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얻으며 신라 왕래.. 무왕과 선화 공주의 결혼 계기 마련
인맥 활용해 인력 동원.. 미륵사 터 못 메우기 대규모 공사 수행

◇ 백제 무왕의 정신적 지주

익산지역에서 마를 캐어 생업을 이어나가던 서동은 법왕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귀족들에 의해 옹립돼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실권 귀족들이 몰락왕족인 그를 옹립한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무왕은 삼국사기에서 풍채가 당당하고 기개가 남달랐다고 전하고 있고, 삼국유사에서도 재주와 기량이 뛰어 났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귀족들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왕도 실권 귀족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필요했을 터.

그가 바로 지명법사인 것. 오금산 자락에서 마를 캐며 살았던 무왕은 눈에 보이는 용화산 자락 사자사에 거처하는 지명법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왕이 되기 이전 서동 시절부터 자주 찾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종교적으로 미륵하생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창건한 미륵사도 사자사를 찾아가던 도중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온 것이 계기가 됐다고 전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선화 공주와의 결혼을 앞두고 황금을 신라로 보내는 일이나, 미륵사 터 못을 메우는 일도 지명법사와 먼저 상의하지 않았던가.

왕위에 오른 무왕에게는 자신을 도와줄 세력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마침 전부터 인연이 있는 고승이 있었다. 신통력이 있었던 지명법사도 백제의 부활을 꿈꾸던 무왕의 기개와 됨됨이를 한 눈에 알아챘을 것임이 틀림없다.

◇ 왕실간 결혼을 주선한 중매쟁이

자고로 왕실간의 결혼에는 중간에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일정한 예물을 주고받는 절차가 있기 마련이다. 무왕과 선화 공주의 결혼도 마찬가지였을 터.

“내가 신통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 오시오.”

이 같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지명법사는 서동의 부탁을 받고 신통력을 발휘해 황금을 신라 왕궁으로 수송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를 계기로 신라 진평왕은 서동과 선화의 결혼을 인정해 준 것.

이는 지명법사가 무왕과 선화 공주와의 혼인에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명법사는 무왕과 선화 공주와의 결혼을 주선하는 사절의 임무을 맡았고, 실제로는 황금을 비롯한 많은 예물을 가지고 신라를 오고 갔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러한 사실이 설화상에서는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비춰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사찰의 승려가 왕실간이라 할지라도 결혼을 주선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조금 의아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신라와 백제 사이의 관계를 볼 때 무왕과 선화 공주의 가능성은 전해지는 서동요와는 달리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정략적 결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호시탐탐 권력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는 귀족들 사이에서 왕위에 오른 무왕으로서는 정신적 지주인 지명법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터.

이런 이유로 지명법사가 신라를 왕래하며 왕실간의 결혼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진평왕이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기이하게 여겨 그를 더욱 존경하고, 이후에도 안부의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 것은 지명법사를 매우 신뢰했음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이러한 진평왕의 지명법사에 대한 신뢰가 양 왕실간의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 대규모 인력을 동원한 신통력

선화 공주와 결혼한 무왕은 용화산 아래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한 것을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했다.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의 창건에 대해서도 지명법사가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주변의 산을 깎아 못을 메웠다고 전한다.

하지만 계명대학교 노중국 교수는 “그가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커다란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의 신통력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못을 메우는 작업을 지명법사가 도맡아서 처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화 공주와의 결혼 과정에서 황금을 옮겼던 사실과 마찬가지로, 무왕이 못을 메우는 문제를 가지고 지명법사에게 먼저 자문을 구했고 지명법사가 이 작업을 수행했다는 것.

못을 메우는 작업은 당시 많은 인부들이 동원되는 대규모 공사였다. 이 과정에서 지명법사는 뜻을 같이하는 신도들의 모임인 향도조직을 이용했고, 미륵사 창건에 참여한 향도들은 지명법사와 인연 있는 사찰의 단원들에 의해 조직된 것이 다수를 차지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도 지명법사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일개 사찰의 승려가 수천, 수만 명이 동원됐을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면서, 충분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의 신통력이 아닐까.

◇ 연못가에 자리 잡은 왕버들

미륵사가 못을 메운 터 위에 자리 잡았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미륵사지의 발굴조사 결과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미륵사지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사찰의 터를 만드는 작업은 일차적으로 흙으로 못을 메우고 이를 다시 파서 모래와 자갈을 넣어 배수가 자 되도록 하고 진흙으로 다지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왕버들 그루터기가 곳곳에서 발견돼 당시에도 왕버들을 심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의 노기환 학예사는 “실제 발굴조사 당시 왕버들 그루터기가 발견됐다. 왕버들은 잔뿌리가 많아 흙의 유실돼 제방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심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미륵사 창건을 주도했던 지명법사가 조경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일까. 지명법사와 백제인들의 세심한 조경기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왕버들은 연못가나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며, 키가 크고 잎도 다른 버드나무에 비해 넓다. 이름 그대로 왕버들이라고 불릴 만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 미륵사지의 좌우 회랑지 앞에 자리 잡은 두 연못가에도 왕버들이 심어져 있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