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의 시작, 익산대로 31길

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편집자주>

원불교 익산교당 옆으로 난 산 길

원불교 익산교당 입구 피어있던 꽃들

◇ 자연이 만들어 놓은.. 자연 그대로의 산책로

이번 여정의 출발점인 익산대로 31길의 초입은 좁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다. 서쪽의 대신마을 입구에서 북쪽으로 갈리는 곳에 원불교 익산교당이 서 있고, 그 옆으로 난 길이다. 길은 다른 도구를 이용하지 않고 순전히 사람이 지나다니며 만들어낸 산 길이다.

오르막 길의 끝자락

구불구불 이어지며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 양 옆으로는 우거진 잡목과 풀들이 살랑거리며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배웅하고 있다. 잡초들 사이에서는 속절없이 하루를 보내는 찌르라미들이 목청껏 짧은 삶을 노래하고 있었다.

길 옆으로 늘어선 낙락장송들은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는 석양 볕을 가려 언덕 끝자락까지 긴 그늘을 만들어 놓고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산책로 위에서 기자의 몸은 솔향을 안고 불어오는 바람에 휘감겨 도시 안에 감춰진 낯선 길을 해찰하느라 정신줄을 놓았다.

상쾌한 노송의 숨이 기자의 폐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가 쑤우~ 밀려나가며 묵은 먼지를 씻어냈다. 여기서 동쪽에 자리잡은 원광대학교 수목원이나, 익산시의 북단에 위치한 편백나무 숲에서 마시는 공기와는 판연히 다른 치유의 기운을 도시 한 가운데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오르막 길 후 이어지는 내리막 길

신기하다. 언제부터였는지 사람들이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거리로 보면 보통 걸음으로 10분 정도의 거리를 기자는 40분을 길 위에서 보냈다. 오르막길 오른편의 우거진 숲과 왼편의 구릉 사이로 만들어진 산길은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지만, 내리막 길까지 따스한 햇빛을 볼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한 곳에 이르렀다.

우거진 숲은 거기서 끝이났고, 기자 앞을 녹슨 철조망이 가로막았다. 철조망 옆을 따라 몇 걸음 걸어내려가니 오른편으로 ‘중앙남자원로수도원’이라는 나무 현판이 걸려있다.

수도원 내부는 향나무들이 은은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고, 넓게 조성된 잔디밭 위로 일본식 건축 양식의 수도원 본관건물과 그 옆으로 수도원식당이 위치해 한적한 모습을 연출했다.

수도원 반대편으로는 자물쇠가 걸린 큼지막한 대문 너머로 풀이 허리춤까지 자라난 넓은 들판이 끝 모르게 펼쳐져 있었다.

수도원과 마을 중간 사이 갈림길

하늘 높이 솟아 오른 소나무들과 담벼락이 만들어 놓은 자연의 그늘 사이로 좁은 산길을 따라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은 수도원 아래쪽으로 위치한 마을 안으로 방향을 돌렸다.

◇ 길 위를 뒹굴던 낙엽들.. 마을 어귀 쓸쓸함만 더해

수도원의 왼편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낡은 주택들이 줄지어 이어진 마을이 펼쳐졌다.

마을 길 위로는 원불교중앙총부에 심어져 있던 나무들이 가을을 알리듯 담벼락을 넘어 낙엽들을 떨어뜨리고 있다.

노랗게 물든 낙엽들이 길 위로 떨어져 마을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바닥을 뒹구는 모습은 가을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알리는 듯 했다.

싸래비와 쓸어 모은 낙엽들

낙엽을 밟아가며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저 멀리서 동네 주민이 싸리비 한 자루를 움켜 쥔 채 분주하게 낙엽을 치우고 있다.

