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공장 길도 사람이 다닌다

서부평야를 가르는 농로에서 시작해 농촌마을과 신시가지를 지난 선화로는 어느덧 철로를 건너 동쪽으로, 동쪽으로 익산시의 원도심을 훑으며 지나왔다. 그 가운데 이젠 추억이 돼버린 골목길 풍경과 옛 마을들의 흔적들을 찾아냈으며, 길을 따라 도시가 형성되고 변화하는 모습들을 더듬었다. 길에서 만났던 익산시민들은 도시의 변화를 목격한 경험담을 아낌없이 말해주곤 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도시의 옛 길들을 다시 그려볼 수 있었고 변화의 의미를 되새김질 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선화로가 보석로와 교차하는 보석사거리에 이르니 지나온 길들을 되돌아보게 됐다. 여기부터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곳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업단지이기 때문이다. 공장과 공장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삭막한 분위기의 길들로 선화로가 뻗어나가고 있다.

허나 산업단지를 나누는 길이라도 사람들을 위한 길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지 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매일 오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며 누군가는 그 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추억의 길이다. 언젠가는 논과 밭이었거나 불모지였던 곳에 반듯한 아스팔트길이 새로 놓였고, 그 때부터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왔을 것이 틀림없다.

귀금속의 메카를 떠올려 보기

익산시상하수도사업단 건물

보석사거리에서 약촌오거리 방향으로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다 보니 곧바로 좌측으로 익산시상하수도사업단 건물이 나타난다. 시청사가 좁은 탓에 뿔뿔이 흩어진 익산시청의 한 부서가 바로 이곳에 위치해 있다.

알아보니 상하수도사업단 건물은 원래 건전한 청소년 육성을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근로청소년회관이었다. 1982년 지어져 청소년의 여가활동과 교육 등을 담당해오다 1998년 통합정책으로 청소년회관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이후 2000년부터 익산시가 상하수도사업단으로 이용해오고 있는 중이다.

보석공장에 다니던 근로청소년들을 위한 임대아파트로 지어져 이름도 ‘청아아파트’인 건물도 바로 사업단 건물 옆에 자리해 있다. 옛 익산시의 보석산업 부흥기에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일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직업학교에서 포클레인 실습을 하고 있는 모습

사업단을 지나 조금 내려가다 보니 오른편에 애림직업전문학교가 나온다. 학교 실습장에서는 포클레인 자격증을 따기 위해 열심히 실습 중인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젊은 사람부터 나이가 든 사람까지 순서대로 실습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익산귀금속판매센터 표지석이 지워져 있는 모습

울타리 너머로 실습을 구경하다 애림직업전문학교 정문으로 들어가 보니 규모가 꽤 크고 학생들도 많았다. 입구에서 만난 표지석을 보니 원래 새겨져 있던 글씨를 지워놓은 상태였다.

수소문해보니 ‘익산 귀금속판매센터’라고 쓰여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맞다. 원래 이 학교는 귀금속판매센터로 사용되던 곳이라는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제1공단의 귀금속판매센터가 왕궁면 주얼팰리스로 옮겨간 이후 이곳은 어느새 직업학교로 변모한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까

다육식물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직업학교를 나와 길 건너편을 보니 꽤 큰 규모의 다육식물 농장이 있었다. 실외에 자리한 다육식물들도 볼만했는데 하우스 안은 더 굉장했다. 저마다 다르게 보이는 수백 수천가지의 다양한 다육식물들이 빛나는 보석처럼 느껴졌다. 보석의 메카였던 익산의 산업단지는 점차 쇠락해가는 모습인데 보석 같은 다육식물들은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하우스를 나와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단지 내에서 힘차게 돌아가고 있는 입주 기업들이 속속 보였다. 수상축하 현수막이 내걸린 회사를 보고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귀금속단지의 후문

예전 공단의 후문으로 쓰였던 곳에 다다랐다. 이젠 문도 없고 문이 달려 있었던 기둥도 한쪽 밖에 남지 않은 모습이다. ‘익산귀금속공업단지’라고 쓰여 있는 낡은 현판만이 이곳이 공단의 입구임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과거 공장 인부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후문을 숱하게 지나다녔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때는 출입구를 관리하는 경비원도 근무하고 있었지 않을까 싶었으나 이젠 부서진 문으로 차량이 통행하는 길이 돼있다.

