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성치는 깃발의 행렬.. 그 가치의 재발견
마을공동체 회복 첫 발.. 지켜나가기 ‘절실’

◇ 함께 한바탕 놀아보세

“갠지 갠지 갠지 갠”
“덩 덩 쿵 기닥 쿵”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장구소리며 꽹과리 소리다.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아이들 손을 잡고 가는 길목, 저 멀리서부터 그 기운이 슬그머니 다가온다. 자칫 비가 올 듯한 하늘이 아쉽지만, 대수롭지 않다.
이내 보이기 시작하는 기다란 깃대에, 눈인사를 해가며 지난치는 마을 주민들에,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시큼한 막걸리 내음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지난달 22일, 40여년 만에 다시 마을을 찾은 기싸움이 펼쳐진 함라를 찾았다.

음력 정월 보름날 각 부락의 농악대(農樂隊)들이 농기(農旗)를 들고 모여 농악대 창설의 연대순에 따라서 형제의 위치를 정한 후, 각 농악대 간에 농기에 대한 읍례(揖禮)를 거행하고 잔치를 베풀어 한바탕 노는 ‘함라 기싸움’은 함라면의 옛 이름을 따 ‘함열 농기뺏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역 곳곳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여타 다른 놀이와는 달리, 보름 전날인 14일 기에 대한 고사를 지내고 보름날에는 농기 행차 및 농기 뺏기싸움이 벌어지는 함라 기싸움이 이날 함라초등학교 앞에서 펼쳐졌다.

고사 상에 돼지머리를 올린 채, 행동·천남 두 마을의 주민들이 모였다.
기를 들고 들썩들썩 하기를 수십여 차례, 너나 할 것 없이 주위를 돌며 ‘한바탕 놀아보세’의 판이 벌어졌다.
비록 예전과 같이 대여섯 개의 부락이 전부 모이지는 못했지만, 명맥이 끊겨 기억 너머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기싸움을 재현하기 위해 40여년 만에 내디딘 첫 발걸음이라는 점에 기대가 크다.

한 자리에 모인 마을 주민들은, 흥이 절로 난다. 머리고기 안주에 벌컥 들이킨 막걸리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그때에 대한 그리움과 설렘, 하늘거리는 꽃나부 풍장의 가락과 아우성치는 깃발의 행렬, 그 뒤를 쫓던 아련한 기억들이 아직 마음 한 편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장구가락 꽹과리가락이 서로 맞지 않아도, 그 손놀림 그 눈빛 하나하나가 어디를 통해서든지 안으로 들어온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같이 호흡을 하며 뜀박질을 하게 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서로를 보고 웃는다.
그렇게 이어지는 놀이판 속에 기억을 더듬어낸 이들은 물론, 생전 처음 이를 접하는 어린아이들도 할머니 손을 잡고 나온 손자들도 어른들과 함께 또 다른 기억을 만들어 낼 마을주민이 된다.

셀 수 없을 만큼 연습에 연습을 더해가며 마침내 공연에 올라 결과를 내보이며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닌, 박수치는 손을 붙잡고 이끌고 나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한바탕 놀아보세’의 판이 벌어지는 것이기에 더욱 흥이 나고, 더욱 의미가 크다.

◇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마한과 백제의 고도로 알려진 익산지역에는 예전부터 ‘기세배’라는 전통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현재 금마면에서 보존되고 있는 기세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함라면 주민들은 기세배의 시초가 ‘함라 기싸움’이라고 전한다. 달리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함라에서는 기싸움이 펼쳐졌다고 한다. 당시에는 멀리 김제시를 비롯해 이웃 마을에서 구경 오는 사람도 꽤나 많았으며, 사람들이 몰려 장이 설 정도로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기억들을 토대로 당시의 기싸움을 재현해 본다.

섣달 그믐날 밤이면 마을은 풍물을 울리며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메구(메귀)꾼들로 떠들썩해진다. 이는 한 해 동안의 잡귀를 몰아내는 의미로 행해졌으며, 이날 아이들은 대나무 빗자루에 불을 붙이고 우물·부엌·변소 등을 따라다니기 바빴다.
정월 초하루를 지낸 다음 이튿날부터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걸립굿을 벌였다. 걸립굿은 보통 사나흘에 걸쳐 벌이는데, 풍물을 치며 집집마다 방문해 지신밟기를 하며 돈이나 쌀을 걷었다. 또 초사흗날부터는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 집집마다 고사를 지냈다. 큰 바위 밑이나 고목 등에서 떡과 음식을 차려놓고 소원을 빌었다. 1950년대만 해도 그런 장면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을 만큼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떡시루 엎으러 다닌다’는 장난스러운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정월 보름이 가까워지면 본격적인 기싸움이 시작된다.
기싸움은 모두 일곱 마당으로 나눠진다. 실제 싸움을 시작하기 전의 과정이 매우 단단한 형식을 갖추는데, 이는 기싸움이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야제에 해당하는 기고사는 음력 정월 14일에 보름날에 있을 기싸움을 앞두고 각 부락 단위로 거행하는 농기에 대한 고사이다. 각 부락의 유지들이 거출해 3색과를 비롯한 각종의 제수를 정성껏 마련해 그 부락민 가운데 어느 한 집(특히 어떤 소망이 있는 집에서 유치) 안에 세워놓은 농기 앞에서 그 부락 좌상의 집행 아래 거행한다. 고사가 끝나고 부락민들은 음식을 고루 나눠 먹게 되는데, 이는 여느 고사와 마찬가지로 병에 걸리지 않고 복이 온다는 믿음에서 온 것이다.

