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택 씨 가문의 왕후.. 서원·동원을
미륵과 관계 깊은 선화공주.. 중원을

미륵사의 창건과 관련, 선화공주의 수수께끼는 풀릴 수 있을까.

지난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에서 193자의 사리봉안기 명문이 발견됐다. 명문 내용은 미륵사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왕후인 백제 사택적덕의 딸의 발원으로 639년에 완공됐다는 것.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야기가 가공일 수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후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며, 갖가지 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극적이고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과연 허구일까’라는 생각을 쉽사리 지우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 ‘미륵’은 어디에

미륵사는 미래의 중생을 제도하는 미륵불의 출현을 기원하며 세운 사찰이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현재 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워주십시오.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하고 청하니, 왕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존의 상을 모방해 만들고 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에서는 왕흥사라 하였다)라 하였다. 진평왕은 각종 공인을 보내 역사를 도와주었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삼국유사 기이 무왕조에서는 미륵사의 창건이 선화공주의 발원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삼존이 출현하는 것을 경배하기 위해 용화산 아래에 건립된 미륵사. 이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던 선화공주는 사자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서동이 마를 캐면서 채취한 금을 신통력을 발휘해 신라 궁중으로 실어 나른 것도 사자사의 지명법사였으며, 미륵사를 창건하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운 것 또한 지명법사이기 때문이다.

지명법사가 주석한 사자사는 미륵신앙과 연결돼 있다. 사자사라는 이름은 도솔천 내의 사자상좌에서 유래한 것으로, 미륵보살은 상생해 도솔천 칠보대 안의 마니전 위에 있는 사자상좌에 앉아 설법하고는 화생한다.

즉 사자사는 미륵의 출현과 얽힌 신앙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며, 사자사의 주존불은 도솔천에서 주야로 육시에 설법하고 있는 교각의상의 미륵보살로 추측된다. 이에 따르면 도솔천에서 설법을 마치고 화생한 미륵존을 위해 건립된 것이 바로 미륵사인 셈이다.

미륵사는 사자사와는 달리, 현재 도솔천에서 교화한다는 미륵보살을 봉안하지 않고 당래불인 미륵존을 모셨다. 이는 백제 무왕이 미륵사의 창건을 통해 미륵불의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가 산을 등지고 강에 임박해 창건됐고 꽃과 나무가 수려하게 장식됐으며, 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갔다는 표현도 용화이상세계의 설정과 연관된다.

무왕은 용화세계의 이상을 백제 땅에 실현하기 위해 미륵삼존을 봉안했고, 미륵사를 각 세 곳의 가람으로 배치해 용화수 아래에 미륵불이 출현해 3회의 설법을 통해 모든 중생을 제도함을 비유했다. 이로써 백제의 미륵불은 용화산 아래에 출현하고 그 자리에 세 군데의 설법 자리를 미륵사의 건립으로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미륵사지석탑 사리봉안기의 명문을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알 수 있다. 미륵과 관련된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리봉안기 명문에는 ‘석가모니의 간략한 일대기와 함께 백제 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 가람을 창건하고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명문을 보면 미륵신앙이 아니라 석가신앙(법화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미륵신앙과 법화신앙은 백제 불교의 두 줄기로, 미륵신앙은 석가모니 다음의 부처인 미륵불을 숭상하는 것이며 법화신앙은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기본 사상으로 하는 ‘법화경’의 내용을 신봉하는 것이다.

◇ 선화공주는 미륵사 중원을

사리봉안기 명문에 따르면 미륵사를 발원한 주인공은 백제 사택적덕의 딸이다.

당시 백제 명문가였던 사택 씨 가문 가운데 대좌평의 지위에 오른 ‘사택지적(沙宅智積)’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사택지적의 이름인 ‘지적(智積)’은 불교와 관련해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법화경에 따르면, 전륜성왕(轉輪聖王)의 큰 아들인 대통불(大通佛)에게는 석가와 지적 등 16명의 아들이 있다. 따라서 계보는 전륜성왕에서 대통불 그리고 석가모니와 지적으로 이어지며, 석가와 지적은 형제 관계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소 조경철 박사는 이 계보를 백제사와 결부시키면 딱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조 박사에 따르면 전륜성왕은 백제 성왕, 대통불은 위덕왕, 석가모니는 법왕, 지적은 사택지적이 된다. 즉 당시 백제 왕실은 성왕 대부터 왕계를 석가모니 가계와 연결해 왕실의 신성성을 고양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지적’으로 대표되는 사택 씨 가문은 왕실과의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조 박사는 “무왕의 왕후가 된 사택적덕의 딸이 석가신앙(법화신앙)에 기초를 두고 639년 미륵사 서원을 건립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동원의 경우 석가의 대칭인 다보불로 봐야 한다”면서 “동원도 백제 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는 어찌된 것인가. 조 박사는 ‘선화(善花)공주’의 이름인 ‘선화’에 주목했다. 삼국유사 탑상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에는 ‘신라 흥륜사 진자 스님이 화랑으로 화신해 세상에 나타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꿈에서 웅진의 미륵선화(彌勒仙花)를 찾아가라고 전하고 있다.
이를 두고 조 박사는 “선화라는 이름이 미륵과 관계가 깊다”면서 “기본적으로 미륵사는 미륵을 본존으로 하는 절이었기 때문에, 중원 건립에는 미륵신앙에 돈독한 다른 한 명의 발원자가 있었을 것이며, 그 발원자는 바로 선화공주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삼국유사의 미륵사 창건기록에서도 선화공주는 미륵선화처럼 미륵이 하생하는 미륵사를 건설하고 있다”면서 “미륵사 가람 배치 가운데 으뜸인 중원은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무왕이 건설했을 가능성이 가장 짙다”고 주장했다.

◇ ‘왕후’가 아니라 ‘부인’

선화공주의 존재와 관련, 무왕의 왕후가 아니라 바로 아래인 부인이었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국가기록원 길기태 박사는 선화공주와 무왕이 629년 미륵사 중원을 세웠다는 견해에 동의하면서, 그 직후인 630~632년 사이의 정치적 격변에 주목해 632년 무왕의 장자인 의자왕이 태자로 책봉된 시점에 눈길을 돌렸다. 길 박사는 “바로 이 격변기에 법화신앙을 따르는 사택 가문이 급부상했으며, 이후 639년 법화신앙에 기초한 미륵사 서원이 건립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삼국유사에 선화공주를 부인(夫人)으로 칭하고 있다는 것에도 주목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따르면, 천자는 후(后)→부인(夫人)→세부(世婦)→빈(嬪)→처(妻)→첩(妾)을 둔다. 이를 근거로 길 박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진실이라면, 선화공주는 왕후라기보다는 부인의 신분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