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편집자주>

◇ 익산대로의 시작.. 분주한 발걸음

익산고속버스터미널에서 김제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평화육교(목천로)와 맞닿는 연결 부분부터 익산대로는 시작된다. 이 도로는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연결하는 강경의 경계지점까지 총 약 29.19km 길이로 쭉 뻗어 이어져 있다.

익산대로의 시작점을 출발해 4차선의 도로를 따라 300m쯤 가다보면 우측엔 익산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자리하고 있다.

터미널은 수많은 사람들의 직장이나 학교의 통로다. 분주한 발걸음들을 따라 내부로 들어가 보니, 요깃거리를 제공하고 여행자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분식점과 제과점, 편의점 등이 마련돼 있고, 대합실은 출발 시간에 앞서 도착한 승객들을 수용하고 있다.

평일인 탓에 터미널 내부는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버스를 이용하는 이용객들의 발걸음만큼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터미널이 위치한 평화동은 익산시내의 최서남부에 위치해 있다. 본래 평화동은 평화동 시장과 이리상업고등학교(現 제일고등학교) 그리고 터미널 부근일대의 작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1998년 목천동이 통폐합돼 당당히 큰 마을이 됐다.

평화동은 익산역의 끝자락에 붙어있는 변두리였지만 구시장이 가깝고 공용버스정류장 및 고속버스 정류장이 있어 예부터 시내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곳이다.

40년만의 무더위가 찾아와 30도를 웃돈 5월 27일의 아스팔트의 열기는 오후 여섯시를 넘겼음에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도보에 나선 기자들의 발걸음이 그 기세에 눌렸다.

◇ 온통 미나리깡이었던 그때 그 시절

정신을 차리고 더운 날씨를 뒤로한 채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다보니 예스러운 모습의 자그마한 구둣방이 눈에 들어왔다. 30년 이상 평화동을 지켜온 구둣방 주인과 지인이 나란히 앉아 나누는 담소에 기자가 끼어들어 보기로 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뒤 터미널 주변의 옛 모습에 대해 묻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70년대 당시에는 평화동에 터미널이 없어 버스 종점이 저기 평화사거리 부근에 있었지. 지금 여기 터미널 자리는 옛날에 전부 다 미나리깡이었어.”

“그때 당시엔 지금처럼 큰 길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시기였고 터미널이 들어서고 이리역 폭발사고로 인해 평화동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도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지. 그때는 버스비가 20원 30원 정도 했는데, 고구마나 옥수수나 뭐든 돈이 되는 거면 그걸 내고 버스를 탔지. 버스 안내원 알지? 안 계시면 오라이 하는 거. 75년에는 버스 안내원이 남자이기도 했어.”

“또 젊은 청년들은 버스를 타고 금마 미륵산 일대 석재공장으로 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지. 당시 금마에는 재무시(GMC) 도락꾸(트럭)라는 산을 올라갈 수 있는 산악용 차량이 있었고 그 차에도 조수가 있었어.”

듣고보니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로의 위력에 경탄이 절로 났다.

주변에는 타지에서 익산을 방문하기 위해 찾아 온 사람들을 위한 숙박시설들이 즐비해 있었고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건물들과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터미널을 뒤로한 채 길게 뻗은 대로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지금에 와서 찾아보기 힘든 다방, 콜라텍, 예스러운 가정집 등 현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매번 차를 타고 지나치던 길을 걷다보니 그동안 놓쳐왔던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옹기종기 집 앞 평상에 모여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사람들, 손님이 오지 않아 날아다니는 파리를 쫓고 있는 상인들, 개구쟁이 동네 꼬마들의 뛰어다니는 모습 등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었다.

◇ 서울 명동 부럽지 않았던, 평화동 거리

평화사거리를 지날 때 쯤 어디로 가야할 지 갈팡질팡하던 찰나에 눈앞에 우중충한 분위기의 골목길이 시선을 끌어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골목길 양 옆으로 줄지어 있던 가게들은 이른 시간임에도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이렇게 한적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거리는 조용했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벽에 걸려있던 간판들은 옛날의 추억을 그대로 간직한 듯 낡았고, 건물 안 희미한 불빛만이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스무 걸음 정도 걸었을까. 생선가게가 하나 보이기 시작했고, 그 곳엔 동네 주민 서넛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동네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 뒤 자연스레 자리에 함께 했다.

“80년대 평화동과 중앙동 일대는 서울로 말하자면 명동이라고 볼 수 있었지. 평화동이 익산의 관문이라고 불릴 정도로 발전도 많이 됐었고 상업 활성화도 많이 됐었어.”

이곳의 옛 모습을 묻자 생선가게 주인은 곧장 회상의 나래를 폈다.