음력 정월 15일 기싸움이 있는 날이 되면, 각 부락의 장정들은 농기를 앞세워 호위하고 흥겨운 농악을 울리며 싸움터로 출전한다. 싸움터는 마을 앞에 넓게 펼쳐져 있는 들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냇가의 모래밭이다.
이 때 전 해의 농사가 잘 돼 부락의 형편이 좋은 해에는 기생이나 소년 재인(광대)을 사서 곱게 단장시켜 장정의 어깨에 올려 세워 농기의 길을 트기도 한다. 이 역할을 맡은 기생을 ‘참꽃나무’, 소년 재인을 ‘중꽃나무’라고 하며 이들은 장정의 어깨 위에서 춤과 노래로 농기 행차의 흥을 돋우는데, 농악놀이나 굿에서 무동을 어깨에 올리고 흥을 돋우는 것과 유사한 모습이다.
기싸움에 참가하는 마을은 수동·교동·안정·옥하리(천남·천북)·행동(역말)의 5개 마을로, 각자 마을의 기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기세등등하게 내려와 서로 서열에 따라 예를 갖춰 기세배를 올리거나 받아야 되는데 이게 또 쉽지 않다. 서로 자기 마을이 서열이 높다고 주장하며 대치하는 것이다.

안정은 수동·교동 마을에 비해 확실한 동생의 위치에 있으며 행동 또한 옥하리에 군말 없이 기세배를 올리나, 문제는 먼저 수동과 교동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 두 마을은 서로 먼저 기세배를 하라고 옥신각신 시비를 벌이는 것이다. 수동은 원님이 사는 마을이고 교동에는 향교가 있어 공자님을 모시는 마을이기 때문에 서로 형님이라고 우위를 주장한다.
그리고 5개 마을은 다시 수동·교동·안정이 한 팀을 이루고 옥하리·행동이 한 팀을 이뤄 기세배를 주고받고 역시 기를 더 많이 숙이라느니 말라느니 하며 싸움을 벌인다.
이렇게 기세배를 하는 도중 서로 시비가 벌어져 싸움으로 번지는 것이 바로 기싸움이다. 기싸움에서는 상대방의 깃대를 부수는 것은 물론 상대방의 풍물을 깨버리기도 하는 등 싸움이 격렬해지기 일쑤다.
기싸움에서는 깃장을 빼앗아 가면 승리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깃장목(꿩장목)을 빼앗아간 마을은 풍년이 든다고 전해져 일단 기싸움이 벌어지면 그 기세가 대단히 무서웠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때로는 힘이 약한 마을에서는 다른 마을이 격렬히 벌이고 있는 싸움의 혼전을 틈타, 얼른 다른 마을 농기의 깃장목만 빼서 달아나기도 했다.
이렇게 한바탕 기싸움을 벌인 후에는 반드시 모두 화해를 한다. 이긴 부락의 장정들은 농기를 앞세우고 패자를 위로하는 아량을 베푼다. 다른 지방의 기싸움에서는 그 승패로 논물과 작황의 우선권을 정한다고 하나, 함라 지역에서는 이러한 조건 없이 승자나 패자 모두 어울려 흥겹게 즐기는 특색을 가진다.
화해한 후에는 다시 한바탕 합굿으로 풍물을 치고 기놀이를 벌인다. 그리고 마을 안을 돌아 함열읍의 만석꾼이었던 세 부잣집을 차례로 찾아가 풍물을 치고 술과 음식을 얻어먹은 다음, 각자 마을로 돌아간다.

싸움이라고 해도 끝나면 서로 웃으며 지냈던 그때, 그 기억을 더듬어 그리움과 설렘을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이날 첫 결실을 맺었다. 모쪼록 그때 그날처럼 온 마을에 신명나는 장구가락과 막걸리 향이 다시 한 번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