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거리·즐길거리·쉬고 싶은 거리를 꿈꾸다
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편집자주>
◇ 차 한잔의 여유.. ‘전통 茶 문화원’ 익산문화재단을 기점으로 익산역까지의 익산대로 동쪽 변에는 어떤 골목들이 얼키설키 얽혀있을까. 해가 아직 저물지 않은 저녁 6시의 평화동 일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산하다. 천천히 길을 걸으며 골목 한 블록씩 지나치다 보니 익산대로였던 길이 중앙로가 되기도 하고, 중앙로였던 길이 고봉로로 바뀌기도 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길이 그렇게 삶의 네트워크라는 것을 새삼 발견하고, 골목길을 만들며 앞서간 사람들에게 저절로 목례하게 된다. 그들은 이 길에서 누구를 만났을까. 다양한 길들이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듯, 연결된 도로들은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사는 모습들에 그대로 닿아있었다. 그러나 인적이 끊긴 골목길 변의 콘크리트 건물들은 싸늘하게 돌아앉아 있다. 순간 방향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그때 '전통 茶 문화원'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길손을 반기는, '만남'을 간절히 바라는 느낌이 기자에게만 전달되었을까. 자석에 이끌리듯 발걸음은 차 문화원으로 향했고, 어느새 기자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시원한 통유리로 들여다보이는 실내는 옛 가옥의 느낌을 풍기는 가운데, 아기자기한 다기를 비롯해 서적과 음반, 작은 난로가 공간을 꾸미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공기중에 떠다니던 은은한 내음이 코 속으로 느긋하게 끼쳐들었다. 잠시 뒤 온몸으로 퍼진 차향에 지친 심신을 위로 받는 듯 했고, 정신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차를 판매하는 전통찻집이 아닌 시민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으로, 누구나 간단한 절차로 회원이 되면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차 문화 공간이었다. 또한 누구나 쉬어갈 수 있으며, 차를 좋아하고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이 언제든 찾아와 손수 차를 끓여 마실 수도 있고, 다도에 대한 교육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아기자기한 내부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이런 곳이 있었다니"라는 감탄사를 기자도 모르게 연발했다. 한참동안이나 차향에 취해 발걸음을 떼지 못하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도로 위로 나섰다.
◇ 익산의 ‘작은 명동’ 원도심 옛 영정통거리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나아가는데, 평범한 아스팔트 도로와는 다르게 회색빛깔 블록들이 차곡차곡 이어진 길이 눈길을 끌었다. 익산시가 야심차게 조성한 익산 문화예술의 거리 끝자락이었다. 문화예술의 거리 조성 사업은 지난 2012년부터 5년간 총 사업비 52억원을 투입해 영정통거리(황해사~국빈반점)에 예술인들의 작업 공간 및 다목적 전시·공연장 등을 설치하고, 다양한 문화예술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거리 활성화 사업으로, 익산문화재단이 시로부터 위탁받아 진행해 왔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중앙동 일원의 문화예술거리는 일방통행으로 전환됐고, 도로상에 어지럽게 얽혀있던 각종 배전선로는 지중화 되었으며, 길은 화강암과 점토블록 등으로 깨끗하게 정비됐다.
지금은 문화예술의거리라는 명칭이 생겼지만, 익산의 옛 홍대거리라 불리는 영정통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가로등마다 독특한 조형작품들이 설치돼 있어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쏠쏠했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거리는 아직도 미완의 상태다.
거리는 깔끔하게 조성돼 있었고, 주변 곳곳에 조형작품들이 설치돼 있었지만 길 옆의 노후된 건물들이 미관을 해치고 있었다. 오고 싶은 곳도 못 되고 살고 싶은 곳도 되지 못한 거리다. 사람들이 있어야 무엇이라도 할 텐데, 사람없는 문화예술거리는 흡사 촬영이 없는 세트장 같았다. 이른 시간임에도 셔터를 내린 가게들이 대부분이었고, 정상적으로 영업을 하는 점포도 몇 되지 않았다.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이동하다가 동네 슈퍼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던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주민들에게 다가가 과거 영정통거리의 모습을 묻자 평화동에서만 67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주민이 회상에 젖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지금 문화예술의 거리는 옛날에 영정통거리, 영정로라고 불렸지 아마. 영정이란 말이 가장 번화가라는 뜻으로 지금 서 있는 영정통거리에는 사람들이 엄청 붐볐어. 서울 명동 저리가라 였다니까. 이리역 폭발사고로 이 주변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어. 그때 당시 역 일대 갈산동은 갈대밭이었고, 중앙시장은 과수원이 자리하는 등 이리역과 불과 1km만 떨어져도 숲과 논뿐이었지.” “휴대폰이 없었던 그 시절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역전에 시계탑이 있어 만남의 장소였어. 친구나 애인을 만나더라도 시계탑에서 만나 요 앞에 있던 이리극장으로 영화를 보러가기도 했고 지금은 가장 오래된 술집 중 하나인 OB엘베강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목을 축이기도 했지.”