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국안민을 이루고자 한 백제 무왕.. 그 토대가 된 미륵신앙
미륵신앙을 형상화한 사찰.. 미륵산 자락 명당에 자리 잡아

22주간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쉽게 한 걸음 씩 내딛는 기행의 형식을 빌려, 고도익산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발로 뛰며 둘러 봤다.

이번 주를 기점으로 이후에는 ‘고도익산의 향기’라는 새 기획을 통해, 보다 세부적인 시각을 가지고 심도 있게 고도의 문화를 들여다보고 조명하려 한다. 이를 통해 고도익산이 가지고 있는 문화유산 속의 이야기들을 재해석하고, 현장과 감성이 공존하는 기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지면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 늙은 쥐가 만찬 즐기는 모양새의 미륵산

등 뒤와 양 옆을 감싸고 있는 산자락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이, 미륵사 한 가운데 이내 머물렀다 풍탁을 간질이며 다시 빠져나간다. 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처럼, 땅의 습한 기운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볕이 고스란히 드는 금당지와 강당지에 잔디처럼 버젓이 자라고 있는 이끼가 습한 기운을 더한다.

어찌 바위산 자락 아래 습한 땅을 골라 사찰을 지었을까. 그것도 원대한 포부를 담아 펼쳐나가기로 한 결심의 땅에서 말이다.

미륵산은 익산의 주산으로, 오랜 세월 침식으로 지형이 평탄해지면서 준평원이 된 금마 일대에 낮은 산지 형태로 남아 있는 잔구성산지다. 이 미륵산 자락에 자리 잡은 미륵사, 그 너른 땅에 무왕은 절을 짓고 탑을 세우며, 백성을 위한 나라를 짓고 꿈을 세웠으리라.

2001년 발간된 익산시사에 따른 미륵산의 풍수가 흥미롭다.
미륵산은 풍수적 입장에서 보면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쥐가 풍요로운 대지를 향해 만찬을 즐기는 형국을 취하고 그 아래 명당 터에 미륵사지가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무왕은 미륵산을 등 뒤로 해, 눈앞에 펼쳐진 미륵사지와 멀리 왕궁터까지 내다보며 앞날을 준비하고 후일을 기약했을까.

풍수에서 강조하는 산의 정기 용맥(龍脈)이 백두산에서 출발해 백두대간을 거쳐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에 이르고, 금남정맥으로 독립해 대둔산, 계룡산 방향으로 달리는 과정에서 한 줄기가 서해 바다 쪽으로 뻗어나가다가 함열과 익산 사이에서 크게 멈추는 데, 바로 그것이 미륵산이다. 해발 430m의 미륵산은 산악지대 1,000m 이상의 높은 산에 비해서는 작지만, 일망무제 평야에서는 아주 높은 산이다.

백두대간의 정기가 내달려 오다가 서바다를 바라보고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멈춘다. 이렇게 멈춘 산천의 기운은 미륵산에 모여, 한없이 부드럽게 펼쳐지는 익산 구릉을 사방으로 지켜주고 있다.

◇ 백제 무왕의 꿈이 서린 미륵사지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현재 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워주십시오.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하고 청하니, 왕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존의 상을 모방해 만들고 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 하였다)라 하였다. 진평왕은 각종 공인(工人)을 보내 역사를 도와주었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실린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의 내용이다.

보국안민과 삼국일통의 원대한 포부를 갖고 고향 익산을 다시 찾은 백제 무왕은, 다가올 미래에 미륵불이 출현해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미륵신앙을 토대로 미륵사를 짓고 왕권을 강화하며 백제의 부활을 꿈꿨다. 국사에서 미륵사를 왕흥사라고 한 점도 미륵사 창건이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도 “지금의 익산에 무왕은 별도(別都, 천도지)를 두었다”고 전하고 있어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무왕이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던 미륵신앙은 일종의 메시아 신앙으로,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천인(天人)들에게 설법하고 있는 미륵보살이 석가모니불 입멸(入滅) 후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 차례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륵신앙은 미륵상생(彌勒上生)신앙과 미륵하생(彌勒下生)신앙으로 나뉘는데, 미륵상생신앙이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왕생해 수행을 하는 내용이라면, 미륵하생신앙은 먼 장래에 미륵불이 출현해 중생들을 3회에 걸친 용화법회(龍華法會)로 모두 구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중 미륵상생신앙은 스스로 노력하고 덕을 닦아야 한다는 점에서 엄격한 계율을 바탕으로 하는 귀족적인 성향을 띤다. 지명법사가 거주했다는 사자사가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수행하던 사자상좌(師子上座)에서 이름을 따온 사찰로 미륵상생신앙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미륵사에서는 삼원병립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것은 미륵이 하생해 용화삼회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의 내용을 구현한 것으로 미륵하생신앙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무왕은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부여를 떠나 자신의 고향이자 옛 마한의 중심지였던 익산에 새 도읍을 건설하려고 하면서 미륵하생신앙을 전개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해나가고자 했다. 백제야말로 미륵이 출현할 만한 나라이고, 백제의 국민들은 미륵이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선민의식을 일깨웠던 것.

무왕에 앞서 즉위한 29대 법왕과 바로 위의 28대 혜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왕들이 모두 단명했던 주요 원인은 백제 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에 있었다. 당시 정국은 사비(지금의 부여) 천도 이후 형성된 8대성(八大姓)이라 불리는 실권 귀족들이 주도하고 있었고, 법왕을 제거한 실권 귀족들은 그들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지속하고자 세력 기반이 없던 익산의 몰락 왕족을 왕으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서동 무왕이었다.

그러나 무왕은 앞서 실권 귀족들에게 휘둘림을 당했던 왕들과는 달리, 남다른 재능과 뛰어난 수완을 지닌 왕이었다. 삼국사기에서도 무왕은 “풍채가 뛰어나고 지기(志氣)가 호걸스러웠다”고 묘사돼 있다.

◇ 익산을 다시 찾아오는 미륵불

미륵사는 무왕의 왕권 강화라는 국가적 필요와 보국안민에 대한 의지, 미륵신앙이라는 불교적 상징이 일체돼 만들어진 사찰이다. 이 바람을 이뤄줄 미래의 부처로서, 현실의 변혁과 변화를 갈구하는 이들에게 미륵불은 미래신앙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미륵불이 다시 익산으로 다가오고 있다.

1,40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부활의 첫 발을 내디딘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에서, 절묘한 솜씨로 돌들을 짜 맞춰 복원한 동탑에서, 마치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미륵사 터의 건물들에서, 연못을 메워 그 땅에 절을 세웠다는 설화를 전해주려 돋아난 이끼에서, 이들을 보고 느끼려 아빠와 엄마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의 모습에서 피어나는 미륵불의 향기를 제각각 느낄 수 있다.
다가오는 미륵불이 이뤄줄 꿈, 바로 익산의 꿈이 실현되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