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천도 뒷받침 증거.. 일본 청련원에서 모습 드러내
왕실사찰 제석사 비롯해.. 고도익산 모습 그대로 전해져

◇ 관세음응험기는?

1050년경 중국 육조시대 관세음보살의 영험함을 담은 자료를 모아 복사한 고사본이 일본 교토 소재 청련원의 보물 수장고인 길수장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1953년 일본의 사학가인 목전체량 교수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이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설에 대해 힘을 실어주는 역사적 기록이 실려 있어, 단순히 전설인 줄 알았던 익산 천도설이 실제 역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으며 이후 연구를 거듭해 오고 있다.

관세음응험기는 송나라의 전량(374~426)이 쓴 관세음응험기 7조와 장연(5세기 전반)이 쓴 속광세음응험기 10조, 그리고 제나라 육고(459~532)가 지은 계관세음응험기 69조 등 3권의 책을 합해 1권의 책으로 엮은 지괴소설류로써, 관세음보살의 영험함이 나타난 역대 일화들을 담고 있는 기록이다.
이상 3권의 자료 말미에 다시 관세음응험기라 제목을 붙이고 2권의 백제 관련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하나는 백제인 사문발정의 관세음응험기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백제 무광왕의 관세음응험기이다.

◇ 반전의 계기 마련한 익산 천도설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새로이 정사를 경영하였다.”

관세음응험기에 나타나 있는 내용이다.
바로 이 기록을 근거로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설은 논란이 있던 전설에서 실제적인 역사로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됐다. 비록 그 지명은 왕궁이었지만, 천도와 같은 중요한 사실이 대표적인 정사인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에는 그냥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치부됐던 익산 천도설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근거가 관세음응험기를 통해 발견된 셈이다.
초기 이 관세음응험기는 본고장인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실전된 것으로 추정돼 왔고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그간 무왕의 익산 천도설은 문헌적인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남아있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던 관세음응험기가 일본의 청련원에서 발견되고 익산 천도와 관련된 기록이 발견됨으로써 익산 천도설은 비로소 문헌적인 근거를 갖추게 됐다.

이와 더불어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무광왕, 즉 무왕이 지모밀지(현재의 익산 금마지역)로의 천도를 위해 왕궁평성을 건설한 사실이 발굴조사 결과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어 기록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왕궁평성 외곽에 둘러진 거대한 궁장과 내부에 건립된 수많은 건물지, 정원시설, 대형화장실 등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며 당시 왕궁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수도에서만 사용됐던 수부명 기와까지 출토돼 익산으로의 천도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 관세음응험기에 보이는 익산

관세음응험기는 무왕의 익산 천도를 가리키고 있다.
점차 모습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는 왕궁리유적, 이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련된 제석사와 미륵사 등 살아있는 역사적 유물들로 미뤄 보아 익산지역이 무왕 대 백제의 수도였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 속에서,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이 사료적 신뢰도를 더해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
익산 천도설의 뒷받침과 함께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제석사가 화재로 소실됐다는 점이다. 지난 2003년 제석사지 북편 기와 폐기장에서 불에 그을린 상태의 소조 천부상 머리, 소조악귀상 머리, 각종 소조상 편, 벽체 편 등이 출토됐다. 이 유물들은 화재로 크게 손실돼 원형복원이 상당히 어려운 상태였지만, 제석사가 화재로 인해 소실됐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관 13년(무왕 40년) 기해 11월 제석정사의 화재로 법당과 탑 등이 모두 타 버렸으나 탑의 심초에 들어있던 금판경과 사리함 등만은 타지 않았고, 그것을 다시 절에 봉안했다’는 내용의 기록은 지난 1965년 왕궁리5층석탑의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국보 제123호 사리장엄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여 두 유적간의 연관성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 바 있다. 다만 동판으로 된 금강경과 이를 담은 나무로 만든 칠함, 사리병, 각종 칠보 등이 초석 중에 남아있었다는 기록과는 달리 동판의 금강경이 금도금 은판의 금강경이고 목칠함이 금동내·외함인 점은 다르게 나타났다.

이외에도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안기에서 무왕을 대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관세음응험기 역시 무왕을 대왕으로 표기하고 있어 사료의 신뢰도를 더하고 있다.

◇ 제석사의 사리장엄은 어디로?

639년 1월 29일 서탑의 중앙 심초석에 사리기를 봉안하는 등 미륵사는 서원의 건립이 한창이었다. 미륵사보다 먼저 조성된 제석사는 10개월 뒤인 639년 11월에 벼락으로 발생한 화재로 인해 금당과 7층 목탑, 회랑 등 많은 건물이 불에 타 폐사됐다.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에 따르면, 불에 탄 목탑의 심초석에서 꺼낸 사리장엄은 곧 공양을 시작해 다시 절에 모셨던 것으로 파악된다. ‘폐사된 사찰 외에 도대체 어디에 제석사의 사리장엄이 봉안된 것일까’하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이후 1965년 왕궁리5층석탑에서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이 관세음응험기의 기록과 흡사한 점이 드러나면서 이것이 제석사의 사리장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무왕은 임기 말년에 전소된 제석사에 대한 복원보다는 국력을 집중해 한창 건설 중에 있는 미륵사의 건립이 더 시급했을 터.

당시 미륵사는 목탑이 자리하고 있는 중원이 먼저 건립되고 그 다음으로 서원이 건립되던 시기였다. 중원은 서탑에 사리가 안치되던 해인 639년 이전에 이미 완공됐으며, 무왕 말기인 640년을 전후로 서원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렇다면 제석사의 사리장엄을 보관하기 위해 새로운 사찰을 건립하는 것보다 아직 건립되지 않은 미륵사의 동탑에 사리장엄을 봉안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서원의 조성이 한창이었던 시기에 동원의 조성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사리장엄을 오랜 시간 임시로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을 아닐까. 혹은 서탑의 경우처럼 이미 동탑의 사리장엄 공양자로 높은 신분의 왕족이나 귀족이 내정돼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석사지의 사리장엄은 미륵사가 아닌 왕궁리5층석탑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근 미륵사의 건립에 동원된 전문 인력들을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으며, 왕궁리5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의 모습이 관세음응험기의 기록과 많은 부분 부합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