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편집자주>

◇ 大路, 골목들의 연결고리.. 그 속엔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며칠 새 하늘이 흐릿하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초여름 무더위의 기승을 한풀 꺾어줄까 기대했는데, 비 개인 후 날씨는 잠시 선선한 듯 하다가 금새 찜통 더위를 방불케 했다. 습도가 높은 대기의 열기에 몸은 훨씬 더 빨리 지쳐갔다.

지난 2주 동안 밟았던 길을 되걷기 때문일까. 기분도 처질대로 처지고 있었다. 하지만 터미널에서 역전까지의 사이를 얼키설키 연결한 골목들을 다시 보지 않으면 광장으로 나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느린 속도로 만난 사람들과 길의 기억들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좁거나 넓은 길을 연결하며 결국에는 삶의 네트워크의 플랫폼인 광장을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웃음을 나누는 주민들의 웃음소리, 사람들이 찾지 않아 썰렁해진 동네 골목어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상인들의 무기력한 모습, 옛 모습에 심취해 과거를 그리워하는 노인들의 회상하는 모습까지, 길 위에 녹아내린 삶을 다시 한 번 더듬었다.

영정통 끝에서 익산대로변으로 나가며 확 트인 익산역 광장을 바라보았다. 광장은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철길을 품은 채 모든 사람들에게 가슴을 내주고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 서서 역사를 바라보니 선상역사로 준공된 익산역의 위용이 느껴졌다. 역사가 지금의 모습까지 만들어 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길을 달려왔을까.

역 광장에는 사방으로 교차하는 이용객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하다. 업무 차 출장을 내려온 직장인들, 여행을 떠나는 젊은 대학생들, 그리고 곳곳의 도시에서 익산을 방문한 관광객들로 넘쳐 흘렀다.

이런 윤택한 평화는 대참사의 상처 위에서 구축됐다. 화약을 싣고 가던 열차가 폭파됐고, 수많은 희생자와 폐허 위에 새로운 역세권과 오늘의 역사가 세워진 것이다. 불현듯 역사의 웅장한 자태 이면에 잔존할 폭파사고 당시의 모습이 궁금해진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역 앞 길을 건너 대로변을 따라 걷다보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숨어있던 찐빵과 만두 냄새가 코 끝을 자극하며, 발길을 끌어당겼다.

그 옆엔 익산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OB엘베강 맥주집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곳은 동네 사랑방처럼 동네 사람들로 북적였다.

때마침 심한 갈증을 느끼던 찰나였다. 꽁꽁 얼려진 얼음잔에 시원하게 담긴 생맥주를 보니 기자의 목젖이 어느새 '꿀꺽'하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만남과 담소가 한창인 이곳이 제2의 역전 광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골목 안에 국한돼 골목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던 삶은 대로변을 타고 다른 동네, 다른 지역으로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 이리역 폭파사고.. 아비규환 ‘그 자체’

이리역 폭파사고 당시 불과 100m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미용실과 미용학원을 운영하며 폭파사고를 직접 겪었던 최윤경 원장을 만나보기로 했다. 너무 늦어지면 학원이 문을 닫을 수 있어 맥주 한잔은 뒤로 미뤄야 했다.

최윤경 미용전문학원의 최윤경 원장은 현재 전문미용인을 양성하며 시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이리역 폭파사고를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산 증인으로 알려져 있다.

최 원장에게 이리역 폭파사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 묻자 지그시 눈을 감고 가슴 아픈 기억을 무겁게 끄집어 냈다.

“당시 운영했던 미용학원은 중앙동 농협 아래 건물에 있었고, 미용실은 이리역 앞 삼한당 약국 2층에 있었지. 그 날 저녁 9시쯤 웬만하면 미용실 마감 시간이었는데 이일여고 선생님 머리를 하고 있었어. 그땐 전기나 가스난로가 없고 다 연탄난로를 사용했기에 그 날 미용실 창고에 연탄 100장을 떼다 놨지. 나는 선생님 머리를 하고 있었고, 둘째 남동생은 친구 4명을 미용실로 데리고 와 축구를 보고 있었어. 근데 갑자기 ‘탕!’하면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등이고 불이고 다 끊어져 앞이 잘 안보일 정도로 깜깜해졌어. 하필 그 날 연탄을 떼놔서 연탄 100장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 미용실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까맣게 뒤집어썼지. 그 때 ‘아~ 북괴가 쳐들어왔구나. 북괴가 쳐들어와 폭탄을 떨어뜨리는 구나’라고 느꼈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하필 건물이 나무로 만들어진 목조건물이라 갈팡질팡하며 1층으로 내려가려고 봤더니 나무계단이 바닥으로 떨어져버려 2층에 대롱대롱 떠있었다니까. 그 와중에도 둘째 남동생이 운동신경이 좋아 2층에서 1층으로 지 친구들하고 뛰어 내려가더라고. 그러고선 남동생하고 친구들이 계단을 다시 들고 세워놔서 허겁지겁 내려왔어. 미용실 안에 짐들도 많았는데 그딴 거 챙길 겨를이나 있었겠어?”

38여년이 훌쩍 지난 그 날의 사고를 최 원장은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 원장은 계속해서 당시의 상황을 이어나갔다.

