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고 격조 있는 선비는 없지만.. 그의 기품은 그대로
수우재는 그의 질박한 언행을 담고.. 사후 46년을 그 자리에

◇ 정자도 연못도 그대로인데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시가인 시조를 본격적인 현대 시조로 발전시켜 겨레시의 맥을 잇게 한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선비’라는 교양과 기품을 유지하려 했던 전형적인 문인이면서 학자로서, 조선조 사대부 문화였던 선비문화의 전통을 잇고 현실적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다정다감하고 소박한 생활상과 격조 있는 선비의 면모를 가진 그는 특히 자연을 관조하며 자연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가람 선생의 소박함과 선비정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의 생가 ‘수우재’를 찾았다.

금마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논산 방향으로 여산면 소재지 못 미쳐 원수리에 위치한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 수우재는 마을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간다.

넓게 조성된 주차장이 먼저 반기는데, 어쩐지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다. 햇살은 따스하지만, 봄꽃을 시샘하는 매섭고 찬바람이 휑한 주차장에 가득하다.

몇 계단 올라 안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생가 터 뒤를 감싸고 있는 대밭이 바람을 막아주고, 아담하고 고즈넉한 전경이 뒤늦게 가람 선생의 생가였음을 알린다.

조선 말기 선비집안의 배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가람 선생의 옛 집은 소박했다. 수우재, 진수당 등의 현판이 걸려 있는 4칸의 사랑채는 2칸의 방과 1칸의 부엌, 1칸의 서재로 구성돼 있다. 정면에는 툇마루를 놓았으며 서재 곁에는 사랑마루를 뒀다.

검소하고 단정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가람 선생이 기거했다는 사랑채의 매력.

당시 여자들이 안채에서 기거를 했기 때문에 사랑채가 가람 선생의 차지였다고 한다. 사랑채에서 그는 자연을 벗 삼아 세상을 바라보며 한 없이 평화롭게 삶을 채워나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안채는 자연석으로 쌓은 무릎 높이의 축대 위에 세워졌고, 방의 일부가 부엌과 연결돼 있는 ‘ㄱ’자형의 가옥이다. 비교적 크기가 큰 안방 뒤쪽에는 찬방을 두고 건넛방의 측면과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했는데, 군불을 지필 아궁이 출입이 편리하도록 전면 툇마루를 부쩍 높여 놓은 것이 특이하다. 지붕은 원래 초가였으나 이후 기와를 얹었다가 다시 최근 초가로 바뀌었다.

사랑채 오른편에는 탱자나무가 홀로 주인 없이 손님을 맞는다.

지난 2001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이 탱자나무는 가람 선생의 고조부가 연산 병암리에서 여산면 삼수골로 이사해 이 지역에 정착하고 조부에 의해 생가가 건립된 점으로 미뤄볼 때, 약 160년에서 220년 정도 나이를 먹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둘레가 60cm, 높이는 5.2m이고, 지상 1.6m 높이에서 여섯 개의 가지로 나눠지고 다시 작은 가지가 넓게 뻗은 원추형으로 수관을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생가 뒤 대밭 동산에는 가람 선생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 오른쪽 가람 선생의 동상 옆의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 생가에 이어 또 다른 가람 선생의 소박함을 엿볼 수 있다. 1m 정도 될 듯한 묘비는 가람 선생의 묘임을 알리고 있을 뿐, 그 어떤 장식이나 허례허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그의 모습과 닮은 꼴이다.

지난 1891년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서 태어난 가람 선생은 시인, 학자, 교육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1968년 이 곳에서 생을 마치고 생가의 뒷동산에 묻혔다.

생전에 가람 선생은 자신의 호에 대해 “가람은 강이라는 우리말이니 온갖 샘물이 모여 가람이 되고 나아가 바다가 된다. 그러니 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 근원이 무궁하고 끝도 무궁해 진실로 떳떳함을 이루니 완전하며 산과 들 사이에 끼여 있어 뭍을 기름지게 하니 조화함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가람 선생의 변에서 가람 스스로가 표상하고 있는 선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또한 흐르는 강물처럼 떳떳하되 중용의 도를 지켜 조화롭게 살고자 했던 그의 삶의 철학과도 만나게 된다.

◇ 자연 속에 파묻혀 사는 삶

지난 1973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수우재는 조선 후기인 1844년 건립한 전통 민가주택이다.

자연 속에 아담하게 자리한 수우재, 그 이름은 가람의 당호를 딴 것으로, 누구보다도 존경하던 조부의 아호인 ‘동우’를 받아 ‘어리석음을 지키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 한 칸을 지으니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
청산에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이상적인 공간을 지향하는 한 무명시인의 시조다. 이 시인은 터잡기로 거대한 자연의 한 지점을 택했고, 그 규모는 최소인 한 칸의 소박한 초가였으며 청풍과 명월로 채워진 초가의 뜰과 동산은 애초에 있던 본래의 자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나타난 터잡기와 집짓기, 뜰과 동산 꾸미기 등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소박함과 선비정신의 원천이었을 터.

가람 선생의 생가 수우재 또한 가람의 조부가 터잡기한 이후, 같은 맥락의 집짓기와 정원 조성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소박함과 선비정신으로 대변되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체취를 간직한 그의 생가.

그가 일생을 보냈던 수우재에서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단정하게 쌓인 토담과 돌담에서부터 소박함이 묻어있는 사랑채와 안채, 연못,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탱자나무까지 곳곳에 가람 선생의 살아생전 모습처럼 단아하고 소탈한 기품이 서려 있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