주민에게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그가 밝은 미소와 함께 기분 좋게 화답했다. 주민에게 “매일 낙엽을 쓸고 계시냐”고 묻자 매일 아침, 저녁으로 낙엽을 치우고 있다며 그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마을 길 위에 떨어진 낙엽들을 매일 오전, 오후로 나눠서 하루도 빠짐없이 청소하고 있어. 옆 집 사는 이웃주민도 원래는 같이 치우는데, 오늘은 일이 있어서 그런가 안 나오네? 집 뒤로 원불교에서 단풍나무를 잔뜩 심어놔서 모기 때문에 살수가 없어. 우리 집 앞에만 낙엽을 치우자니 그렇고 해서 전체적으로 다 치우는데 이것도 시간이 꽤 걸린단 말이지.”

단풍나무 숲 옆, 주택과 주택 사이 위치한 주택

다시 비질을 하는 그를 지나쳐 주택과 주택 사이로 만들어진 골목길로 향했다. 길이 전혀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골목길로 접어들자 주택가 뒤에 또 다른 주택들이 위치해 있었다.

골목 안으로 살짝 들어가자 동네 주민의 말처럼 단풍나무가 셀 수 없을 만큼 들판에 빼곡하게 심어져 있었고, 아직까지는 색이 들지 않은 단풍잎이 싱그럽게 나부끼고 있었다.

단풍나무 숲 옆으로는 휑한 텃밭하나가 만들어져 있었고, 텃밭 주변으로는 LED 조명이 하나씩 심어져 있었다.

텃밭 앞으로 하얀 집 한 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그 길옆에 자리한 집 사이로 또 다른 집이 위치해 있었다.

단풍나무 숲을 뒤로 발걸음을 옮겨가던 순간 한 주택의 담벼락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담벼락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보니 담벼락은 불에 달궈진 듯 뜨거운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담벼락 주변에 햇빛을 가릴 수 있는 구조물이나 나무들이 없어 하루 종일 뜨거운 햇빛을 그대로 받고 있었던 것.

담벼락을 되돌아서 길 위로 다시 나오니 동네 주민은 전봇대 아래 가지런히 쓸어 놓은 나뭇잎에 불을 붙여 태우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새하얀 연기를 피워내며 타들어 갔고, 나뭇잎이 타면서 나는 냄새는 기자의 어린시절 시골마을 추억을 뭉글뭉글 되살려냈다.

애정을 갖고 동네를 아꼈던 주민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내리막길을 따라 다시 내려갔다.

길의 왼편으로는 주택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고, 사람이 사는 집들도 있었지만 공·폐가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대문의 고리조차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녹슬어 버린 집, 과거 하숙을 치며 생계를 이어 갔지만 이제는 사람이 찾지 않아 노끈으로 대문을 질끈 묶어 놓은 하숙집, 원불교에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 주민들 등 사람의 인기척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길 위로 떨어져 굴러다니던 낙엽들이 쓸쓸한 마을의 정취에 외로움을 더하는 듯 했다.

마을을 벗어나 내리막 길이 끝나고 이어진 평지

◇ 동네 주민들의 쉼터 연방죽.. 정자에 앉아 시원한 바람 맞아

내리막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다 보니 마을의 마지막 집을 끝으로 내리막길이 끝나고 평탄한 평지가 이어졌다.

특히 평지를 따라 걸으니 왼편으로 논들이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저 멀리 우거진 숲과 인삼천으로 둘러쌓인 인삼밭도 볼 수 있었다.

논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보라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삼삼오오 모여 꽃밭을 이루고 은은한 꽃향기를 뿜어냈다.

겨우내 쓰려고 쌓아 놓은 연탄들

오른편은 원불교 성지인 총부의 구역을 구분이라도 하듯 높게 담장이 만들어져 있었고, 평지를 따라 50m쯤 걷자 왼편으로 하얀색 집의 모서리 부분에 겨우내 쓰기 위한 연탄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원불교 총부가 옆에 위치해 있어서인지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원불교의 예비교무 수행 도량인 원불교학과 서원관이 궁전같은 자태를 뽐냈다.

