었다.

박래선 씨는 “풍수지리학적으로 개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는데 여기 우리 집이 머리 부분이고 저쪽에가면 개꼬리라고 있어. 그런데 고조할아버지 때 열부 문을 지었는데 동네사람들이 개 머리를 눌러서 개가 일어나지 못한다고 말이 많고 그랬어”라고 말했다.

개꼬리가 위치한 곳에는 논이 있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이 다른 목적으로 논을 메워버리자 개꼬리가 떨어지면 못쓴다고 못하게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은 예로부터 마을을 개와 같은 모습으로 인식하고 살며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개가 영향을 받지 않고 잘 살 수 있도록 해온 것이다.

채산마을 전경

◇ 금비녀 떨어진 마을

채산마을은 삼기면 연동리에 위치해 있다. 태봉사가 있는 태봉산에서 더 깊숙이 들어온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는 바로 앞마당에 위치한 마을이 됐다.

채산(彩山)은 160여년 전에 함열 남궁씨와 초계 정씨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채낙지형(金釵落地形)’이라고 해서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그래서 본디 채산(釵山)으로 쓰이다가 비녀 채라는 글자가 어렵고 잘 쓰지 않는 자이다 보니 채산(彩山)으로 바뀌게 됐다.

채산마을에서 만난 남궁수영(73), 남궁한수(60)씨도 이와 같은 유래를 알고 있었다.

남궁한수 씨는 “우리 동네 채 자가 옛날 임금 중전마마가 꽂던 비녀, 금채와 같은 혈이다 해서 채산이라고 지명이 유래됐다고 들었어. 그와 다른 이름은 못 들어봤고 마을을 나눠서 큰뜸, 작은뜸, 새끼뜸이라고 부르고 있지”라고 말했다.

뜸이라는 곳은 집이 옹기종기 들어선 곳을 말하는데, 집이 새로 지어지거나 늘어나면서 생긴 지역을 새끼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채산마을은 비교적 미륵산과 가까워 나무하러 많이 다녔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난민들이 들어왔었는데 그 당시 미륵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아 연명하기도 했다.

◇ 밀밭 향기가 그윽했던 마을

채산마을 주민들은 밀밭과 보리밭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얕은 구릉지가 대부분인 지형 때문에 밭이나 산이 대부분이었는데, 봄이면 밀이나 보리가 울창하게 우거져 온 동네가 밀향기, 보리향기로 가득했다고 한다.

남궁수영 씨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봄이면 풍경이 끝내줬지. 대신 우리 동네가 다른 마을보다 뒤지긴 했어. 수도작이 많이 없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야산이 개발되고 그러다보니 요즘에 와서는 채산마을이 삼기면에서는 경작규모가 1등인 마을이 됐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밀밭과 보리밭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다.

밀을 수확할 때면 타작해서 국수를 만들어 먹었으며 여름엔 빵도 쪄먹었다. 또 숨바꼭질할때나 어른들 몰래 나쁜 짓을 할 때는 밀밭에 들어가서 했다고 한다.

남궁한수 씨는 “밀밭에 들어가면 안보이니까 조금 말썽 부른 일을 하려면 밀밭에 들어가서 했다고. 어렸을 때 봤는데 처녀총각들이 밀밭에서 사랑을 나누면 우리가 장난으로 돌 던지고 그랬어.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 남아있다면 전국에서 알아줄텐데”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추억이 서려있는 마을은 현재 산업단지와 마주선 마을이 됐다. 그런 부분에 대한 어려움이나 영향에 대해 묻자 주민들은 아직까지는 온전히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주민들은 “금마에서 함열가는 이쪽편 땅은 다 우리동네 토지였을거다. 주민들이 받는 직불금이 4천만원이 넘었다. 산단 들어서며 보상받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십년이면 남을 돈이라는 생각이다. 현재는 지하수나 여타 피해는 없고 여러 시설도 생겨서 좋기는 하지만 친환경적인 공장이 들어와서 악취나 해로운 물질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정완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