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과거 도심의 역할을 수행했던 갈산동과 중앙시장 일대가 논과 밭이었다니! 평화동 주민은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씩 꺼내 계속 이어갔다. “예전에는 요 앞 신일전기사 앞에 이리극장이 하나 있었고, 그 뒤로 삼남극장이 있어 청춘남녀들이 많이 오고가곤 했지. 특히 영정통거리가 문화·예술도 많았지만, 패션의 거리였다니까. 지금도 양장점들이 많잖아 주변에. 그때 당시에는 모니카 양장점이라고 여학생들 교복을 만들어주는 곳이 있었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명품교복점이었지. 양장점도 많았고, 보석상점도 많아서 익산 패션은 여기서 다 볼 수 있었어. 특히 ‘감리당‘이라고 하는 빵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곳에서 단팥빵 시켜놓고 여학생들이랑 미팅도 자주하곤 했지.” “지금은 너무 많이 변해버렸어. 거리는 예쁘게 만들어 놨는데 건물들이 보는 것처럼 다 노후화 돼 사람들이 찾질 않아. 또 도시가스도 설비가 되지 않아 음식점들이 입점해야 먹거리가 생겨날 텐데 가스를 많이 사용하는 음식점들이 LPG가스를 사서 쓰겠냔 말이지. 거리를 조성하기 전에 도시가스 수요조사를 주민 대상으로 실시 했는데, 설비비용적인 부분에서 신청자가 400~500만원씩을 부담해야 되니까 신청을 안 해서 도시가스 설비가 안됐지 아마.” 주민의 이야기는 지난 주 익산대로변을 걷다 만난 주민의 이야기와 동일했다. 문화예술의 거리에 도시가스가 설비되지 않아 애로사항이 많다는 현실. 67년을 평화동에서 거주한 주민의 이야기는 과거의 영광을 잃고 쓸쓸한 현재의 도심을 여과없이 담고 있었다. 그와 헤어져 몇 걸음 걷다보니 ‘된장 짜장’으로 유명한 국빈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된장 짜장’이라는 생소한 메뉴가 시민들의 발걸음을 끌어당길 것만 같았지만, 머리에 흰 서리가 내려앉은 주방장은 뒷짐을 지고 한가로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하고만 있었다.
익산의 ‘작은 명동’이라 불리던 영정통거리를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나와 정면을 바라보니, 익산의 상징 ‘5각형 보석’이 한가운데 박혀 아치형의 모양으로 제작된 문화예술의 거리 입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 낙후된 원도심.. 활성화 방안은 영정통거리의 빈 점포는 소규모 공연장과 갤러리, 아트카페와 화실, 공방이 하나둘씩 들어차며 예술을 꿈꾸는 거리로 변신하고 있었으며, 도깨비공연과 아트마켓-활짝 등 공연과 전시를 통해 시민들의 적잖은 호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영정통거리는 도로정비와 인프라 구축으로 거점공간이 확보된 상황이지만, 더 많은 문화예술프로그램과 더 풍성한 즐길 거리들이 필요한 것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으며, 문화예술프로그램 개발과 함께 지속가능한 콘텐츠 개발, 노후화된 건물의 리모델링 등이 과제로 남은 상황이다. 또한 도시가스 설비는 문화예술의 거리에 먹거리 문화 조성을 촉진할 수 있을뿐더러 사람들을 유입 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에 와서 문화예술의 거리에 도시가스를 재 설비한다고 해도 지금 조성된 거리를 갈아 엎어야 되는 상황에 직면하기 때문에 적법한 행정조치가 필요하다. 게다가 일제강점기 호남선과 전라선이 나눠지는 호남의 중추적 노선 역할을 수행한 익산역이 일본인들의 식량수탈을 위해 만들어져, 익산역 주변에는 아직도 뼈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잔재 및 가옥구조들이 많이 남아 있어, 보존이든 정비든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실정이다.
특히 평화동 일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A씨는 “중앙동을 살리기 위해선 아주 서민이 아닌 서민보다 조금 높은 세대의 서민들을 위한 아파트를 500세대나 1000세대 정도 규모로 중앙동 어디에나 지어만 놓으면 중앙동은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라며 “아파트에 입주하는 조건은 아무나 들어오는 것이 아닌, 자녀수 5인 이상 가족은 0순위, 4인 이상은 1순위, 3인 이상은 2순위 등 우선순위를 배정하고 1억원 가량의 아파트를 5,000만원에 매매해 20년 동안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고 제언하기도 했다. 이어 “그곳에 거주하는 시민이 직장이 없어 생계가 곤란한 경우에는 공공근로사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해 취업을 보장하면 된다”라며 “젊은 세대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외할아버지나 시댁에서 손자, 손녀를 보기 위해 익산을 찾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가족들을 보기 위해 익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KTX를 이용해 방문할 경우에는 KTX 할인권을 지급하는 등 혜택을 보장 할수록 방문객은 많아 질 것이고, 사람이 모여야 약국도 되고 병원도 되고 학원도 되는 등 상권이 활성화 될 것”이라며 “멀쩡한 곳에 문화거리 조성한다고 하고 문화공연 한다고만 하면 관련자 이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일정을 통해 구도심 공동화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중앙동과 평화동 일대를 활성화 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도시 곳곳에 산적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심한 듯 해는 뉘엿뉘엿 서쪽 하늘로 넘어가고 있었고, 골목 어귀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며, 일제의 뼈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과거 익산의 만남의 광장 역할을 수행했던 옛 영정통거리에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왔다. 송승욱·강정호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