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준왕부터 백제 무왕, 고구려 안승, 후백제 견훤까지
고대 왕궁으로 삼아 성곽을 쌓고 영광의 재현을 꿈꾸던 곳

◇ 왕궁평성이 전하는 고도

왕궁평, 왕검이, 왕금이, 왕금성 등으로 불리며 고대의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왕궁리유적은 고조선의 준왕에서부터 백제 무왕, 고구려의 안승, 후백제의 견훤에 이르기까지 고대의 왕궁에 관련된 여러 학설이 꾸준히 제기돼 오고 있다.

발굴조사 이후에는 백제 무왕 때 왕궁으로 조성된 후 백제 말에서 신라 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고대 왕궁으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왕궁리유적은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왕조만을 품었다고 하기에는 아까운 면이 없지도 않다.

고대 왕궁의 지킴이 역할을 했을 왕궁평성은 이름 그대로 평지 위에 축조된 성이다. 북쪽의 나지막한 구릉과 남쪽의 넓은 대지를 감싸고 형성돼 있는데, 남쪽의 대지는 해발 20여m에 지나지 않으며 제일 높은 북쪽의 경우에도 해발 40여m 남짓에 불과하다. 외부와는 약간의 경사를 지닌 단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벽 안쪽과 바깥쪽은 자연스럽게 높낮이의 차가 만들어져 안에서 밖을 조망하기에 용이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통일신라 이전의 성곽이 대개 산이나 높은 구릉의 급경사면을 이용해 축조된 데 비해, 왕궁평성은 완만한 대지를 감싸고 있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지형에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왕궁평성은 방어용 목적보다는 주거용 내지 행정상의 필요에 의해 축조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 같은 왕궁평성에 대해 익산의 옛 기록인 금마지에서는 ‘왕궁평은 용화산에서 남으로 내려온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있는데, 이곳에는 세간에서 마한 때부터의 조궁터라고 하는 완연한 성지가 남아 있다’고 기록하며 ‘왕궁평’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서는 ‘왕궁정은 군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세간에 옛 궁의 자리라고 전해오는 곳에 있다’고 하며 ‘왕궁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 준왕의 마지막 보루

마한 기준 도읍설은 기원전 2세기 초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피신해 도읍으로 정했다는 학설이다. 이에 따르면 준왕이 즉위한 후 연나라와 제나라, 조나라로부터 많은 이들이 피난해왔는데 그 중 연나라의 위만이 기원전 194년에 왕검성을 빼앗는다. 나라를 잃은 준왕은 배를 타고 남하, 익산에 고조선 왕국을 다시 세웠다. 준왕은 나라의 방어를 위해 해발 430m의 미륵산에 1800m에 이르는 견고한 돌로 된 성을 쌓았다. 돌화살촉, 포석환 등이 발굴된 미륵산성의 규모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둘레 3,900척, 높이 8척으로 기록돼 있다.

지난 2011년에는 익산 인근인 완주 신풍유적지에서 준왕에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제사의식에 사용되는 방울인 청동 간두령 2점을 비롯해 세형동검과 철제 도끼, 토기 등 초기 철기시대 유물 20여점이 출토된 것이다. 준왕의 고조선은 훗날 백제에 병합된다.

◇ 의심할 수 없는 백제 무왕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일본에서 발견된 중국 육조시대의 관세음응험기의 기록.

관세음응험기의 내용을 토대로 백제 30대 무왕이 백제의 수도를 사비(부여)에서 익산으로 옮기려고 왕궁성을 쌓았던 곳이라는 백제 무왕 천도 및 별도설은 무왕 40년(639)에 백제가 익산으로 천도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왕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익산에는 왕도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다양하다. 이곳에서 발굴되는 기와의 수부(首府) 표기는 왕궁 외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미륵하생신앙을 바탕으로 강력한 백제를 꿈꾸었던 무왕은 산성과 왕궁을 짓고 왕실사찰인 제석사를 세웠으며, 국가 사찰인 미륵사를 건립했다. 왕궁은 기가 모아지는 말굽형태의 지세에 자리한 기획도시다. 4단 석축으로 조성한 남북 490m, 동서 240m 규모의 장방형으로 현재 40여개의 건물터 등이 발굴됐다.

◇ 고구려를 꿈꾼 안승

안승 도읍설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고구려의 백성들을 무마하기 위해 고구려의 왕족 출신인 안승을 소고구려국(보덕국)의 왕으로 삼아 정착시킨 것이라는 학설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 운동에 힘겨워했다. 그래서 고구려 유민으로 백제 세력을 견제하는 안을 생각했다. 670년에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을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익산의 금마에 정착시킨 뒤 고구려왕에 봉했다. 이 때 고구려국에 합류한 세력은 안승이 이끈 4,000여호,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를 따르는 763호 3,543인, 한성 유역의 투항민, 검모잠의 부흥군, 평양 인근의 주민, 전쟁포로 7,000여명 등 수 만명에 이르렀다. 고구려국을 선포한 안승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독자 외교로 잃어버린 왕국의 재건을 도모했다. 고구려가 14년 동안 일본에 9차례의 사신 파견 등 나라의 기틀을 다져가자 위협을 느낀 신라는 안승을 경주로 불러들였다. 이에 안승의 사촌인 대문이 중심이 돼 신라와 일전을 겨뤘으나 패배했다. 백제 땅에 세워진 고구려는 684년 무왕이 어린 시절 마와 금을 캤던 오금산성(익산토성)의 함락과 함께 짧은 15년의 생을 마감했다.

◇ 주민의 여망을 담은 견훤

후백제 견훤 도읍설은 통일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일어난 지방세력 중에 백제의 부흥을 목표로 건국했던 견훤의 후백제가 자리 잡았다는 학설이다.
견훤은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져 여러 곳에 도적 떼가 일어나자, 자신도 무리를 보아 무진주(광주)를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 됐으나 감히 왕이라 칭하지는 못했다. 이후 여세를 몰아 완산(전주)까지 북상해 백제의 부흥을 바라는 주민들의 뜻에 따라 완산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나섰다. 이 학설은 견훤이 입주한 완산의 땅이 지금의 전주가 아니라 금마저로 추정하고 있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