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길 위에서.. 유유자적
쉽지 않은 선택 되새기며.. 주위 돌아보는 여유
군데군데 숨은 달팽이 이정표 찾는 재미도 쏠쏠

◇ 누구나 순례자가 된다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이 나의 소원이니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이 같을 뿐이요, 때리고 죽여도 역시 이 같을 뿐이니 빨리 때려 죽여 달라.”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상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죽기 전 배교를 종용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도 시종일관 답했던 말이다.

그가 자리하고 있는 나바위에서부터 이곳 천호성지까지가 세계순례대회 조직위원회가 선정한 아름다운 순례길 제3코스다.

순례란, 신앙행위의 일환으로 종교상의 성지나 영장을 찾아다니면서 참배하는 여행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원래의 목적이 몸과 마음가짐을 바로하고 이를 통해 바라는 바의 성취와 속죄의 효과를 기대하는데 있기에, 굳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가 볼만한 여정이다.
오늘 이 길을 선택해 걷기로 한 이유다.

그 출발점 천호성지 앞, 한겨울 바람이 스산하다.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노령산맥의 대둔산 줄기가 서남 쪽 호남평야로 이어지면서 충남과 전북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천호산(天壺山).

이 산은 그 이름대로 천주에 대한 신앙을 지켜낸 사람들을 품어 안고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를 담은 병(壺)의 구실을 하고 있다.

그 옛날 순교자들의 자취를 따라가며 여유를 가지고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는 마음가짐으로 길에 나섰지만, 발걸음이 선뜻 방향을 잡지 못했다.

느리게 걷기를 마음먹고도, 여유를 가지기로 한 선택임에도, 어쩔 수 없는 시간의 압박에 빠른 걸음이 될 것만 같은 초조함 때문이었을까.

화로 옆에라도 앉아 있는 양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차가운 바람에 입술이 쓰다.

다행히도 멀리 손을 벌리고 방문객을 맞는 커다란 예수 상이 눈에 들어온다.
비록 이름뿐인 천주교 신자이지만, 그 하나로 스산했던 마음과 발걸음이 한결 안정되고 가벼워진다.

이내 마음이 안정되니 주위의 풍광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온화한 미소의 석상, 가지런히 쌓인 돌담, 요란스러워 보이지 않게 바람을 타고 내려앉은 낙엽, 평화롭게 저물어가는 해가 드리워진 연못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차분하게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이곳이 천호성지로부터 나바위 성지까지의 순례길 3코스, 그 첫 발걸음이다.

◇ 아무나 쉽게 찾지 않는 길.. 그리고 여유

차분한 느낌의 천호성지를 뒤로하고, 천호산 남쪽 능선을 따라 산을 넘기 위해서는 문드러미재를 지난다.

문드러미재는 예전 여산에서 전주로 가는 지름길 중 하나로 알려져 고려시대 왕건의 대군이 주둔하며 전주 공격을 계획하는 한편 후백제의 투항을 기다렸던 곳으로, 가파르지 않고 완만한 경사가 있는 이곳에서 소소한 작은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한때 지름길이었던 이곳은 현재 시원하게 포장도로가 나 있지만, 천호성지를 출발점으로 나바위로 향하는 유유자적 느리게 걷기에서는 첫 번째 관문이기도 하다.

꼬불꼬불 도로를 따라 얼추 고도가 높아지면, 여산면 호산리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겨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사이로, 보기만 해도 평온해질 법한 마을 풍경이 그려지는 순간이다.

도로 군데군데, 순례길을 찾은 이들을 위한 달팽이 이정표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고개를 내려오면, 백운사·문수사·백련암 등을 지나 가람 이병기 생가와 여산향교, 여산숲정이성지 등이 자리한 여산면 시골길이 이어진다.

우뚝 선 전봇대나 다리 기둥, 때로는 별도로 세워진 푯말 등으로 길을 안내하는 달팽이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가을걷이가 끝나고 한가롭게 비어있는 논밭과 줄지어 서 있는 비닐하우스 등 있는 그대로의 시골 마을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차를 타고 아무생각 없이 지나쳤을 지극히 평범한 모습들이지만, 뉘엿뉘엿 저가는 해가 서둘러 일과의 마감을 알려주려 하는데도 불구하고 조급함이 없다.
이 여유가, 다시 한 번 이 길을 찾아 걷는 이유가 된다.

순례길이라 해서 거창하지 않다. 신자로서의 금욕이나 반드시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는 정신무장도 필요 없다. 크게 중요치도 않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길을 걷기만 해도 큰 숨이 쉬어진다. 평소 느끼지 못한 여유에, 한결 머리가 맑아진다.

길섶 갈대밭길이 한참 이어진다.
잘 포장된 우리네 문명의 이기가 바로 옆에 있기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섣불리 선택되지 않는 길이다.
그 때 그 순교자들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남들이 쉬이 택하지 않은 길을, 쉬지 않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택하고 갔지 않았을까.
곱씹으며 옮기는 발걸음이 자연스레 완보(緩步), 느리게 걷기가 된다.
느리게 걸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

비단 순례의 길이 아닐지라도, 걸어갈 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완보가 아니라 속보(速報)의 한 증거다. 서둘러 발걸음을 떼려니 땅바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질척거리는 진흙탕 길, 돌부리 하나하나를 조심하려니 당연한 몸의 반응이다. 더욱이 고난의 연속인 순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오죽하랴.
그러다 보면 주위에 눈을 돌릴 새가 없다.
그간 차를 타고 지난 길이, 걷다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다.
실개천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햇살이나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롱대롱 춤을 추는 나무 이파리, 저쪽 길섶에 핀 키 낮은 야생화가 끊임없이 카메라 셔터를 유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몸의 끝인 발끝만 보고 마는 속보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걸음이다.

한편으로는 느리게 걷기가 힘든 걸음이기도 하다. 호흡이 가쁜 걸로 치면, 또는 흘린 땀을 따지고 보면 속보가 더 고될 것은 단순한 사실이다.
하지만, 느리게 걷기는 더 어렵다.
느리게 걸으려면, 우선 급속의 시대 속에서 시간의 압박을 이겨내야 한다. 빨리 끝을 보고 싶은 심리를 눌러야 하고, 앞서 간 사람에게 뒤처졌다는 불안을 없애야 가능하다.
느리게 걸어야 주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비단 순례길 뿐만이 아니다.
내 발끝이 아닌, 주위의 일상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

‘느리게 걷기가 그 시작이 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을 찾는 것이 아니더라도, 오늘 지금부터 느리게 걷기에 나서보는 것이 어떨까.
다른 누구나가 택하지 않을 길을 갔던 순례자들처럼, 다수가 택한 스피드가 아니라 느리게 걷기라는 또 하나의 순례길을 선택해 보는 것은 어떨까.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