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사랑한 무왕.. 밝혀진 미륵사 창건의 진실
미륵사지의 격에 맞는 국립박물관 건립돼야

▣ 미륵과 같이 백성을 위한 무왕의 꿈

30일 오후 1시 30분, 잿빛 하늘이 기상청의 장마 예보를 실감나게 한다. 젖은 공기의 무게를 느끼며 남중동을 떠나 미륵사지로 향했다.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428(기양리 104-1)에 위치한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이 목적지다. 금마사거리에서 삼기면 방면으로 고도길을 따라 약3㎞정도 가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어렴풋이 미륵산 자락 석탑이 보일 즈음, 맞은편 60번 시내버스의 빗물을 닦아내는 와이퍼가 환영하는 듯 손을 흔든다. 차창 밖으로 토독토독.. 비가 한 방울씩 내리기 시작한다.

빗소리는 일정한 리듬을 갖고 언어가 됐다.

“한번 와 보고 천년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겠어?”라는 무왕의 목소리 같았다. “맑은 날 다시 꼼꼼히 살펴보는게 좋지 않을까?”

‘어디 사진이나 제대로 나올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기왕 왔으니 쨍쨍 따가운 날과는 달리 운치 있게 분위기 좀 내볼 요량으로 마음을 다잡고 들어섰다.

널찍하게 펼쳐진 미륵산 자락, 너른 터를 배경으로 자리하는 미륵사지는 남은 공간만으로도 우리나라 최대 규모 사찰의 위용을 짐작 할 수 있다. 이곳에 서면 누구나 4차원의 잔영으로 남아있는 천년 전 백제의 휘황찬란한 호국사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7세기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미륵사는 서동요로 알려진 선화공주와 무왕의 깊은 불심이 깃든 곳으로 당시 귀족불교에 머물고 있던 백제불교를 국민들에게 알려 대중화했다고 알려진다.

그래서 미륵사는 백제야말로 미륵이 출현할 만한 나라이고 백제의 국민들은 미륵이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선민의식을 일깨웠을 것이다. 아마도 미륵사는 장구한 세월에도 변함없는 거대한 바위 처럼 왕실과 국민들을 지켰으리라.

금동제사리내호와 외호(좌) 전시용 모조품.

▣ 사리봉안기 발굴로 알려진 미륵사 창건의 진실

백제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유사에 미륵사 창건 설화가 전한다. 무왕 부부가 사자사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무왕이 왕비의 청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과 넓은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바로 유명한 전래 설화 ‘서동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서동)과 선화공주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로 미모가 매우 뛰어난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은 무왕이 그녀를 위해 미륵사를 지었다는 로맨스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했던가.

실제 삼국사기에서도 무왕은 ‘풍채가 뛰어나고 지기가 호걸스러웠다’고 묘사돼 있다.

미륵사 창건에 관한 이 설화를 통해 미륵사가 신라와의 대치 관계 속에서 백제의 국력을 모은 국가적 사찰이었고, 연못을 매립해 평지를 조성했으며, 3탑 3금당의 삼원병립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미륵불이 삼회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신앙을 현실세계에서 구현한 것으로 당시 무왕의 생각을 읽어볼 수 있다.

금제사리봉안가 전시용 모조품.

그러나 이후 200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를 창건한 왕비가 백제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기록돼 있다. 사택적덕이 딸이 재물을 희사해 미륵사를 창건하고 639년(무왕 40)에 사리를 안치했다는 것이다.
무왕은 정치적 안정을 위해 당시 백제의 유력한 여덟 가문인 대성팔족 중 하나인 사택 씨 가문의 딸을 비로 맞이해 자신을 지지하는 버팀목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그녀와 사택 씨 가문은 무왕 후기에 정국을 주도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화공주와 사택적덕의 딸에 관한 해석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당시 사택 씨 가문이 미륵사의 창건의 후원자가 된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을 듯 보인다.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는 이름 그대로 설화인 것일 뿐일까. 당시 신라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정략적 결혼이었을까. 백제 무왕이 선화공주와 혼인한 뒤 신라 진평왕 간에 안부서신이 자주 오갔으며 미륵사를 창건할 때 진평왕이 이를 도왔다는 것은, 당시 백제와 신라가 잦은 전쟁으로 인한 원수지간이었음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반면 사택적덕의 딸이 진정한 백제 왕후였다면, 당시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사택 씨 가문과의 혼인 역시 왕권안정을 위한 무왕의 정치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어느 쪽이든 무왕의 선택은, 앞서 즉위한 29대 법왕이나 28대 혜왕처럼 권력 투쟁의 희생양으로 단명하지 않고 강력한 왕권으로 백제의 새로운 중흥을 기하기 위함이었다고 믿고 싶다. 미륵사 창건을 통해 당신의 꿈을 펼쳐가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 미륵사지의 격에 맞는 박물관 건립해야

아직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탓에, 무왕의 선택과 꿈이 서린 미륵사지 터의 진면목을 바로 보지 못하고 복원을 기다리는 석탑처럼 비가 그치기를 전시관 미륵사지 복원 모형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더러 있어, 아빠가 아이의 손을 잡고 하나하나 눈높이를 맞춰 주는 모습에 보는 마음이 다 흐뭇해진다.

갑자기 웅성웅성 여기저기 우산 접는 소란이 일었다.

순간, 무왕의 로맨스와 미륵사 창건의 진실에서 빠져 나와 현실과 마주하게 되면서 외국인에게 한 마디라도 건네 볼까 하는 설렘이 앞선다.

비록 토익시험도 언제 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영어 실력이지만, ‘나에게는 손과 발, 그리고 그들이 모르는 무왕의 꿈이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통역쯤으로 보이는 가이드에게 물었다. 홈스테이를 하는 미국과 중국의 청소년 방문객들이란다.

혼자 웃고 말았다.

금동향로 전시용 모조품.

이미 둘러본 유물전시관을 그들을 따라 다시 둘러봤다. 그들은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해서다. 가이드의 설명에 끄덕끄덕 반응하는 폼새가 꽤나 흥미로워 보였다. 특히 금제사리봉안기 앞에서는 미륵사 창건의 비밀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여러 번 눈을 마주쳤다.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았다.

현재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는 무왕의 꿈이 담겨있는 19,000여점의 유물 중 400여점이 전시돼 있는데, 정작 있어야 할 국보급 금제사리봉안기는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출토된 지역에서 해당 유물을 보관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다. 국보급 유물이 출토되었다면 응당 국립박물관으로 승격시키든지 아니면 예산을 투입해 유물 소장능력을 향상시키면 될 일이다. 만약 보관능력을 이유로 국립박물관만을 고집해 일괄 보관한다면 얼마나 불편하고 비효율적이겠는가.

가족 단위, 단체나 학교의 체험학습, 더 나아가 오늘처럼 외국 탐방객들에게 보여줄 우리 문화유산이 모조품으로 전시돼 있다면, 그 숨결이 느껴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조사하고 발굴해 우리만 알고 끝날 일이 아니라,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지역, 국가, 세계로 뻗어 나가야 할 가치가 우리 손에 없다면 무슨 자부심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까.

하루 바삐 익산에 국립박물관이 건립돼야 하는 이유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