“40년 전 막내아이를 출산하고 터미널에서 포장마차도 운영했어. 당시에는 고가다리도 없었고 나중에 생겼는데, 고가다리 만드는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40kg이 넘는 시멘트를 나르는 일도 했었지. 그거 혼자 못 들어. 장정들이 달라붙어 머리에 이어주면 그때는 내가 너끈히 들고 날랐지.”

“고가다리가 없었을 당시에는 지금의 고가다리 아래 부근에 버스 한 대 정도 지나갈 정도의 다리가 하나 있었고, 당시 주민들은 철길을 가로지르며 다리를 이용했어. 지금 앞에 있는 도로가 당시 큰 길이었고, 그 옆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그로 인해 쌀 장사꾼들이 장사진을 이룰 정도로 엄청 붐볐지”

생선가게 주인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고,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주민의 이야기는 더욱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70년대에는 익산대로와 지금 서있는 길 사이 골목길이 가장 큰 길이어서 그 길로 서울로 가는 버스도 다녔고, 당시 익산대로는 골목길에 불과했지. 근데 평화동과 중앙동 일대로만 버스가 다니고 구시장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없어 구시장 상인들의 반발이 심했어. 그래서 평화육교에서 구시장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통됐지.”

“익산대로로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원래의 큰 도로를 국가가 시민들에게 불하해 나눠줬고, 큰 도로 주변으로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길이 골목으로 변한 거야. 이후 익산대로가 중심도로로 변하면서 원래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도로에 사람이 끊기고 동네가 낙후되게 된 거지.”

아니나 다를까 90년대 중반까지 익산역이 철도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며 중앙동과 평화동 일대는 인산인해로 붐볐으나, 그 후 자가용의 증가로 인해 철도 이용객이 감소함에 따라 평화동 일대는 도심 속 공동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그로인해 평화동 일대는 공·폐가가 많아지고, 거주하는 주택들도 대부분 30년 이상 노후 돼 재해와 안전·위생이 매우 취약한 상태로 전락했다.

이처럼 낙후된 지역사회의 활성화가 절실한 상황에서 지난 3월 익산시는 국가 공모사업인 ‘도시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조 프로젝트’에 선정돼 창인동 및 평화동 일원 약 3만5,000㎡가 오는 2018년까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을 하게 돼 지역 주민들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익산대로가 생기기 이전에 큰 도로였던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로 한 블록정도를 걸어가니 주택들이 밀집돼 있는 사이로 골목길 하나가 좁고 길게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비록 익산대로6길이라는 이름으로 변했지만, 과거 평화동의 중심지 도로였다는 생각때문인지 변화된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현재 익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단면이다.

서울의 명동이 부럽지 않았던 동네가 어느덧 타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소외돼 가고 있는 모습에, 철도교통의 요충지로서, 섬유·석재·보석산업의 메카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도시가 이제는 이렇다 하게 내놓을 것 없는 모습이 된 것처럼 느껴져 마음 한 편이 휑했다.

◇ 뼈아픈 역사의 현장,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소

골목골목 신기한 곳이 많아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담장 너머로 새빨간 꽃들이 인사를 하며 사람의 왕래를 반기는 듯 보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꽃을 감상하던 중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익산문화재단' 표식이었다.

간판을 따라 걷다보니 눈앞에 붉은 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의 원형이 보였다. 창문과 창문 사이에 적벽돌은 치장 쌓기로 돼있었고, 테두리보의 벽면이 붉은 벽돌로 쌓여 있는 것이 독특하면서도 색다르게 느껴졌다.

가까이 가보니 입구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181호 익산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소 및 창고’라고 쓰여 있었고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설명문구가 눈에 띄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익산은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 잡으며 번성하기 시작했다.

익산이기 전, 이리였던 마을은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호남평야에서 곡식을 수탈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1907년에 전군도로를 개설했으며, 1914년 이리를 연결지점으로 호남선 철도가 놓이면서 만경강 유역의 한촌은 근대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1930년 일제는 익산과 옥구군의 농장 지주들이 농지를 관리하고 쌀 생산량을 늘리고자 익옥수리조합의 사무소를 건립했고, 1996년까지 전북농지개량조합의 청사로 사용되다 지금은 익산문화재단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처음 익옥수리조합 사무실의 본질을 알지 못했을 땐 건물의 외관만 보고 익산에도 멋진 건축물들이 골목 곳곳에 숨겨있다고 생각했지만, 연혁을 알게 되니 쓰디 쓴 마음이 차올랐다.

문화재단 건물을 둘러보고 나오니 금세 해가 서쪽 하늘 아래로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송승욱·강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