서원관 앞으로는 넓게 펼쳐진 들판 위에 밭이 조성돼 있었고, 저녁 7시 20분 철길 위로 태양은 뉘엿뉘엿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하늘은 석양에 물들어 붉게 변했고, 밭 한가운데 풍향계가 바람을 맞으며 빙글빙글 돌며 정중동의 들판을 지키고 있다.

연방죽에서 산책하는 주민들

그 옆으로 주민들이 쉴 수 있는 공원 하나가 마련돼 있다. 동네 주민들은 이곳을 ‘연방죽’이라고 불렀다.

연방죽 안으로는 연꽃들이 가득 심어져 있다. 특히 방죽 안으로 물이 있어서 그런지 방죽을 지나쳐 온 바람은 차갑게도 느껴졌다.

연방죽 둘레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연방죽 한 가운데 만들어진 정자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던 주민들, 운동기구 위에 올라가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던 사람들, 벤치에 앉아 부채질을 해가며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 등 연방죽은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이곳은 그냥 원래 방죽이었는데, 시에서 올해 초여름에 5억원을 들여 공원으로 만들었다”며 “방죽을 공원으로 만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잡초 제거 같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벤치 주변이든 산책로 주변이든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방죽 주변을 두르고 있던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걸어 보니 동네 주민들의 말처럼 풀들이 정비가 되지 않은 채 무성하게 자라 있어 옥에 티처럼 느껴졌다.

공원산책로를 빠져나와 다시 길 위로 올라 왔다. 공원 뒤 철길 위로 기차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철길 앞으로 종교 성지가 위치해서 그런지, 이번 여정 중에 가장 값졌던 것은 ‘천천히 걸은 것’이라는 깨달음이 새삼 가슴 가득 번졌다.

천천히 걸음으로써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마음이 정화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 주민들 또한 산책을 하는 동안 빠르게 걷는 법이 없다. 모두가 천천히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 저녁 8시, 불 꺼진 마을.. 공기 좋고 한적하기만 해

철길 아래로 길은 계속 이어졌지만, 해가 모습을 감추며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해 다음 여정으로 미뤄둔 뒤 출발했던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돌아가는 길 또한 우거진 나무들로부터 나오는 상쾌한 공기로 가득해 자연스레 산림욕을 했다.

산림욕을 하러 갔다 욕만 하고 온다는 요즘 시대에서 이처럼 자연이 만들어 놓은 산림욕장을 걷는 것만으로도 여유를 찾기에 충분했다.

중앙남자원로수도원 옆 길

중앙남자원로수도원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

아까 지나쳤던 마을을 지나 중앙남자원로수도원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수도원 옆으로 작은 골목길 하나가 눈길을 끌어당긴다.

수도원 옆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나갔고, 20m쯤 걸어가자 큰 길이 나오면서 대로변으로 빠져나왔다.

원불교 총부 2주차장 옆으로 이어진 오솔길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진 길을 따라 여정의 출발점으로 향했다. 얼마 못가 원불교 중앙총부 제2주차장 옆으로 조그만 오솔길이 대로변과 이어졌다.

오솔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고, 몇 걸음 떼지 못해서 고물상 앞으로 이어진 좁은 길 위로 고장 난 세탁기, TV, 선풍기 등 가전제품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널브러져 있다.

저녁 8시쯤, 이른 시간임에도 동네는 불이 꺼진 채 가로등 불빛만이 동네를 밝히고 있어 한적하기만 하다. 심지어 바로 옆 대로변 위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는 차들을 뒤로 동네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이 공기를 뿜어내 상쾌하기까지 하다.

오솔길을 따라 위로 걸어올라 갔고, 더 이상 길이 이어지지 않아 옆길로 빠져나갔다.

대로변과 이어진 길은 지난 주 걸으며 봤던 깨들이 비닐에 쌓인 채 놓여 있었다.

구름사이로 비추던 석양의 붉은 빛

구름사이로 희미한 석양의 붉은 빛과 반대쪽 하늘 위 밝은 빛을 발하며 떠 있던 달이 이번 여정의 끝을 비추고 있었다.

송승욱·강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