귀금속단지 내의 낡은 공장 건물들

후문에서 선화로 방향을 올려다보면 오르막 비탈에 나란히 들어선 공장들이 수두룩하게 눈에 들어온다. 공단 내에 들어서니 일단 비어있는 곳들이 눈에 띄고 활발히 가동되고 있는 공장도 많았다. 상당히 조용한 편이어서 귀금속 관련 기업들은 생각보다 소음을 발생시키지 않은 공정을 지닌 듯했다. 허나 세월이 흐르며 산업단지 기반시설도 낙후된 탓인지 공장 내 하수관 보수가 진행 중이어서 시끄러운 공사소음이 발생하고 있었다.

보석 공단의 속 앓이

귀금속단지 정문

선화로63길은 제1공단의 정문과 후문을 이어주는 공단 중앙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길 좌우로 화려한 번영을 누렸던 귀금속 관련 공장들이 들어서 있고 이제는 군데군데 세월의 더께가 쌓이고 있는 모습이다. 언제부턴가 비어있는 건물은 관리의 손길을 받지 못해 무성한 풀이 감싸고 있고 깨진 유리창은 방문객에게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풀로 뒤덮여 정글을 연상케 하는 한 건물 입구에서 만난 안내문은 과거 호황을 누리던 시절을 짐작케 했다. 보세구역이라는 안내와 물품의 반·출입을 신고하지 않을 경우 처벌받을 수 있다는 내용의 안내판은 누군가가 직접 손으로 쓴 것이었다. 하지만 반듯하고 일정한 글씨가 인쇄된 글씨로 보일 만큼 굉장한 솜씨였다.

귀금속단지를 가로지르는 선화로63길 표지판

선화로63길 입구에 다다르니 공단의 정문이다. 선화로에서 보면 지붕에 ‘익산귀금속보석공업단지’라고 적혀있어 공단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수출자유지역으로 한국의 보석 수출입을 담당하며 급격히 성장한 익산의 보석 산업을 이끌던 장소다. 전국 유일의 ‘보석 도시’라는 타이틀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허나 익산시의 보석 수출입 독점 규제가 풀리자 기업들은 자연히 타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아예 외국으로 이전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익산의 보석 산업은 하향세의 길을 걸어왔다.

이후 익산시는 보석박물관과 보석판매센터 건립 등 보석의 도시라는 명성을 잇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고 현재도 보석산업 고도화사업 등 여러 방면으로 진행 중이다. 또 익산을 떠난 기업을 다시 유턴하여 익산에 돌아오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담장과 철조망 안의 굴뚝

산업단지를 지나는 길에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보석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익산시의 노력은 모두 제1공단을 비껴가고 있다. 익산시는 이미 보석판매센터를 옮겨갔고 그 옆에 짓고 있는 보석클러스터에 남은 공장들도 옮겨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니 노후화된 산단이 과거의 화려했던 빛을 잃고 스러져가는 길만 남은 셈이다.

산단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회사의 파란 굴뚝

공단을 나서니 건너편에 파란색 굴뚝 두 개가 나타난다. 익산시 제1산단과 제2산단에 스팀 등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회사인 전북집단에너지 소유다. 산단에 접근하기 멀리서부터 보이는 굴뚝은 공업지역이라는 느낌을 확실히 전달해준다.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담장이 선화로를 따라 이어지지만 담장 너머의 굴뚝을 가리기는 턱없이 모자라다.

정완창 기자