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 이후.. 마지막 전성기 이끈 무왕에 대한 백제인들의 향수
정치적·문화적 부활 이뤄냈던 무왕의 삶.. 마음 속 영웅으로 태어나

◇ 백제인들의 바람

삼국유사 기이2 무왕조에 수록된 ‘서동설화’의 배경은 당연히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다툼을 했던 삼국 쟁패기다.
백제의 무왕과 신라의 진평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성을 띠고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서동의 탄생에서부터 성장, 선화공주와의 결혼, 왕위 등극에 이르기까지 무왕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따라서 그 시기는 당연히 무왕이 왕위에 오른 후이며, 미륵사라는 국가사찰이 완성된 이후의 한 시기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최소한 백제와 신라의 갈등이 봉합된 시기, 즉 최소한 삼국통일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렇다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이야기의 형성과 전승을 주도한 세력은 누구였을까. 백제 무왕의 이야기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인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여기에는 신라인과 백제인의 통합이라는 정치적 관용과 화해의 의사가 나타나는 것이며, 신라가 아니라 백제의 유민에 의해 전승됐다면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무왕에 대한 자긍심과 그리움이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적국의 영웅을 다시 부활시켜 논란의 불씨를 안고 가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당시의 신라가 그 정도의 아량과 관용을 베풀었다고는 쉽게 생각되지 않기에, 통일 후에도 남아 있던 백제인들에 의해 형성되고 전승됐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서동설화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곳이 미륵사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고도 익산인 것도 백제 무왕조에 담겨있는 이야기가 당시 백제인들의 희망과 바람을 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 왜 무왕인가

마를 캐는 가난한 서동이 아리따운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는데 그 인물이 무왕이었다는 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의 주된 요지라고 할 때, 주인공이 동성왕이나 무령왕일 수도 있고 백제의 왕과 전혀 관련 없는 인물일 수도 있는데 왜 하필 백제의 무왕으로 전해진 것일까.
사료에 따르면 무왕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뤄낸 인물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맨 먼저 한 일이 신라 공격일 정도로 정치적으로 전성기에 다다른 백제의 위용을 마음껏 과시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무왕대 싸움의 연대기를 보면,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것이 10회(602, 611, 616, 623, 624, 626, 627, 632, 633, 636)에 걸쳐 있고, 신라가 백제를 선제공격한 것이 3회(605, 618, 627), 고구려와의 싸움이 한 차례(607) 있었다.
이와 같이 이전에 비해 백제의 신라 공격이 월등하게 많이 나타나는 것은, 정치적인 역량을 지닌 무왕의 삼국일통에 대한 야심이 드러난 것임과 동시에 성왕에서부터 위덕왕, 혜왕, 법왕에 이르기까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을 택했던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무왕의 뜻대로 신라에 대한 공격의 성공에 힘입어 왕권은 자연히 강화돼 갔다. 한편으로 그는 대외공략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익산지역에 미륵사라는 사찰을 세우게 된다. 거대한 규모의 사찰을 건립함으로써 바로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를 대외적으로 표방한 것일 터. 이는 기존 귀족들의 견제를 확실하게 벗고 새로운 국가경영을 위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왕이 창건한 미륵사의 석탑을 두고 동국여지승람에서 동방 최고의 석탑이라 한 것에 비춰볼 때 무왕을 전후로 한 시대는 백제 문화의 전성기라 할 만하다. 백제의 문화적인 역량은 일본의 비조(아스카)문화를 건설하는 데 일조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덕왕 35년(588)에 왜국에서는 사천왕사, 법흥사, 반구사(법륭사), 봉강사(광륭사), 원흥사, 금강사 등 대사찰을 짓기 시작했는데 모두 백제의 위덕왕, 법왕, 무왕 등 3대가 조사공, 조불공, 와박사, 화사, 고승을 보내 건설해 준 것이라는 견해에 따르면 무왕대는 위축됐던 백제의 정치적인 역량과 문화적인 역량이 다시 꽃피어 오르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만하다.

백제 무왕의 역사적 삶, 백제문화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룬 임금으로서의 무왕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백제 유민들의 상실감을 달래주는 상징적 인물로 자리 잡아 서동설화를 통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이유다.

◇ 슈퍼맨을 기다린 백제인

백제 말기, 쇠퇴하는 나라의 재건과 부활을 꿈꾸었던 당시 백성들에게 무왕은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나 무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의자왕이 선대의 업적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갖는 무왕시대에 대한 향수는 매우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곧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수록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역사상 전해지는 영웅에 대해 강렬한 향수를 느끼는 것과 같을 터.
마를 캐 생업을 이어나가며 홀어머니를 모시는 효심에서부터, 놀라운 지략으로 신라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 끝내는 왕위에 오르는 그의 일대기가 백성들이 원하는 영웅출현의 기대에 딱 들어맞는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백성들의 이러한 무왕에 대한 향수는 그의 업적에 대한 회고나 그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 무왕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왕위에 오르게 되기까지의 역사적인 사실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백성들의 바람에 따라 여러 가지 설화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정착된 무왕의 출생과 성장의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거쳐 기록됐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 말미에서 일연은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고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하니 확실치 않다’고 해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과 민중에 의해 변개된 설화적인 사실의 기록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 설화적 사실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혼란을 겪은 일연뿐만 아니라, 백제 민중의 바람대로 무왕은 이제 역사적인 인물만이 아니라 민중의 소망을 실현시켜 줄 영웅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무왕은 다른 영웅들이 그러한 것처럼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신기한 출생담을 가지게 됐다. 용과 관계를 맺은 과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바로 그것.
예나 지금이나 용은 왕이나 하늘같은 매우 성스러운 존재로, 이는 곧 무왕의 혈통이 매우 고귀한 것임을 방증한다. 과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항상 마를 캐어 팔아 살아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는 도량이 한없이 넓으며 보통사람과 다른 기지를 지닌 인물이다. 그렇기에 후에 선화공주를 꾀로 유인해 아내로 맞이하고, 조력자인 지명법사의 도움을 얻기는 했지만, 결국 왕이 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어린 시절의 시련을 극복하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영웅의 탄생인 셈이다.

한편으로 무왕의 출생담은 귀족세력과의 다툼에서 왕권을 수호하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나라를 건설하려는 무왕과 그 세력이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민중의 신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조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나라가 망해가는 과정에서, 혹은 백제 부흥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아니면 이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 현실에서 무왕의 이야기는 영웅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는 백제인들에게 안성맞춤인 ‘거리’였던 것이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