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살았던 무왕의 흔적.. 광활한 절터 위에 펼쳐져
미륵사지 석탑, 당간지주.. 백제인의 예술성 엿볼 수 있어

▣ 국내 최대 규모의 사찰, 미륵사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미륵사지.

그 이름이 높은 것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이나 미륵사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보물 제236호 당간지주 등의 역사적 유물의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역시 백제 무왕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서가 아닐까.

8월 7일 낮 두 시, 무왕의 기운을 받으러 출발한다.

익산 시내에서 하나로를 따라 삼기 방면으로 가는 조금 빠른 길이 있지만, 오늘은 기왕 가는 길 ‘무왕길’을 한번 따라 가보기로 해, 익산 IC 방면으로 익산소방서와 공설운동장을 지나 이정표를 따라 20여분을 달리다 보니 어느덧 미륵산 자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자마자 폭염이 훅 하고 몸을 덮쳐온다. 몸이 땡볕의 중력을 느낄 때 반사적으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왕의 기운과 가까워진 지금 기온은 섭씨 35도를 가리키고 있다. 땀방울이 주르륵 흐른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미륵사 유물전시관 방향이 아닌 입구에서 길이 나 있지 않은 오른쪽 방향을 권한다.

넉넉 잡아 500보 정도 걸어 북쪽 미륵산을 바라보면 가운데 목탑지와 좌우의 서탑과 동탑, 그 앞의 당간지주와 양 옆의 연못이, 마치 무왕의 행차를 맞이하듯 반겨주기 때문이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흘러들어와 따가운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면, 뜨거운 햇볕 속 아지랑이처럼 거대한 미륵사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위엄 있는 목탑과 석탑, 좌우로 길게 늘어선 회랑과 뒤에 위치한 금당과 강당까지.

무왕도 그랬을까. 충진된 중력에 눌려 땀을 비질비질 흘리던 나는 아질아질 지열이 끓어 오르는 여름 한 낮에도 꿈쩍 하지 않는 아득한 당간지주와 목탑과 석탑의 위용 앞에서 한 없이 작아졌다.

자연의 작용에서 일탈해 주변환경에 초탈한 그런 구조물들은 무왕이 왜 이런 대 가람을 세웠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유독 관람객 한명 없이 홀로 서 있어 외로운 무왕이 된 듯 한 기분까지 탑신과 당간지주에 흐르는 훌훌 자유로운 선질에 겹치며 나는 그만 여름을 잊고 서늘해지고 만다.

▣ 버드나무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연못

멀리 우뚝 서 있는 석탑과 당간지주에 앞서 좌우 연못이 발길을 끈다.

미륵사지 발굴 당시 연못 바닥의 단면을 떠 보니 점토와 낙엽이 층층이 쌓여 있었는데, 버드나무 잎이었다고 한다. 그 옛날 연못가에도 지금처럼 버드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니 천년전이 전혀 낯설지 않다.

특히 지금 있는 왕버들은 다른 나무들과 경쟁하지 않고 개울가나 물가에 자리 잡아 어린 시절부터 빨리 자라는 생존 전략으로 다른 나무를 압도한다고 한다. 은근히 무왕과 닮았다는 생각에 신기할 따름이다.

갈 길이 바쁘지 않다면, 무왕이 연못가를 거닐던 그 옛날을 상상하며 왕버들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여유도 좋을 듯하다.

▣ 미륵사지의 문지기, 당간지주

땡볕에 혼자인줄만 알았는데, 저만치 당간지주 앞에서 한 청년이 나처럼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고 있다.

더위에 지친 참에 기다리던 동료를 만난 양 가서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지만, 그도 나도 머뭇대며 눈으로만 이야기하고 말았다.

흔히 당간이라 하면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말한다. 이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미륵사지 동탑과 서탑 앞에 각각 두 기의 당간지주가 약 90여 미터 간격을 두고 우뚝 서 있다.

멀리서는 석탑의 위용에 가려 눈에 잘 띄지도 않았던 지주가 4미터에 달하는 큰 키로 내려다보니 임금을 배알하러 온 신하마냥 굽신하게 되는 것 같다.

보물 제236호로 지정돼 있는 당간지주는 이를 받치는 기단부가 완전히 부서져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로 약간만이 드러나 있다. 지주는 원래 커다란 키 그대로 보존돼 있는데, 마주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는 그 모습이 꾸밈이 없고 오히려 당당해 문지기 역할로는 안성맞춤인 듯 싶다.

▣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미륵사지 석탑

당간지주의 안내를 받아, 북쪽 미륵산을 바라보며 마치 커다란 정미소 건물처럼 생긴 왼쪽 서탑 복원 현장보다는, 이미 복원돼 완성의 미를 보여 주고 있는 동탑으로 자연스레 발길이 향한다.

혹자는 1993년 옛 터에 복원된 동탑을 보고 그 형식과 모양은 같을지언정 서탑에서 느낄 수 있었던 중후함을 찾을 길이 없다고 평하지만, 실제 와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진으로만 접했던 서탑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퍼즐을 맞추듯 완성돼 더할 나위 없는 멋스러움을 보여 주는 반면, 서탑을 모델로 해 복원됐다는 동탑은 비록 고풍스런 맛은 없을지언정 깔끔하고 세련된 맛을 느낄 수 있다. 내부에서는 석재를 짜맞추는 미학을 느껴볼 수 있다.

더불어 더운 바람에도 딸랑딸랑 소리를 은은히 들려주는 층마다 달려 있는 처마 끝 풍경소리에 마음이 경건해진다.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서탑은 전체 9층 높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던 것이 6층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일제강점기 허술한 복원으로 시멘트가 흉측한 모습으로 덧칠된 일그러진 모습이었다고 한다. 한 변의 길이가 10미터에 이르고 추정 높이가 26미터나 되는 거대한 탑은 화려한 옛 모습을 다시 찾기 위해 대규모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 나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되고 또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미륵사지 석탑은 기존의 목탑의 형태를 그대로 본떠 석탑으로 재현했다 해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다. 생각해 보면 당시 목탑의 형태를 일일이 석재로 본떠서 짜맞췄다는 사실이 새삼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어렸을 적 프라모델 비행기 따위 하나도 조립하기 버거워했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더욱 많은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서탑의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 광활한 절터, 당당한 무왕의 기운

아주 작은 조각들만이 남아 있는 미륵사지의 모습이지만 광활하고 웅장한 옛 모습은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당시 백제인들의 화려한 조탑 기술, 예술성과 함께 이를 세심하게 지켜보았을 무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백성에 대한 사랑의 길로 무엇인지 고민하며 답을 찾았던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았을 것 같은 무왕의 기운이 느껴지는 하루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