“시에서 방송도 무지하게 나왔어. 시에서는 ‘곧 또 떨어질 거니까 빨리 대피해라’라면서 방송을 했다니까. 그때 당시에는 중앙동에 워낙 식당이랑 여관들이 많아 엄청 번화가였어. 그때 삼남극장에서 하춘화가 공연을 하고 있어서 하춘화 보려고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지. 거기다가 극장주변으로 신흥장여관, 미도여관이랑 막 지어진 영풍여관 등 여관들이 엄청 많아서 사람들이 다 거기서 지내고 있었어. 그러다보니 깜깜하니까 여관에서 뛰쳐나오는 사람, 식당에서 밥 먹다말고 뛰어나 온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어. 또 미용실에선 슬리퍼를 신고 일을 하니까 나와 보니 신발을 신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지.”

“거리로 나 온 사람들이 다들 정신이 없어서 서로 밀치고, 바닥에 넘어진 사람들을 걷어 차고 그랬어. 나도 정신이 없어 사람들한테 걷어 차이고 돌부리에 걸려 자빠졌는데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뛴 거 같아. 그 와중에도 동생들 손을 꼭 잡고 주현동에 있는 고모네 집에 가자마자 의식을 잃었지 아마. 내가 다쳐서 의식이 없다가 새벽 4시에 눈을 떠보니 폭발소리가 생각났어. 그래서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는 거야. 동생들이나 고모나 물 좀 마시라고 하고, 진정하라고만 했지 아무 말도 안 해줬어. 왜 그런가 봤더니 내가 그날 여동생한테 휴가를 줬거든. 그래서 여동생이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놀러갔는데, 여동생이 타고 내려오기로 한 열차가 딱 그 폭파사고 난 그 열차였어. 그때 당시에는 휴대폰도 없었고, 폭파사고로 전화도 다 끊어지고 해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 며칠 동안이나 여동생한테 연락이 없으니 죽었다고 생각하고 시체라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리역을 뒤지고 다녔지. 또 시체가 있는 곳이라면 슬리퍼 차림으로 찾아가 여동생 시체를 찾으러 다녔어. 나중에서야 여동생이 공중전화로 고모네 집으로 전화해서 열차 시간이 3분 늦어 폭파열차를 못타고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어 대전역 대합실에서 며칠 동안 날을 샜다고 하더라고. 그땐 참 끔찍했지. 아비규환 그 자체였어.”

그렇게 아픈 기억을 토해낸 최 원장은 익산역에 세워진 추모탑에도 한 번 가볼 것을 당부했다.

최윤경 원장으로부터 당시의 상황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은 뒤 찾아간 익산역사는 몇시간 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로 어느덧 뉘엿뉘엿 기우는 석양아래 웅크리고 있었다.

최원장이 안내해 준 대로 역사 주차장을 통해 역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슴 아픈 역사(歷史)를 숨기기라도 하듯 추모탑은 역사 끝자락 구석 한 모퉁이에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다.

추모탑 앞 비석에는 이리역 폭파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돼어 있었고, 비석의 뒷 판에는 순직자 명단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추모탑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자세히 살펴봤다. 탑 하단부에는 사고 당시의 모습과 현장 사진이 박혀 있었고, 탑의 우측에는 최윤경 원장이 시인으로 활동하며 지은 ‘재난의 길목에서’라는 시가 게시돼 있었다.

추모탑 앞에 서니 숙연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듯 휘몰아쳤다.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탑 앞에 서서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시민들에게 목례를 올리고 역사를 빠져나왔다.

◇ 불법풍속업소로 전락한 여관촌

익산역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기는데 50m도 채 가지 않았지만 대로변으로 이어지는 골목골목 마다 여관, 여인숙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 하나당 2~3개씩 여관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을 정도로 익산역 앞은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시설들이 즐비했다.

본래 여관, 여인숙 등은 객지에서 익산을 방문하는 관광객이나 외지인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는 쉼터였지만, 지금은 불법 성매매 업소로 전락해 그 본래적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저녁 8시임에도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업주들은 저마다 길가 한 곳에 자리를 마련해 놓고 동네주민, 관광객, 시민 등 가리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혹여나 타 시·도에서 익산을 방문한 외지인들은 익산을 어떤 이미지로 기억하고 돌아갈까.

외지인들이 역사를 나오자마자 볼 수 있는 것이 불법 성매매로 얼룩진 여관촌이라는 현실에 부끄러움이 앞섰다.

이러한 불법 업소가 익산의 랜드마크라 칭해지는 익산역 앞에 빼곡한데도 단속 및 정비가 되지 않고 있어 부끄러웠다.

더욱이 여관이 자리 잡고 있는 골목에는 ‘청소년 보행제한구역’이라는 붉은 표지판이 덩그러니 걸려있어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다.

업주들의 손짓에 무심하게 돌아서며, 행정기관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익산시의 첫 얼굴이 정갈하게 정비되기를 바랐다.

붉던 하늘은 어느덧 검은 어둠에 뒤덮이고 있었다. 왠지 모를 고요함이 온 몸을 휘감듯 감돌았고, 저녁 공기마저 차갑게 느껴졌다.

송승욱·강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