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이치를 따른 백제인들의 지혜 엿보여
고대 동아시아 정원 양상 규명의 중요한 자료

◇ 드러난 백제 조경기술의 정수

지난해 11월 백제시대 대표적인 정원유적으로 손꼽히고 있는 왕궁리유적의 정원이 세상에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며 눈길을 끌었다.
정원 공간의 총 면적은 3만9,100㎡으로 왕궁리유적 전체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 2009년부터 진행해왔던 발굴조사를 통해 그 실상 전부를 확인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정원의 다채로운 괴석과 물을 통한 경관 조성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조경기술의 시원 형태이며, 백제 궁원 관련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일한 발굴 조사 성과로 그 의의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발견된 정원에서는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설치한 석렬 시설, 9부 능선을 따라 구릉을 감싸는 환수구, 구릉 정상부에 조성된 건물지 등이 확인됐다. 이외에도 다채로운 괴석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물을 이용해 경관을 조성한 것도 발굴과정에서 드러났다.
정원 중심부의 규모와 구조, 입·수출부, 정원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긴 수로시설, 정원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수로시설의 동남쪽 모서리에 잇댄 ‘ㄱ’자형 물길, 그 물길 곳곳에 알맞게 놓인 반반한 돌들, 정원의 출수부를 통해 밖으로 나가는 물을 처리하기 위한 집수시설, 그리고 연못과 멋들어지게 어울렸을 정자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이 백제 조경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화려한 자연친화적 정원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던 것.
평지도 아닌 언덕 위에,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정원을 지형의 높낮이와 괴석들을 이용해 만들었을 백제인들의 솜씨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이러한 왕궁리유적의 정원은 백제 때 궁성의 일부로 조성된 이후, 궁성에서 사찰로 바뀌면서도 거의 원형 그대로 활용되다가 환수구를 대체하는 곡수로와 구릉 정상부 방형 초석 건물지 등이 추가로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과 출토 유물을 통해 볼 때, 정원의 사용 시기는 후삼국 또는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왕궁리유적만의 독특한 스타일

“무왕 35년 궁남에 못을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끌어들였으며, 못의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속에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했다.”
“무왕 39년 춘삼월에 왕이 비빈들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
“의자왕 15년 2월 태자궁을 매우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건립했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정원을 위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사기의 부여 궁남지와 관련된 기록들을 통해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백제의 정원이 다채롭고 기이한 돌들로 장식된 모습으로 왕궁리유적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왕궁리유적의 정원은 궁성에서 중심적인 활동이 이뤄지는 남반부와 후원으로 조성된 북반부의 경계지점, 즉 궁성에서 후원 영역이 시작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결국 정원은 궁성 내부의 공간 구획 측면에서 왕이 기거하고 업무를 관장하는 공적인 영역과는 다르게 휴식 공간으로 후원 영역을 구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

정원은 크게 중심시설과 주변시설로 구분되는데, 중심시설은 뒤쪽의 집수시설에서 물을 받는 입수부, 괴석과 강자갈돌로 장식돼 물이 흘러들어와 차 있는 중심부, 중심부의 흘러넘친 물을 잠시 가둬 뒀다가 빼내는 출수부로 이뤄져 있으며 주변시설은 정원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조시설과 ‘ㄱ’자형 암거시설, 정원에서 필요하지 않거나 흘러나온 물을 가둬두기 위한 집수시설로 이뤄져 있다.
또한 정원은 비교적 급경사면에 위치해 뒤편에 설치된 대형 수조시설을 통해 수원에서 물을 끌어들이기 쉽고, 강우가 적을 때에는 최대한 많은 양의 물을 모으고 집중 호우시에는 정원시설의 파괴를 최소화하면서 물을 흘려보내기에 적합하다.
이렇게 높낮이를 활용해 정원 중심공간이 조성돼 있는 입지 여건은 소량의 물로 정원을 활기차게 구축할 수 있는 효과를 가진다. 기울기의 변화가 거의 없는 동서 방향으로 정적인 집수·정수공간을 배치하고 경사면을 활용한 남북방향으로 동적인 유수공간을 배치해 정원 전체가 균형을 가지고 어우러져 있는 양상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왕궁리유적 정원 유구만이 가지는 독특한 정원조경 원리로 볼 수 있다.
이외에 왕궁리유적 정원의 핵심적인 요소이자 다른 정원 유구들과 차별화되는 구조가 바로 정원 중심부인 연못이다. 왕궁리유적 정원에서 연못은 수조시설에 연결된 입수부를 통과한 물이 흘러 내려가면서 모여 있는 조경시설의 핵심공간이다. 연못은 수조시설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축대에 의해 조성된 높낮이를 활용해 일정한 높이로 물이 차 있다가 출수부로 빠져나가는 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장방형의 연못 내부는 바닥을 둥근 강자갈돌로 장식하고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괴석을 세우거나 뉘어서 폭포 주변의 경관을 형상화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연못의 공간구성 및 조경은 일반적으로 연못의 중앙에 두 개 또는 세 개의 섬을 배치하고 방장선산을 표현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 완벽한 형태 고스란히

우리나라 정원 관련 유구는 지역별로 약간씩 다른 양상을 취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정원은 사면을 직선 호안으로 구성한 방형의 원지인 ‘방지’가, 신라는 연못의 물가에 자연 곡선을 특징적으로 사용한 ‘곡지’가 이상적인 정원구성 및 조영원리로 표출됐다.
곡지는 신라와 일본에서 내외적인 기술 축적 및 문화 교류를 통해 지역적·시대적으로 이상향이 실현되고 있었으나, 방지는 그 자체가 가지는 조경용뿐만 아니라 저수용 등 실용적 기능이 강화되면서 정원 조경보다는 궁이나 산성 등의 저수용 시설이나 사찰 내 영지로 활용됐으며 방지 양식의 정원은 방형의 연못을 제외하고는 밝혀진 것이 거의 전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견된 왕궁리유적의 정원은 방지 양식 정원의 구성 및 조영원리를 구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또한 그간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안압지나 고려시대의 파주 혜음운지 같은 정원 유적이 발견된 적은 있었지만, 완전한 형태의 백제시대 정원이 발견된 것은 왕궁리유적이 처음이었다.
왕궁리유적 정원에서 발견된 구불구불한 물길은 중국 동진시대부터 유행했고 일본 헤이죠코 동원 정원의 모양과 유사했다. 이러한 점들은 왕궁리유적의 정원과 백제의 영향을 받은 고대 일본의 정원과의 비교를 통해 고대 동아시아 정원의 변화 양상을 규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